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의 숨겨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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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양반의 숨겨진 모습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양반이란?

2. 조선시대 양반의 숨겨진 모습

Ⅲ. 결론

본문내용

험이 열리는 성균관 반수당(泮水堂)으로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부정행위자는 대나무 통을 매설하고, 통 속에 노끈을 넣은 것이다. 과장(科場)에서 시험문제를 노끈에 매달아 보내면, 밖에 있는 자가 줄을 당겨 시험문제를 확보한다. 그리고 답안지를 작성해 노끈에 묶어 보내는 수법이었다. 당국이 조사를 했으나, 범인은 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숙종실록 31년 2월18일).
이렇게 되자 합격을 해도 합격자의 실력이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영조 때에는 합격 자를 발표한 다음날 대궐에 모아 각기 지은 답안을 암송시켜 암송하지 못하면 남이 써준 것으로 간주하여 합격을 취소시키는 웃지못할 해프닝도 벌어졌다.
“이 세상의 많은 백성들은 무식하다. 경서와 사책을 공부해 정사(政事)를 담당할 수
있는 사람은 천 명이나 백 명 중 한 사람뿐이다. 그런데 사정은 어떤가. 지금 천하
의 총명하고 재능이 있는 이들을 모아 일률적으로 과거라고 하는 격식에 집어넣고는
본인의 개성은 아랑곳없이 마구 짓이기고 있으니, 어찌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 정약용, 다산시문집 124면
(4) 과거제도의 최후 - 갑오경장으로 과거제 폐지
과거제가 폐지된 이유는 소수의 권력독점에 원인이 있었다.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권력의 중심에 드는 가문은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10개 가문, 넓게 잡아 20개 가문을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의 권력은 과거의 모순에 기초하고 있었다. 과거의 폐해가 바로잡히기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과거 공부란 과거 합격 이후 행정에 아무런 도움이 못 되는 것이었다. 그저 서리의 입만 바라보는 것이 양반들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조선의 지식분자들은 오로지 시험용 지식의 단련에 골몰하고 있었다.
3) 경제적으로 몰락한 양반 - 이래봬도 나 양반이야~!
조선 후기로 넘어 가면서 점차 양반의 인구비율이 늘어나기 시작하는데, 경제적으로 성공한 평민이 양반의 직책을 사거나 또는 양반의 지위 자체를 사는 등 점차 신분제의 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렇게 양반이 많아짐에 따라 양반이긴 하지만 경제적 지위를 잃고 평민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는 양반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 사방관을 쓴 양반이 자리를 짜는 모습을 그린 김홍도의 풍속화 \'자리 짜기\'.
조선시대 양반들은 대부분 육체적 노동을 기피했지만, 조선 후기 들어 경제적 능력을 갖추지 못한 양반이 속출하면서 일하는 양반들도 생겨났다.
(1) 문학 속 몰락한 양반
① 양반이란 한 푼어치도 안 되는 걸 -「양반전」
양반전은 연암 박지원의 소설로 연암의 초기작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 후기 양반들의 경제적 무능과 허식적인 생활 태도를 폭로하고 비판한 한문 소설이며, 작자는 신분 질서가 문란해진 조선 후기를 바탕으로 해서, 양반이라는 특권 계층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양반이 양반답지 못한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이런 양반전의 내용 중 일부분을 보면 몰락한 양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정선군에 한 양반이 살았다. 이 양반은 어질고 글 읽기를 좋아하여 매양 군수가 새로 부임하면 으레 몸소 그 집을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이 양반은 집이 가난하여 해마다 고을의 환자(봄에 빌린 곡식을 가을에 갚던 일)를 타다 먹은 것이 쌓여서 천 석에 이르렀다. 강원도 감사가 군읍(郡邑)을 순시하다가 정선에 들러 환곡(還穀-고을 사창에서 백성에게 곡식을 꾸어주던 제도)의 장부를 열람하고는 대노해서
\"어떤 놈의 양반이 이처럼 군량(軍糧)을 축냈단 말이냐?\"
그러나 가난해서 갚을 힘이 없는 것을 딱하게 여기고 차마 가두지 못했지만 무슨 도리도 없었다. 양반 역시 밤낮 울기만 하고 해결할 방도를 차리지 못했다. 그 부인이 역정을 냈다.
\"당신은 평생 글 읽기만 좋아하더니 고을의 환곡을 갚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군요. 쯧 쯧 양반, 양반이란 한 푼어치도 안 되는 걸.\"
그 마을에 사는 한 부자가 가족들과 의논하기를
\"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늘 존귀하게 대접받고 나는 아무리 부자라도 항상 비천하지 않느냐. 말도 못하고, 양반만 보면 굽신굽신 두려워해야 하고, 엉금엉금 가서 하정배(下庭拜-신분이 낮은 사람이 양반을 뵐 때 뜰 아래에서 절하던 일)를 하는데 코를 땅에 대고 무릎으로 기는 등 우리는 노상 이런 수모를 받는단 말이다. 이제 동네 양반이 가난해서 타먹은 환자를 갚지 못하고 아주 난처한 판이니 그 형편이 도저히 양반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내가 장차 그의 양반을 사서 가져 보겠다.\"
부자는 곧 양반을 찾아가서 자기가 대신 환자를 갚아 주겠다고 청했다. 양반은 크게 기뻐하며 승낙했다. 부자는 즉시 곡식을 관가에 실어 가서 양반의 환자를 갚았다. 군수는 양반이 환곡을 모두 갚은 것을 놀랍게 생각해 몸소 찾아가서 양반을 위로하고 또 환자를 갚게 된 사정을 물어 보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 양반이 벙거지를 쓰고 짧은 잠방이를 입고 길에 엎드려 \'소인\'이라고 자칭하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지 않는가. -중략-
위의 모습에서 양반이 자신의 환곡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자 자신의 양반지위를 돈과 바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무리 양반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경제적 뒷받침이 되지 않는 양반은 이처럼 지위를 팔아서라도 빚을 갚아야할 정도로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소(牛)좀 빌려주쇼 -「누항사」
박인로의 작품으로 《노계집(蘆溪集)》에 실려 있는데, 작가가 이덕형(李德馨)과 교유하면서 작자의 곤궁한 생활을 묻는 것에 대하여 답으로 지은 것이다. 전체적인 내용은 누추한 곳에 초막을 지어 가난한 생활을 할 때, 굶주림과 추위가 닥치고 수모가 심하지만 가난을 원망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양반인 작가 스스로가 자신의 빈곤함을 서술함으로서 양반의 경제적 어려움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는데 아래 내용은 그 빈곤함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신야경수(莘野耕搜)와 농상경옹(壟上耕翁)을
천(賤)타하리 업것마는 아므려 갈고젼들 어내 쇼로 갈로손고.
한기태심(旱旣太甚)하야 시절이 다 느즌 제
서주(西疇) 놉흔 논애 잠깐 갠 녈비예
도상(道上) 무원수(無源水)을 반만깐 대혀 두고
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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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29
  • 저작시기2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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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75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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