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전후의 변화와 조선 후기의 내재적 발전론과 그 비판
본 자료는 5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해당 자료는 5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5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임진왜란전후의 변화와 조선 후기의 내재적 발전론과 그 비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정에서 나타난 사회개혁 사상이었다. 그러므로 그 사상이나 개혁의 논리는 종래의 성리학과 같을 수 없었다. 이 말은 형이상학적 이념대결에서 민생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백성의 실생활에 입각하여 그 모순극복을 위한 대안으로서의 실학이었다는 밀이다. 실학의 형태는 농업에 중점을 둔 근기남인학파와 상공업에 중점을 둔 북학파로 나누어진다. 이들은 각각 균전제나 정전제등의 토지 개혁론과 청나라와 같은 상공업 양성을 강조하는 실질적인 개혁이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실학은 성리학적 정치 사상과는 차별되지만 근본적으로 유학적 사상에 근거를 두어 보수적인 성격과 개혁적인 성향이 공존했으며 개혁적 성향조차도 기존의 정치적 한계(붕당정치에서 밀려난 세력) 때문에 현실에 투영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정치적인 상황과는 다르게 조선후기에는 여러방면에서 많은 근대적 요소를 가지게 된다. 조선 후기에는 공물을 쌀로 내는 대동법은 농민의 생산물이 상품화되는데 결정적 영향을 주었으며, 이양법 2년3작 거름방식의 변화와 같은 농업기술의 획기적 발전은 광작과 지주 또는 부농의 등장을 초래한다. 수공업 에서는 자급자족형 형태의 수공업이 임진왜란 이후 관영수공업의 퇴화와 안성 유기나 한 산 모시와 같은 예의 전업적인 수공업에 의해 공장제 수공업으로의 변화된다. 상업에서는 시장의 발달과 시전상인 보부상이외의 공인의 등장에 의해 상업에 발달하고, 이에 따라 부유한 상인인 도고의 탄생시켰다. 비록 당시에도 일반민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였고, 농업이외에 기타산업에 종사 비율은 전체의 1~5%정도로 미약하였고 지주나 부농등은 조선 후기 문란했던 정치을 기반으로 권력층과 공생하며 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후 언급할 조선 시대 신분제 붕괴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상품 화페 경제를 더욱더 촉진시켰고,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계층을 분화시켰다. 여기서 조선후기의 자본주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해 유럽의 자본주의 발달 과정과 비교해 보면 역사상 유럽에서의 자본주의의 맹아는 13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3세기말 출현한 노동지대로부터 화폐지대로의 이행은 농민 생산물의 상품화를 조장하였고 이는 도시를 중심으로 한 상업의 발달과 이를 통한 화폐 경제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을 통해 형성된 대규모 상업 자본과 고리대 자본은 봉건적 농촌으로 침투하여 수공업의 농업으로부터의 분리를 촉진하여 도시와 농촌과의 자본주의적 분리가 시작되었다. 도시의 공업과 상업 및 화폐 경제의 발전 등은 봉건적 자연 경제가 붕괴하는 단초가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상업 자본은 자본을 축적하면서 자본주의 생산의 발아를 조장하였다. 상업 자본은 축적된 자본을 직접 상품 생산 과정에 투여하면서 새로운 이윤을 창출해 나갔다. 즉 노동의 상품화를 통해 자본을 확대 재생산해나갔으며, 이는 생산력의 향상을 통한 근대자본주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상품 유통 경제의 형성, 이 과정에서 나타난 거대 상업 자본의 자본 축적, 전통적 농촌 사회내의 분화 및 전통적 신분제 사회의 해체 등, 여러 측면에서 조선 후기 상업의 성장 과정과 유럽의 그것은 너무도 닮아있다. 결과적으로 조선 후기 상업 자본의 형성과 성장은 유럽의 상업 자본과 마찬가지로 근대자본주의 형성을 위한 역사적 맹아였다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신분제의 붕괴를 이야기해보면, 일본은 근대화의 기점인 메이지 유신을 통해 신분제를 철폐하게 된다. 신분제의 붕괴는 중세 봉건적 사회와 근대 자본주의적 사회를 구분하는 가장 매우 중요한 요소중에 하나이다. 따라서 조선후기 임진왜란과 경제적 부유층에 의한 신분제의 변화는 타율성과 자율성이 공존하는 근대화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할수 있다.
Ⅵ. 결론
이제까지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의 변화와 이런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조선 후기 역사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우리가 역사를 소중히 여기고 공부하는 이유는 역사는 현재의 원인이며 현재는 역사의 결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우리나라는 일본에 의해 식민지 형태의 근대화 과정을 지나게 된고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속에서도 현재와 같은 주목할만한 경제발전을 이루어 낸다. 이런 현재의 발전원인을 조선 후기의 근대화 시도에서 찾는 내제적 발전론과 그 비판인 식민지 근대화론을 중심으로 지금도 논의되고 있다. 일본은 우리의 역사에서 제쳐두기에는 전시대에 걸쳐 너무나도 가까운 나라이고 특히 조선 시대이후 현재까지 임진왜란과 식민지라는 큰 형태로 우리의 역사에 부정적인 수탈자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우리의 현재가 너무나도 뛰어나 민족과 조상때문이라고 소리쳐도 임진왜란 시대에 빼앗긴 도자기가 돌아오거나 식민지시대에 건설된 철도가 사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감정적일지 모르나 우리의 현재 모습에서 일본이라는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다고 말하기에도 너무 빼앗긴 것이 많아 가슴이 아픈 것도 사실이다. 식민지 시대의 문제는 조에서 발표한 주제와는 시대적으로 맞지 않으므로 이후의 문제로 넘기고 다만 조선후기의 근대화를 위한 작은 싹이 어떤 형태로 존재했으며 왜 그런 싹이 꽃을 피지 못하고 죽어갔는지 이땅에 살고있는 사람이라며 마땅히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Ⅶ. 토의문제
1)임진왜란
임진왜란이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적 맹아가 도출되는데 기여하였는가? 아니면 내제적 발전론 입장에서 오히려 걸림돌로써 방해하였는가? 또는 제3의 방법으로 규정할수 있는가?
2)조선후기의 움직임
조선후기의 역사를 내제적 발전론 입장에서 충분한 근대화 과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시대에 의해 왜곡되어 진정한 근대화의 과정이 수탈된것인가? 아니면 비판의 입장에서 그러한 시도는 있었으나 그 힘이 부족해 식민지 또는 다른 형태의 외부요인 반드시 필요했는가? 또는 그러한 역사를 제3의 방법으로 규정할수 있는가?
참고문헌
한국역사 연구회, <한국역사>
역사학연구소, <우리역사를 찾아서>
조석곤, <수발론과 근대화론을 넘어서>
안병직, <한국근현대사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
국사편찬위원회, 고등학교 국사(상)(하), 조선부분
서울대 국사학과.\"한국사 특강\" 참고
자료출처:http://home.taegu.net/~yonho/
  • 가격2,000
  • 페이지수16페이지
  • 등록일2013.10.02
  • 저작시기2013.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84028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