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명칭
Ⅲ.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배경
Ⅳ.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원인
Ⅴ.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단계별 국면
Ⅵ.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과잉진압
Ⅶ.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도시구조변화
Ⅷ.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조사보고서
Ⅸ. 결론
참고문헌
Ⅱ.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명칭
Ⅲ.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배경
Ⅳ.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원인
Ⅴ.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단계별 국면
Ⅵ.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과잉진압
Ⅶ.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도시구조변화
Ⅷ.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조사보고서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게다가 5.18쿠데타이후 TK정권에 의해 수출주도형 산업화가 시작되자 호남은 다시 ‘한국의 제3세계’로 낙후하게 된다. 전라도의 농업지대로의 특화, 농업과 공업의 불균등발전에서 오는 피해 등이 이 지역주민에게 많은 부분 전가되면서 농민만이 아니라 전지역주민에게 불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산업화과정에서 농업의 위축에 의해 이농을 강요당하고 지역내의 산업화부진으로 다른 지역에서 노동자로 취업하여 도시의 저소득층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런 경제적 정치적 소외의식 속에서 이 지역 대중은 10.26이후 지역편중과 차별에서 오는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민주화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에는 자연스럽게 김대중이라는 대중적 상징이 존재했는데, ‘구속’이라는 상황이 벌어지자 격렬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항쟁이 발발할 수 있게 된 데에는 김대중이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인정하더라도 광주시민의 김대중에 대한 환상은 짚고 넘어가야 할 듯 싶다. 기회주의적이고 당리당략적인 기성정치세력은 진실로 호남민중들의 비원을 성취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
결론적으로 군부의 민중세력이 정면충돌한 5.18민중항쟁은 군부의 전략적 선택, 김대중 변수, 광주의 민중성이 결합하여 일어난 것이다.
80년 5월 광주 ‘남파된 북괴간첩과 불순분자들’의 사주에 의한 폭도들의 소요로부터 한국‘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된 민주화운동으로 역사적인 복권을 이루었다. 광주항쟁은 3.1운동이후 한국사에서 전개된 다른 항쟁과 비교했을 때 독특한 위치를 가진다. 유신체제 아래서 박정희가 양성한 분신들의 권력장악에 맞서 격렬히 일어났지만 결국 관료적 권위주의 내지는 종속적 파시즘체제로의 복권이 이루어졌음을 상기해볼 때 외형상 소득 없는 패배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패배의 한 원인조차 분단상황에 연유한 국가에 억압적 통치구조에 의해서 기층민중운동이 발달하지 못한데서 찾을 수 있다면 분단체제 40년의 시점에서 그것은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인식의 단절과 한국전쟁이후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던 진보적 민중운동의 복원을 가져다주었다. 민족사의 과업이 민주화, 자주화, 통일이라는 큰 줄기로 가닥잡혔고 주체세력 형성도 윤곽을 드러냈다. 1987년 6월 항쟁-7,8,9월 노동투쟁과 그 이후의 상황은 이의 질적, 양적 수준의 변화를 보여준다.
Ⅴ.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단계별 국면
광주항쟁은 1980년 5월의 ‘광주민중봉기’(다음에는 광주봉기로 표기함)와 그 이후부터 1997년의 5.18재판까지 18년간 지속된 ‘5월운동’을 포함하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개념화된다. 다음에서는 이와 같은 통일적 인식하에서 광주항쟁의 진전과정을 간략히 검토한다. 항쟁의 전반부인 ‘광주봉기’(5월 18-5월 27일)는 전남대하교 정문 앞에서 대학생과 계엄군사이의 충돌을 계기로 하여 전민중적 무장봉기로 급속히 발전하는 수직적 상승과정을 보여준다. 그 전개과정을 저항투쟁의 내용과 형태를 기준으로 볼 때, 3가지 국면으로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국면은 대학생 중심의 저항운동단계이다(18일 아침-19일 오전). 5월 18일 0시를 기하여 광주지역 민주인사들이 전격적으로 연행되고, 직후에 광주일원에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주요 대학을 점령하였고 학교에 있던 100여명의 학생이 체포되었으며, 08시에는 정부에 의해 휴교령이 발표되었다. 등교하던 전남대 학생들은 정문에서 이미 배치된 공수부대와 대치하게 되었고, 학생의 수가 수백 명으로 증가하면서 대치상태의 긴장감은 고조되었다. 마침내 학생집단을 귀가시키고자 하는 계엄군과 이에 저항하는 학생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 최초의 충돌이 광주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여기에서 계엄군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무자비한 폭력을 사용하여 학생들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흩어진 학생들은 인근의 광주역에서 재집결하여 시내로 진출하였고 이 과정에서 학생시위는 급속히 전 시내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에는 수백 명 또는 수천 명으로 구성된 학생집단이 전 시내에서 시위, 연좌농성, 투석 등의 형태로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계엄군의 진압방식이 무차별 구타, 발가벗김 등으로 잔혹해짐에 따라 이들은 파출소에 투석, 화염병 투척, 경찰차 방화, 등의 형태로 발전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시민들은 거리주변이나 건물창을 통해 학생시위와 이에 대한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에 분노하면서 지지와 성원의 태도를 보였었고, 대다수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의 교내시위가 일어났다. 즉 이 시기는 집합행동에서 갈등이 고조되고 일반화된 신념이 시민대중에게 심화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Smelser, 1976).
두 번째 국면은 대규모 민중봉기로의 발전단계이다(19일 오후-21일 오전). 계엄군의 야만적 폭력으로 부상자가 속출하고 무고한 시민에까지 잔혹한 폭력이 무차별적으로 자행되면서 일반시민과 고교생의 참여가 급속히 진전되었다. 그 결과 시위대열이 급속히 대규모화되고, 저항투쟁의 형태도 격렬화되었다. 수천 명이었던 시위대들은 수만 명 또는 그 이상의 단위로 거대해졌다. 대규모 시위대에 의해 진압군이 포위되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이에 따라 진압군의 발포가 일어났으며(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사이), 사망자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공용버스터미널 주차장). 저항형태가 적극적, 공격적으로 전환되었다. 봉기는 시위대에 의한 통행금지시간 무시, 차량방화, 다수의 파출소 방화 점거, 차량시위(택시 120대, 버스 및 트럭 20대), 시청점령, 방송국 및 세무서 방화, 등으로 격화되었다. 광주역, 교도소 등의 주요 전술지점에서 계엄군이 철수하였다. 철야시위에 이어 21일 아침에는 자동차공장에 진입하여 장갑차(3대), 군용트럭(33대), 대형버스(22대), 민간트럭(20대)을 탈취하여 도청공격을 시도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시체 2구를 손수레에 싣고 시위를 계속하였다. 수십만 시위군중이 중심가에 운집했다. 12시까지 계엄군을 철수시키겠다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분노한 시위대가 차량을 앞세우고 도청을 향해 전진하였고 공수부대가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시작
결론적으로 군부의 민중세력이 정면충돌한 5.18민중항쟁은 군부의 전략적 선택, 김대중 변수, 광주의 민중성이 결합하여 일어난 것이다.
80년 5월 광주 ‘남파된 북괴간첩과 불순분자들’의 사주에 의한 폭도들의 소요로부터 한국‘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된 민주화운동으로 역사적인 복권을 이루었다. 광주항쟁은 3.1운동이후 한국사에서 전개된 다른 항쟁과 비교했을 때 독특한 위치를 가진다. 유신체제 아래서 박정희가 양성한 분신들의 권력장악에 맞서 격렬히 일어났지만 결국 관료적 권위주의 내지는 종속적 파시즘체제로의 복권이 이루어졌음을 상기해볼 때 외형상 소득 없는 패배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패배의 한 원인조차 분단상황에 연유한 국가에 억압적 통치구조에 의해서 기층민중운동이 발달하지 못한데서 찾을 수 있다면 분단체제 40년의 시점에서 그것은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인식의 단절과 한국전쟁이후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던 진보적 민중운동의 복원을 가져다주었다. 민족사의 과업이 민주화, 자주화, 통일이라는 큰 줄기로 가닥잡혔고 주체세력 형성도 윤곽을 드러냈다. 1987년 6월 항쟁-7,8,9월 노동투쟁과 그 이후의 상황은 이의 질적, 양적 수준의 변화를 보여준다.
Ⅴ.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단계별 국면
광주항쟁은 1980년 5월의 ‘광주민중봉기’(다음에는 광주봉기로 표기함)와 그 이후부터 1997년의 5.18재판까지 18년간 지속된 ‘5월운동’을 포함하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개념화된다. 다음에서는 이와 같은 통일적 인식하에서 광주항쟁의 진전과정을 간략히 검토한다. 항쟁의 전반부인 ‘광주봉기’(5월 18-5월 27일)는 전남대하교 정문 앞에서 대학생과 계엄군사이의 충돌을 계기로 하여 전민중적 무장봉기로 급속히 발전하는 수직적 상승과정을 보여준다. 그 전개과정을 저항투쟁의 내용과 형태를 기준으로 볼 때, 3가지 국면으로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국면은 대학생 중심의 저항운동단계이다(18일 아침-19일 오전). 5월 18일 0시를 기하여 광주지역 민주인사들이 전격적으로 연행되고, 직후에 광주일원에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주요 대학을 점령하였고 학교에 있던 100여명의 학생이 체포되었으며, 08시에는 정부에 의해 휴교령이 발표되었다. 등교하던 전남대 학생들은 정문에서 이미 배치된 공수부대와 대치하게 되었고, 학생의 수가 수백 명으로 증가하면서 대치상태의 긴장감은 고조되었다. 마침내 학생집단을 귀가시키고자 하는 계엄군과 이에 저항하는 학생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 최초의 충돌이 광주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여기에서 계엄군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무자비한 폭력을 사용하여 학생들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흩어진 학생들은 인근의 광주역에서 재집결하여 시내로 진출하였고 이 과정에서 학생시위는 급속히 전 시내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에는 수백 명 또는 수천 명으로 구성된 학생집단이 전 시내에서 시위, 연좌농성, 투석 등의 형태로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계엄군의 진압방식이 무차별 구타, 발가벗김 등으로 잔혹해짐에 따라 이들은 파출소에 투석, 화염병 투척, 경찰차 방화, 등의 형태로 발전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시민들은 거리주변이나 건물창을 통해 학생시위와 이에 대한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에 분노하면서 지지와 성원의 태도를 보였었고, 대다수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의 교내시위가 일어났다. 즉 이 시기는 집합행동에서 갈등이 고조되고 일반화된 신념이 시민대중에게 심화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Smelser, 1976).
두 번째 국면은 대규모 민중봉기로의 발전단계이다(19일 오후-21일 오전). 계엄군의 야만적 폭력으로 부상자가 속출하고 무고한 시민에까지 잔혹한 폭력이 무차별적으로 자행되면서 일반시민과 고교생의 참여가 급속히 진전되었다. 그 결과 시위대열이 급속히 대규모화되고, 저항투쟁의 형태도 격렬화되었다. 수천 명이었던 시위대들은 수만 명 또는 그 이상의 단위로 거대해졌다. 대규모 시위대에 의해 진압군이 포위되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이에 따라 진압군의 발포가 일어났으며(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사이), 사망자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공용버스터미널 주차장). 저항형태가 적극적, 공격적으로 전환되었다. 봉기는 시위대에 의한 통행금지시간 무시, 차량방화, 다수의 파출소 방화 점거, 차량시위(택시 120대, 버스 및 트럭 20대), 시청점령, 방송국 및 세무서 방화, 등으로 격화되었다. 광주역, 교도소 등의 주요 전술지점에서 계엄군이 철수하였다. 철야시위에 이어 21일 아침에는 자동차공장에 진입하여 장갑차(3대), 군용트럭(33대), 대형버스(22대), 민간트럭(20대)을 탈취하여 도청공격을 시도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시체 2구를 손수레에 싣고 시위를 계속하였다. 수십만 시위군중이 중심가에 운집했다. 12시까지 계엄군을 철수시키겠다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분노한 시위대가 차량을 앞세우고 도청을 향해 전진하였고 공수부대가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시작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