제주특별자치도 역사(제주도 역사)와 민족해방운동, 8 15해방,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제주도 역사)와 3 1기념시위,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제주도 역사)와 남로당,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제주도 역사)와 2 7폭동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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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제주도 역사)와 민족해방운동, 8 15해방,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제주도 역사)와 3 1기념시위,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제주도 역사)와 남로당,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제주도 역사)와 2 7폭동사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제주도 역사)와 민족해방운동

Ⅲ.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제주도 역사)와 8 15해방(8 15광복)

Ⅳ.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제주도 역사)와 노동당과 제주도당

Ⅴ.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제주도 역사)와 3 1기념시위

Ⅵ.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제주도 역사)와 3 10관민총파업

Ⅶ.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제주도 역사)와 남로당(남조선노동당)

Ⅷ.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제주도 역사)와 2 7폭동사건

Ⅸ.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제주도 역사)와 제주 4 3항쟁(제주 4 3사건)

참고문헌

본문내용

로 개편된 이후에도 당을 주도해 나갔던 김정로와 인민위 위원장이었던 오대진이 당에서 제명을 당하였다. 이 조치는 당의 조직책인 조몽구의 건의하에 이루어졌다. 당의 중심적 인물이었던 두 사람이 제명된 이유를 살펴보면 김정로의 경우는 입법의원 선거과정에서 행한 반당적 행위로, 오대진은 당 활동을 게을리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각 지역 중심 지도부의 체포는 각 면 지역에서 활동하던 활동가가 지도부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들은 도당의 부족한 인원을 메우기 위하여 도당과 면당을 오가며 활동하게 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8·15 이후부터 활동한 젊은 층이었다.
당지도부의 개편과 더불어 하부조직도 변화를 갖게 된다. 이 시점까지만 하더라도 제주도당의 주요활동은 대중조직사업에 집중되었는데, 3·1사건의 성과와 더불어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이후 미소공위 개최 직후부터 시작된 당원 5배가운동은 47년 9월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당원 배가운동으로 당에 들어온 사람들은 20대 초·중반의 젊은 층이었다.
이들은 당 지도부로 부상한 젊은 층과 함께 당 조직에 새로운 기류를 형성하였다. 해방 직후 지도부에서 활동하였던 사람들은 대개 일제시대에 활동한 경험을 갖고 있었고 활동과정에서 어느 정도 이론적 훈련을 거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3·1시위 이후에 미군정과 우익의 탄압과 체포로 신변이 노출되었다. 이렇게 되자 이들은 육지로 활동 공간을 옮기거나 일본으로 밀항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심지어는 활동하기 어려운 조건을 이유로 조직에서 이탈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조직의 부족한 인원을 메우고 조직에 사기를 불어넣은 세력은 젊은 층이었다. 특히 이들 중에는 해방후 사회모순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성장해온 농민, 어부(해녀) 등 기본계급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실천력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탁월하였다. 3·1시위 이후 부상한 신진들과 당원확장사업을 통해 들어온 이들이 당의 주요활동 역량으로 자리잡게 됨으로써 당 활동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이들이 47년 후반부터는 당을 주도하였고 무장투쟁을 주장하여 4·3봉기의 지도세력이 되었다.
Ⅷ.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제주도 역사)와 2 7폭동사건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위한 UN감시위원단, 입국거부 및 단선(單選)반대 폭력투쟁을 지령 받은 남로당 제주도당 「인민해방군 사령관」 김달삼(金達三:이승진)은 1948년 2월 7일을 기하여 위의 인민해방군(무장폭도)을 지휘 신창, 고산, 저지, 세화, 김녕 등의 경찰지서를 습격하여 기물손괴 및 경찰관 폭행을 자행하였고 안덕면에서는 순찰중인 경찰관 2명을 수십 명의 나로당원들이 집단폭행 결박하고 무기를 탈취 생매장 직전에 구출한 사건이 발생
※ 본 2ㆍ7 사건은 남로당 중앙당에서 전국에 지령에 의해 발생한 사건으로 제주에만 국한된 사건이 아니다.
Ⅸ.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제주도 역사)와 제주 4 3항쟁(제주 4 3사건)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를 전후해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소위 「인민자위대」라는 좌익 무장대는 이날 새벽 제주도내 24개 지서 가운데 제1구경찰서(제주)관내 화북삼양조천세화외도신엄애월한림 지서와 제2구경찰서(서귀포)관내 남원성산포대정지서 등 11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였다. 또한 경찰, 서북청년단 숙사와 국민회, 독립촉성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의 요인 집을 습격하였다. 이것은 그 후로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6년 6개월 동안 지루하게 계속된 제주도 유혈사태의 시발이었다.
첫날 지역별 피해상황을 보면 △화북=경찰관 사망 1명, 일반인 사망 2명, 지서 전소 △신엄구엄=경찰관 부상 1명, 일반인 사망 5명, 부상 10여명, 무장대 사망 2명, 민가방화 4채 △남원=경찰관 사망 1명, 일반인 사망 1명, 부상 2명 △한림=경찰관 사망 1명, 부상 2명, 일반인 부상 6명, 무장대 생포 1명 △외도=경찰관 사망 1명 △함덕=경찰관 행방불명 2명 △세화=경찰관 부상 2명 △대정=경찰관 부상 1명, 일반인 부상 1명 △조천=경찰관 부상 2명, 무장대 사망 1명으로 나타났다. 이 통계를 종합해 보면 4월 3일 하루 동안에 △경찰관=사망 4명, 부상 8명, 행방불명 2명 △일반인=사망 8명, 부상 19명 △무장대=사망 3명, 생포 1명의 인명피해가 나왔다. 피습지서 가운데 삼양애월성산포지서에서는 즉각 반격으로 쌍방의 인명피해가 없었다.
무장대의 인원에 대해서 군측 자료는 「무장폭도 5백 명, 비무장폭도 1천여 명」으로 밝히고 있다. 또한 경무부 공보실장 김대봉(金大奉)의 『現地踏査記』에는 「5백~6백 명으로 추정된다」고 기술되어 있다. 무장대의 무기에 대해서 많은 자료들은 일본군 패잔병들이 동굴 등에 매몰했던 무기와 탄약들을 찾아내 상당수 무장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으나 실제의 총기보유상황은 다소 빈약한 편이었다. 4월 3일 새벽 성산포 지서를 포위했던 40명가량의 무장대의 무기는 99식총 1정, 공기총 1정, 그리고 갈고리, 죽창, 몽둥이 등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붙잡힌 「산사람」의 심문과정에서 밝혀졌다.
남로당 대정면책을 지낸 이운방(李運芳)의 기고에는 『초기의 무기조달 상황을 보면 소총이 약 30정 정도였다고 하며 대정면의 그것은 3정 뿐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무장대의 무기는 오히려 4월 3일 이후 지서습격 과정에서 탈취한 총기와 5월에 9연대 장병 40여명의 「입산사건」이 일어나면서 크게 보강되었다. 미군정 정보보고서는 『폭도들은 4월 3일 하루 동안에 미제 카빈총 6정, 일제 99식총 1정, 탄약 119발을 노획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문헌
고용희(2006) / 바다에서 본 탐라의 역사, 각
국립제주박물관(2011) / 한국의역사와 문화 그리고 제주, 서경문화사
김창민(1990) / 제주도의 역사와 당제, 한국문화인류학회
이영권(2004) / 제주역사기행, 한겨레신문사
이영권(2005) / 제주역사 다시보기, 신서원
허영선 글, 이승복 그림(2010) / 바람을 품은 섬 제주도, 파란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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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08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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