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 론
2. 역사적 인물로서의 범일.
3. 범일의 탄생담
4. 산신 기원담과 단오제의 성격
5. 범일국사와 관련된 사찰연기설화
6. 결 론
2. 역사적 인물로서의 범일.
3. 범일의 탄생담
4. 산신 기원담과 단오제의 성격
5. 범일국사와 관련된 사찰연기설화
6. 결 론
본문내용
그 뒤로 마음대로 행각을 다니다가 멀리 서울에 들리니 때마침 회창 4년의 사태를 만나 중들은 흩어지고 절은 무너져 동분서주하여 숨을 곳이 없었는데, 때마침 하백의 인도를 따라가다가 산신의 마중을 받아 상산에 숨어서 홀로 선정을 닦는데 떨어진 과일을 주워 배를 채우고 흐르는 냇물을 마셔 목마름을 달래니, 행색이 마르고 기력이 부쳐 감히 걸을 수가 없게 된 채로 반 해가 지난 어느날 갑자기 꿈에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이제 떠나시지요.\" 이에 억지로 걸으려 했으나 도저히 힘이 미치지 못하더니 어느 결에 짐승들이 떡과 먹을 것을 물어다가 자리 옆에다 던지니 일부러 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주워 먹었다. 나중에 맹세하기를 \"소주에 가서 조사의 탑에 예배하리라.\" 하고 천 리를 멀다 않고 조계에 다다르니, 향기 어린 구름이 탑묘 앞에 서리고 신령한 학이 훌쩍 날아와 누대 위에서 지저귀니 절의 대중이 모두 이렇게 수군거렸다.
\"이러한 상서는 실로 처음 있는 일입니다. 필시 선사께서 오신 징조일 것입니다.\" 이때 고향에 돌아와 불법을 펼 생각을 내어 회창 6년 정묘 8월에 다시 뱃길에 올라 계림정에 돌아오니, 정자 위를 비치는 달빛은 현토의 성에 흐르고 교교한 여의주의 빛은 청구의 경계를 끝까지 비쳤다.
대중 5년 정월에 이르러, 백달산에서 연좌하고 있으니, 명주의 도독인 김공이 굴산사에 주석할 것을 청하여 한 번 숲 속에 앉은 뒤로는 40여 년 동안 줄지은 소나무로 도를 행하는 행랑을 삼고, 평평한 돌로써 좌선하는 자리를 삼았다. 어떤 이가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의 뜻입니까?\" 선사께서 대답하였다. \"6대에도 잃은 것이 없느니라.\" \"어떤 것이 대장부가 힘써야 할 일입니까?\" 선사께서 대답하였다. \"부처의 계급을 밟지 말고, 남을 따라 깨달으려 하지 말라.\"
함통 12년 3월에는 경문대왕이, 광명 원년에는 헌강대왕이 모두 특별히 모시는 예를 다하여 멀리서 흠양하였고, 국사에 봉하기 위해 모두 중사를 보내어 서울로 모시려 하였으나 선사께서 오랫동안 곧고 굳은 덕을 쌓았기에 끝내 나아가지 않더니, 갑자기 문덕 2년 기유 4월 끝에 문인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곧 먼 길을 떠나련다. 이제 너희들과 작별을 고하니 너희들은 세상의 감정으로 공연히 슬퍼하지 말라. 다만 스스로 마음을 닦아서 종지를 추락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5월 1일에 오른 겨드랑이를 대고, 발을 포개고 굴산사의 상방에서 입멸하시니, 춘추는 80세, 승랍은 60세, 시호는 통효, 탑호는 연휘였다.
3. 범일의 탄생담
나말 여초는 승의 신분과 지위가 사회적으로 한껏 올라서 있을 때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토호 출신의 고승인 범일이 누렸을 명성은 쉽게 헤아리고도 남는다. 특히 신도와 문중에서는 그의 시멸 뒤 그를 미화하고 기리는 방도를 찾던 끝에 신화구조를 본떠 적극적으로 형상화하는 방법을 모색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祖堂集
……그의 어머니 文氏는 여러 대를 내려오는 호귀한 씨족으로서 세상에서 부녀의 모범이라 불렀는데 태기가 있을 무렵에 해를 받아드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원화 5년경인 정월 10일에 탯속에 있은 지 열석 달 만에 탄생하니, 나계가 있어 특수한 자태이며 정수리에 구술이 있어 이상한 모습이었다. 나이 15세가 되어 출가할 뜻을 품고 부모에게 사뢰니, 양친이 함께 이런 말을 하였다. “전생의 좋은 인연을 심은 결과니, 그 뜻을 굽힐 수 없다. 네 먼저 제도를 받거든 나를 제도해다오” 이에 속복을 벗고 부모를 떠나 산으로 들어가 도를 닦았다.……
臨瀛誌
신라 때 양가의 딸이 山에 살고 있었으나 나이가 들도록 시집을 못 갔다. 우물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햇빛이 배를 비추자 돌연히 産氣가 있었다. 아비가 없이 아들을 낳자 집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것 같아서 아기를 얼음 위에다 버리니 새들이 날아와 아기를 덮어 감쌌다. 밤이 되자 하늘에서 상서로운 빛이 비추었다. 아기를 도로 데려다 기르니 이름을 梵日이라 하였다. 나이가 들어 성장하자 머리 깎고 중이 되었는데 신통으로 성불세계에 들어 오묘한 조화를 헤아릴 수 없었다. 神伏과 굴산 두 산에 두 개의 큰절을 창건하고 塔山을 지어 지맥을 보충했다. 후에 오대산에 은거하다가 宗寂하였다.
『溟洲』 6호 (1957)
때는 신라 46대 文聖王 때 곳은 溟洲(현 강릉시와 명주군 일원) 학산 마을에 늙은 부모슬하에 예쁜 무남독녀의 15세 가량의 외딸, 이렇게 세 식구가 근근히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어느 여름철 새벽에 이 꽃같이 아름다운 아가씨가 물길러 나갔다고 합니다. 후로 이상하게도 惡阻가 생기며 産氣가 있어 배가 부르게 시작하였더랍니다. 날이 가고 달이 차면서 열 달 만에 이 아가씨는 이목이 뛰어나고 풍채가 비범한 애비없는 玉童子를 낳았으니 남의 눈도 무섭고 또 늙은 부모는 집안의 망신이라 하여 구박이 심하여 할 수 없이 세 식구가 안방에서 남이 들을 세라 비밀히 의논한 결과 드디어 뒷산 큰 바위틈에 솜으로 싸서 사람 하나쯤 들어가서 능히 비를 피할 수 있는 오목한 곳에 버리기로 했더랍니다. 매일아침이면 처녀는 그 어린 생명이 하도 가엾어 남의 눈을 피하여 나가보았더니 어린 아이는 조금도 여읜 기색도 없을뿐더러 아기 누운 자리 밑에는 포근포근한 鶴 의 터리가 깔려있었으며 그 입가에는 젖 같은 것이 묻어 있었고 그 바위가에는 학들이 모여 울고 있었더랍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하늘이 내신 아이라 생각하고 남의 조소를 받으면서도 고히 길러 왔더랍니다.
아이는 잔병 없이 무럭무럭 자라며 겨우 다섯 살이 되어 벌써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이 되면서부터 四書五經을 배우기 시작했고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비상한 재주를 가져 이미 모르는 글이 없게 되자 서울을 행하여 떠난 뒤 國師가 되어 역사상 유명한 梵日大師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 마을을 학산이라고 불리우게 된 것은 아기 범일 국사에게 젖먹이던 학이 많기로 지금도 유명하여 鶴山이라 한답니다.
『江陵의 歷史變換 과 文化』(1961)
양가의 처녀가 굴산에 살고 있었는데 나이가 많아도 시집을 못가고 있었다. 이 처녀가 石泉에 물을 길러 갔다가 표주박에 햇
\"이제 떠나시지요.\" 이에 억지로 걸으려 했으나 도저히 힘이 미치지 못하더니 어느 결에 짐승들이 떡과 먹을 것을 물어다가 자리 옆에다 던지니 일부러 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주워 먹었다. 나중에 맹세하기를 \"소주에 가서 조사의 탑에 예배하리라.\" 하고 천 리를 멀다 않고 조계에 다다르니, 향기 어린 구름이 탑묘 앞에 서리고 신령한 학이 훌쩍 날아와 누대 위에서 지저귀니 절의 대중이 모두 이렇게 수군거렸다.
\"이러한 상서는 실로 처음 있는 일입니다. 필시 선사께서 오신 징조일 것입니다.\" 이때 고향에 돌아와 불법을 펼 생각을 내어 회창 6년 정묘 8월에 다시 뱃길에 올라 계림정에 돌아오니, 정자 위를 비치는 달빛은 현토의 성에 흐르고 교교한 여의주의 빛은 청구의 경계를 끝까지 비쳤다.
대중 5년 정월에 이르러, 백달산에서 연좌하고 있으니, 명주의 도독인 김공이 굴산사에 주석할 것을 청하여 한 번 숲 속에 앉은 뒤로는 40여 년 동안 줄지은 소나무로 도를 행하는 행랑을 삼고, 평평한 돌로써 좌선하는 자리를 삼았다. 어떤 이가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의 뜻입니까?\" 선사께서 대답하였다. \"6대에도 잃은 것이 없느니라.\" \"어떤 것이 대장부가 힘써야 할 일입니까?\" 선사께서 대답하였다. \"부처의 계급을 밟지 말고, 남을 따라 깨달으려 하지 말라.\"
함통 12년 3월에는 경문대왕이, 광명 원년에는 헌강대왕이 모두 특별히 모시는 예를 다하여 멀리서 흠양하였고, 국사에 봉하기 위해 모두 중사를 보내어 서울로 모시려 하였으나 선사께서 오랫동안 곧고 굳은 덕을 쌓았기에 끝내 나아가지 않더니, 갑자기 문덕 2년 기유 4월 끝에 문인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곧 먼 길을 떠나련다. 이제 너희들과 작별을 고하니 너희들은 세상의 감정으로 공연히 슬퍼하지 말라. 다만 스스로 마음을 닦아서 종지를 추락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5월 1일에 오른 겨드랑이를 대고, 발을 포개고 굴산사의 상방에서 입멸하시니, 춘추는 80세, 승랍은 60세, 시호는 통효, 탑호는 연휘였다.
3. 범일의 탄생담
나말 여초는 승의 신분과 지위가 사회적으로 한껏 올라서 있을 때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토호 출신의 고승인 범일이 누렸을 명성은 쉽게 헤아리고도 남는다. 특히 신도와 문중에서는 그의 시멸 뒤 그를 미화하고 기리는 방도를 찾던 끝에 신화구조를 본떠 적극적으로 형상화하는 방법을 모색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祖堂集
……그의 어머니 文氏는 여러 대를 내려오는 호귀한 씨족으로서 세상에서 부녀의 모범이라 불렀는데 태기가 있을 무렵에 해를 받아드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원화 5년경인 정월 10일에 탯속에 있은 지 열석 달 만에 탄생하니, 나계가 있어 특수한 자태이며 정수리에 구술이 있어 이상한 모습이었다. 나이 15세가 되어 출가할 뜻을 품고 부모에게 사뢰니, 양친이 함께 이런 말을 하였다. “전생의 좋은 인연을 심은 결과니, 그 뜻을 굽힐 수 없다. 네 먼저 제도를 받거든 나를 제도해다오” 이에 속복을 벗고 부모를 떠나 산으로 들어가 도를 닦았다.……
臨瀛誌
신라 때 양가의 딸이 山에 살고 있었으나 나이가 들도록 시집을 못 갔다. 우물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햇빛이 배를 비추자 돌연히 産氣가 있었다. 아비가 없이 아들을 낳자 집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것 같아서 아기를 얼음 위에다 버리니 새들이 날아와 아기를 덮어 감쌌다. 밤이 되자 하늘에서 상서로운 빛이 비추었다. 아기를 도로 데려다 기르니 이름을 梵日이라 하였다. 나이가 들어 성장하자 머리 깎고 중이 되었는데 신통으로 성불세계에 들어 오묘한 조화를 헤아릴 수 없었다. 神伏과 굴산 두 산에 두 개의 큰절을 창건하고 塔山을 지어 지맥을 보충했다. 후에 오대산에 은거하다가 宗寂하였다.
『溟洲』 6호 (1957)
때는 신라 46대 文聖王 때 곳은 溟洲(현 강릉시와 명주군 일원) 학산 마을에 늙은 부모슬하에 예쁜 무남독녀의 15세 가량의 외딸, 이렇게 세 식구가 근근히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어느 여름철 새벽에 이 꽃같이 아름다운 아가씨가 물길러 나갔다고 합니다. 후로 이상하게도 惡阻가 생기며 産氣가 있어 배가 부르게 시작하였더랍니다. 날이 가고 달이 차면서 열 달 만에 이 아가씨는 이목이 뛰어나고 풍채가 비범한 애비없는 玉童子를 낳았으니 남의 눈도 무섭고 또 늙은 부모는 집안의 망신이라 하여 구박이 심하여 할 수 없이 세 식구가 안방에서 남이 들을 세라 비밀히 의논한 결과 드디어 뒷산 큰 바위틈에 솜으로 싸서 사람 하나쯤 들어가서 능히 비를 피할 수 있는 오목한 곳에 버리기로 했더랍니다. 매일아침이면 처녀는 그 어린 생명이 하도 가엾어 남의 눈을 피하여 나가보았더니 어린 아이는 조금도 여읜 기색도 없을뿐더러 아기 누운 자리 밑에는 포근포근한 鶴 의 터리가 깔려있었으며 그 입가에는 젖 같은 것이 묻어 있었고 그 바위가에는 학들이 모여 울고 있었더랍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하늘이 내신 아이라 생각하고 남의 조소를 받으면서도 고히 길러 왔더랍니다.
아이는 잔병 없이 무럭무럭 자라며 겨우 다섯 살이 되어 벌써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이 되면서부터 四書五經을 배우기 시작했고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비상한 재주를 가져 이미 모르는 글이 없게 되자 서울을 행하여 떠난 뒤 國師가 되어 역사상 유명한 梵日大師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 마을을 학산이라고 불리우게 된 것은 아기 범일 국사에게 젖먹이던 학이 많기로 지금도 유명하여 鶴山이라 한답니다.
『江陵의 歷史變換 과 文化』(1961)
양가의 처녀가 굴산에 살고 있었는데 나이가 많아도 시집을 못가고 있었다. 이 처녀가 石泉에 물을 길러 갔다가 표주박에 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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