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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고, 전형적으로 10대 중반에서 20대 중반 사이에 일어난다. 미국 인구의 100명당 1명이 평생 적어도 한 번 정신분열병 진단을 받으며 이 비율은 모든 문화권에서 비슷하게 유지되어 왔다. 다음의 경우는 감별 불능형 정신분열병의 예이다. Sally의 경우에서 보게 되듯이 감별 불능형 패턴을 보이는 사람은 가끔 초기에는 해체형, 긴장형, 심지어 편집형 패턴을 보이기도 한다. 대다수의 만성 정신분열병 환자들은 다양한 시기에 걸쳐서, 다양한 증상들을 보이고, 보통은 여러 증상을 혼합하여 나타내며, 변형된 감별 불능형 증세를 보이게 된다.
Sally의 인생은 불운하게 시작되었다.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어머니는 Sally를 임신하고 하루에 두 갑씩 담배를 피웠다. 셀리의 출산은 난산이었으며, 출산 후 얼마 동안 호흡 정지 상태가 되어 한참 파랗게 질려 있었다.
셀리에게는 정신분열병에 걸릴 유전적 소인으로 추정되는 요인이 몇 가지 있었다. 사람들이 그녀의 외할아버지를 “미쳤다”거나 “돌았다”라고 드러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가족들간에 항상 “괴상한”사람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독특한 종교적 신념을 많이 만들어냈고, 그 지역사회에서, 가축의 성장을 돕는 “전자력”을 만들어 내는 이상한 기계를 헛간지붕에 장치해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 당시의 농업은 오늘날처럼 조직적이고 재정적인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이 시대의 농촌은 한가했기 때문에, 그의 기괴한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셀리는 전반적으로 발육이 늦어 걸음마도, 말하기도 늦었지만, 동시에 활발한 아이였다. 그녀는 한번도 정식으로 “행동 과잉”이라고 진단 받은 적은 없었으나, 행동수준은 평균 이상이었다.
양친의 결혼생활은 갈등의 연속이었고, 딸이 생후 2년째 되었을 때, 10개월가량 별거를 하기도 하였다. 결국 재결합하기는 하였지만, 이들 부부는 습관적으로 부부 싸움을 하였다.
그들은 둘 다 셀리에게 헌신적이었으며, 이는 특히 그녀의 어머니가 두 번 유산을 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아이를 가지지 말라고 권유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셀리의 아버지는 농기구 회사의 판매원이었기 때문에 출장을 많이 가게 되었다. 그가 집에 있을 때에는 딸과 놀아주곤 하였으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회되게 야단을 치곤하였다. 반면 어머니는 딸과 강한 공생 관계를 맺고 있었다.
셀리는 평균 이상의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딸을 열성적으로 지도했고, 셀리도 공부에 몰두했지만, 그녀는 대부분의 학과에서 중하위권 수준에 머물렀다. 그녀의 사고방식은 한 교사가 지적했듯이 “약간 빗나가는”것이었다.
셀리는 이따금씩 친구를 사귀기도 하였으나, 어머니의 과잉보호와 가끔씩 나타나는 셀리의 이상한 행동과 사고 과정 때문에 길거나 깊은 교우 관계를 맺지 못하였다. 사실상 셀 리가 깊은 친구 관계를 가질 만한 가능성이 보이면, 어머니는 눈에 띄이도록 방해를 해서 관계를 망쳐 버리곤 하였다.
셀리는 매우 순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아이였다. 또한 그녀가 아이들과 사회생활에 어울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상한 행동과 관심이 발달하였고, 이것들은 더욱 그녀를 사회적으로 멀어지게 만들고 말았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가까이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는데 새로운 환경에 대한 충격이 너무나 심해서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생기게 되었고, 놀란 룸메이트는 즉각 다른 방으로 옮겨 버렸다. 어느 날 오후 기숙사 담당자는 의자에 앉아서 바닥을 응시하고 있는 셀리를 보게 되었다. 셀리는 반응이 없었고, 팔다리를 늘어뜨려 흔들다가 가만있는 것이 마치 플라스틱 인형처럼 보였다.
셀리는 철회된 긴장 상태로 입원하였으나 곧 퇴원하였고, 좋아졌다. 그 후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자꾸 은둔적으로 되어 수업에 빠지게 되었다. 셀리의 어머니는 셀리를 치료하기 위해 집으로 데리고 갔으나 점점 상태가 퇴보해서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거의 무반응적 행동 양식을 보였고, 가끔 킬킬거리고 몸을 흔드는 전통적인 해체형 정신분열적 행동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주장에 의해 결국 셀리는 병원으로 보내졌으나 그녀가 조금만 나아진다 싶으며 어머니가 집으로 데려가는 바람에 외래 치료조차도 지속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일이 그리 많지 않은 근처의 상점에서 시간제 점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는데,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자유 시간을 집안일을 하면서 보냈고, 그 나머지 시간은 자기방에서 보냈다.
이 무렵 셀리의 아버지는 치명적인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이 일로 어머니는 딸에게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셀리는 퇴근 후 집에 오는 도중에 이리저리 배회하곤 했는데 그런 행동은 어머니의 강한 의존에 대한 방어일 수도 있었다. 그녀의 행동은 더욱 더 이상해졌으며, 어느 날 경찰이 동네 공원의 연못을 걸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는 셀리를 발견해 지방법원으로 보냈고, 거기서 근처의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다.
▶ Sally의 치료
흔히 있는 일이지만 셀리의 어머니 역시 셀 리가 처음 두 번의 병원 입원 기간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실제로 장애가 상당히 진전되어 정신분열병이 발생하고 나서야 효과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세 번째 입원에서 셀리는 즉시 토라진(藥名)을 처방한 화학요법을 받았고 또 입원환자 치료집단에 포함되어 담당 의사와 일주일에 약 두 번씩 시간 동안 면담했다.
그 결과 혼잣말을 하거나 환청 등의 증상에서 빠른 상황을 보였다. 그러나 보다 심하고 부정적인 증상인 집중자애와 사고장애 등의 증상들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결국 셀리는 가족에게 돌아갔는데 이는 치료가 더 이상 진전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사실 그녀는 도리어 악화되어 있었다. 이런 악화는 더 고질적으로 되었다. 비록 그 증상들이 최초에 일으킨 것처럼 심하지는 않지만 더 다양해지고 많아졌다. 따라서 지금은 감별 불능형 정신분열병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정신과 의사와 면담한 후 셀리는 실질적으로 치료가 될 전망이 희박하나 병원에 다시 입원했다. 아마도 그녀는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는 상태를 되풀이하다가 결국 사회로 돌아오지 못하고 기관에 수용될 것이라 여겨진다.
Sally의 인생은 불운하게 시작되었다.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어머니는 Sally를 임신하고 하루에 두 갑씩 담배를 피웠다. 셀리의 출산은 난산이었으며, 출산 후 얼마 동안 호흡 정지 상태가 되어 한참 파랗게 질려 있었다.
셀리에게는 정신분열병에 걸릴 유전적 소인으로 추정되는 요인이 몇 가지 있었다. 사람들이 그녀의 외할아버지를 “미쳤다”거나 “돌았다”라고 드러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가족들간에 항상 “괴상한”사람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독특한 종교적 신념을 많이 만들어냈고, 그 지역사회에서, 가축의 성장을 돕는 “전자력”을 만들어 내는 이상한 기계를 헛간지붕에 장치해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 당시의 농업은 오늘날처럼 조직적이고 재정적인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이 시대의 농촌은 한가했기 때문에, 그의 기괴한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셀리는 전반적으로 발육이 늦어 걸음마도, 말하기도 늦었지만, 동시에 활발한 아이였다. 그녀는 한번도 정식으로 “행동 과잉”이라고 진단 받은 적은 없었으나, 행동수준은 평균 이상이었다.
양친의 결혼생활은 갈등의 연속이었고, 딸이 생후 2년째 되었을 때, 10개월가량 별거를 하기도 하였다. 결국 재결합하기는 하였지만, 이들 부부는 습관적으로 부부 싸움을 하였다.
그들은 둘 다 셀리에게 헌신적이었으며, 이는 특히 그녀의 어머니가 두 번 유산을 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아이를 가지지 말라고 권유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셀리의 아버지는 농기구 회사의 판매원이었기 때문에 출장을 많이 가게 되었다. 그가 집에 있을 때에는 딸과 놀아주곤 하였으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회되게 야단을 치곤하였다. 반면 어머니는 딸과 강한 공생 관계를 맺고 있었다.
셀리는 평균 이상의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딸을 열성적으로 지도했고, 셀리도 공부에 몰두했지만, 그녀는 대부분의 학과에서 중하위권 수준에 머물렀다. 그녀의 사고방식은 한 교사가 지적했듯이 “약간 빗나가는”것이었다.
셀리는 이따금씩 친구를 사귀기도 하였으나, 어머니의 과잉보호와 가끔씩 나타나는 셀리의 이상한 행동과 사고 과정 때문에 길거나 깊은 교우 관계를 맺지 못하였다. 사실상 셀 리가 깊은 친구 관계를 가질 만한 가능성이 보이면, 어머니는 눈에 띄이도록 방해를 해서 관계를 망쳐 버리곤 하였다.
셀리는 매우 순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아이였다. 또한 그녀가 아이들과 사회생활에 어울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상한 행동과 관심이 발달하였고, 이것들은 더욱 그녀를 사회적으로 멀어지게 만들고 말았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가까이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는데 새로운 환경에 대한 충격이 너무나 심해서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생기게 되었고, 놀란 룸메이트는 즉각 다른 방으로 옮겨 버렸다. 어느 날 오후 기숙사 담당자는 의자에 앉아서 바닥을 응시하고 있는 셀리를 보게 되었다. 셀리는 반응이 없었고, 팔다리를 늘어뜨려 흔들다가 가만있는 것이 마치 플라스틱 인형처럼 보였다.
셀리는 철회된 긴장 상태로 입원하였으나 곧 퇴원하였고, 좋아졌다. 그 후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자꾸 은둔적으로 되어 수업에 빠지게 되었다. 셀리의 어머니는 셀리를 치료하기 위해 집으로 데리고 갔으나 점점 상태가 퇴보해서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거의 무반응적 행동 양식을 보였고, 가끔 킬킬거리고 몸을 흔드는 전통적인 해체형 정신분열적 행동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주장에 의해 결국 셀리는 병원으로 보내졌으나 그녀가 조금만 나아진다 싶으며 어머니가 집으로 데려가는 바람에 외래 치료조차도 지속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일이 그리 많지 않은 근처의 상점에서 시간제 점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는데,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자유 시간을 집안일을 하면서 보냈고, 그 나머지 시간은 자기방에서 보냈다.
이 무렵 셀리의 아버지는 치명적인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이 일로 어머니는 딸에게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셀리는 퇴근 후 집에 오는 도중에 이리저리 배회하곤 했는데 그런 행동은 어머니의 강한 의존에 대한 방어일 수도 있었다. 그녀의 행동은 더욱 더 이상해졌으며, 어느 날 경찰이 동네 공원의 연못을 걸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는 셀리를 발견해 지방법원으로 보냈고, 거기서 근처의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다.
▶ Sally의 치료
흔히 있는 일이지만 셀리의 어머니 역시 셀 리가 처음 두 번의 병원 입원 기간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실제로 장애가 상당히 진전되어 정신분열병이 발생하고 나서야 효과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세 번째 입원에서 셀리는 즉시 토라진(藥名)을 처방한 화학요법을 받았고 또 입원환자 치료집단에 포함되어 담당 의사와 일주일에 약 두 번씩 시간 동안 면담했다.
그 결과 혼잣말을 하거나 환청 등의 증상에서 빠른 상황을 보였다. 그러나 보다 심하고 부정적인 증상인 집중자애와 사고장애 등의 증상들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결국 셀리는 가족에게 돌아갔는데 이는 치료가 더 이상 진전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사실 그녀는 도리어 악화되어 있었다. 이런 악화는 더 고질적으로 되었다. 비록 그 증상들이 최초에 일으킨 것처럼 심하지는 않지만 더 다양해지고 많아졌다. 따라서 지금은 감별 불능형 정신분열병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정신과 의사와 면담한 후 셀리는 실질적으로 치료가 될 전망이 희박하나 병원에 다시 입원했다. 아마도 그녀는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는 상태를 되풀이하다가 결국 사회로 돌아오지 못하고 기관에 수용될 것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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