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광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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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정희와 광복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열기
Ⅱ. 박정희
1. 박정희의 생애
2. 박정희의 사상과 관점
Ⅲ. 광복군
1. 광복군의 창설과 전개과정
2. 광복군 대원이 가졌을 사상과 관점
Ⅳ. 닫기

본문내용

과연 어떤 가치관이 그들에게 강인한 의지를 갖게 만들었을까? 첫 번째로는 우리나라를 우리 민족의 손으로 되찾겠다는 민족주의적 인식을 꼽을 수 있겠다. 두 번째로는 모든 것을 바쳐 신앙의 가르침을 실천하겠다는 종교적 희생정신을, 세 번째로는 유교적 가치인 ‘충’과 ‘효’에 바탕을 둔 전통적 가치관을 들 수 있겠다. 이것들을 바탕으로 광복군에 참여한 가상 인물 김아무개의 삶을 재구성해보겠다.
김아무개가 지닌 인식의 근저에는 단단한 유교적 가치관이 깔려 있었다. 신식 학교가 아직 들어서지 않은 산골 마을에서 훈장 노릇을 하던 할아버지의 손에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까닭이었다. 어떻게 보면 골동품처럼 여겨지는 이러한 인식은 청년 김아무개에게 독립운동에 투신해야 한다는 당위성의 근거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가 전적으로 신식 교육에서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3·1 운동에 가담할 만큼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김아무개의 아버지는 새로운 교육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도시로 유학을 떠났는데, 김아무개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아버지가 김아무개에게 끼친 영향은 단순히 신식 교육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김아무개의 아버지는 유학 중에 한 교회의 목사를 맡을 정도로 기독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의 신앙생활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따라 온 김아무개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김아무개는 기존의 유교적 가치관을 버리면서까지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데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간의 다툼이 한몫하긴 했지만, 원칙적이고 급진적인 그의 성향은 뒷날 임시정부 내에서 무장투쟁노선과 외교노선의 대립이 대두되었을 때 무장투쟁을 지지하는 근거가 되었다.
김아무개가 기독교 사상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한 부분은 “신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생각은 ‘만인이 평등하다면 그 어떤 민족도 다른 민족을 지배할 권리는 본래 존재하지조차 않은 것’이라는 평화주의적 인식에까지 다다른다. 이는 김아무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극도로 증오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아버지의 활동 때문에 일본의 감시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가족들을 위해 학도병에 지원했지만, 곧 탈출하여 광복군에 가담한 것도 같은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본토에서의 광복군 생활은 보통 인간으로서는 해내기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김아무개는 광복군 활동을 통해 우리 민족의 가능성을 목격하고 무한한 자긍심을 느꼈으며,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임정을 이끌어온 김구를 자신의 롤 모델로 삼게 되었다. 또한 일제의 타율성론에 대항하는 논리로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은 강한 민족주의적 인식으로 발전하였다. 그것이 너무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서, 해방 직후 신탁통치를 둘러싼 갈등 속에서 맹목적으로 반탁을 주장하는 흐름에 편승하였다.
분단의 흐름이 가속화되면서 이승만과 김구의 입장이 명확하게 갈리자, 김아무개는 자신이 존경하는 김구의 노선을 따르게 되었다. 하지만 김구가 극우세력의 손에 암살되고 남북이 각각 단독정부 수립을 확정하게 되자, 그는 공식적인 모든 활동을 그만두고 은둔을 선택한다. 이제까지 김아무개를 이끌어왔던 민족주의적 신념이 한순간에 무너진 탓이었다. 남북 분단은 동족 간에 넘을 수 없는 갈등의 벽이 생길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김아무개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자살을 선택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Ⅳ. 닫기
지금까지 해방 전후의 시기를 제 나름대로의 가치관에 따라 정면으로 돌파했던 두 사람의 생애를 정리해보았다. 둘을 당시를 살다간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삶의 방식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박정희는 기회주의적인 삶의 전형을 보여주었으며, 김아무개는 이타적인 삶의 전형을 뚜렷하게 제시하였다. 이렇게 해방 전후를 살다간 사람들의 인식을 분석했다면, 이제는 다음 단계의 논의로 넘어가야 할 차례다. 그들이 살다간 해방전후사가 오늘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박정희와 김아무개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바로 그들이 받았던 교육에 있었다. 박정희가 일제가 제공하는 엘리트 교육의 정점에 서 있었다면, 김아무개는 당시 민족주의 교육의 수혜자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교육이 그들의 생애를 결정지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대학생으로서 나의 삶을 되새겨보게 한다. 그것은 결국 나는 대학을 다니는 동안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 다다르게 된다.
만약 내가 해방 전후를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에 처했다면 과연 어떤 삶의 방식을 택했을까. 나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데 급급해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했을까? 아니면 다른 이의 삶까지 보듬기 위해 나를 먼저 희생하는 이타주의적인 삶을 살아갔을까? 내가 해방 이전의 일제강점기를 살아갔다면 윤동주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했을 것이다. 나는 조국 독립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학생으로서의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팡질팡했을 것이다.
이러한 고민은 그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나에게도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부당한 폭력에 대항하여 의견을 당당하게 표현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방관할 것인가. 지금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미국 소고기 협상은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민의를 반영하지 않는 정부의 무책임한 협상은 어떻게 보면 폭력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저항하는 시민들이 촛불집회라는 수단으로 대항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내려야만 할까.
참고문헌
전인권, 박정희 평전, 이학사, 2006.
박종천, 알몸 박정희, 인물과사상사, 2007.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4.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4.
박경수, 장준하 : 민족주의자의 길, 돌베개, 2003.
김광재, 한국광복군,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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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10.01
  • 저작시기20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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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83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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