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서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서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차 없음

본문내용

정 요구 의견
-“일본서기”만을 근거로 한 기숙( 한국과 중국의 사서에는 없는 내용)
-6세기 이후 삼국이 일본보다 정치, 문화적 우위에 있었다는 것이 한일학계의 통설
[임진왜란]
①후소샤 교과서
조선 출병(123쪽)의 내용을 보면 “1세기 만에 전국을 통일을 이루자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의기는 왕성해졌다. 히데요시는 다시 중국의 명을 정복하여 천황과 자신이 거기에 살고 동아시아에서 인도까지 지배하고자 하는 거대한 꿈에 빠져들어 1592년 15만 대군을 조선에 보냈다.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끼니가등의 무장이 거느린 일본군은 곧바로 수도인 한성(현재의 서울)을 함락하고 조선 북부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조선측 이순신이 거느리는 수군의 활동과 민중의 저항이 있고 명나라 장군도 있어, 전쟁이 일본에 불리해지자 명과 평화교섭을 위하여 병사를 철수앴다. 두 번에 걸친 출병의 결과 조선의 국토와 사람들의 생활이 현저히 황폐해졌다. 명도 일본과의 전투로 쇠퇴하였으며 토요토미가의 지배도 흔들렸다.”
②일본서적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122쪽)을 보면 “자신의 세력을 외국에까지 뻗치고자 생각하고 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국내 통일을 완수하자 명의 정복을 계획했다. 히데요시는 1592년 그 통로가 되는 조선에 군대 15만명을 침입시켰다. 일본군은 곧 한성(현재의 서울)들을 점령하였고 명의 국경 가까이까지 공략해 들어갔다. 그러나 조선의 민중이 각지에서 일어나고 드디어 수군의 힘도 증강되고 명의 원군도 있어 일본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휴전하고 강화에 관한 논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강화가 성립죄디 않앗으므로 히데요시는 다시 전쟁을 시작하였으나 히데요시가 병사했으므로 전군이 후퇴한다”
③정부의 수정요구 의견
-침략을 “출병”으로 기술하여 일방적 침략사실 은폐
-임진왜란의 원인을 명나라 정복, 히데요시의 개인적 망상으로만 기술
-전쟁기간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인적,물적 피해상 축소
[조선통신사]
①후소샤교과서
쇄국하의 대국관계(133쪽)에 대하여 “막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절 대마도의 종씨를 통하여 히데요시의 출병으로 단절되어 있던 조선과 국교를 회복하였다. 양국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조선으로부터는 장군이 바뀔때마다 통신사라 부르는 사절이 에도를 방문 하여 각지에서 환영받았다. 또 부산에는 ‘종씨의 왜관’이 설치되어 약 400-500인의 일본인이 살면서 무역과 정보수집에 종사하였다.”
②일본서적
막부의 대외정책중 조선과 중국(131쪽)에 대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대마도의 무사 종씨를 중개인으로 조선과 국교회복에 성공하고 대마도사족은 매년 무역선을 보냈다. 이에미츠 시절부터 장군이 바뀔때마다 400명 정도의 조선사절단(통신사)이 방문하게 되었다. 이에야스는 명과의 국교도 희망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③정부의 수정요구 의견
-이에야스의 국교회복 노력에 대한 설명 없이 사실만 기술
-통신사의 파견목적, 초빙이유 등을 설명하지 않고, 일본장군 습직사절단으로만 기술
-조선에서 부산왜관을 설치해준 사실을 은폐하고 일본이 외국땅에 마련한 행정기관인 듯이 기술
[조선의 근대화와 일본과의 관계]
①후소샤 교과서
한반도와 일본의 안전보장(218-219쪽)에 보면 “일본은 조선의 개국후 그 근대화를 돕기위해 군제개혁을 원조했다. 조선이 외국의 지배에 굴하지 않는 자위력 있는 근대국가가 되는 것은 일본의 안전에 있어서도 중요했다. 그런데 1882년 군제개혁에 소외당한 일부 조선 군인의 폭동이 발생했다(임오사변)”
②동경서적
동아시아의 정세(213쪽)을 보면 “메이지 10년대의 일본에서는 민권론자들이 일본과 함께 아시아 제국에서 민권의 신장과 독립을 기대하면서 아시아 제민족과 연대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미열강의 아시아 침략이 예상되는 가운데 일본 정부는 조선에 진출하지 않으면 일본의 장래도 위험하다며 대외팽창정책을 강화하고 있었다.”
③정부의 수정요구 의견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불식하려 했던 목적을 숨기고 군사원조로 조선 독립에 기여한 것처럼 서술함으로써 사실을 호도
[한국강제 병합]
①후소샤 교과서
한국병합(242쪽)을 보면 한반도 “전략적으로 중요하지만 군사적으로 불안정하였다. 미국,영국, 러시아 3국 모두가 지배를 원했으나 실제로 통치를 유지하기는 곤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지배하고 싶지는 않지만 또 다른 나라가 차지하는 것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지역에 대하여 통치자로서 신흥국 일본의 등장은 3국에 있어 좋은 상황이었다. 일,러전쟁 후 일본은 한국에 한국통감부를 두고 지배권을 강화하고 있었다, 1910년 일본은 한국을 병합하였다. 이것은 동아시아를 안정시키는 정책으로서 구미 열강으로부터 지지를 받는 것이었다. 한국병합은 일본의 안전과 만주의 권익을 방위하는데 필요하였으나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반드시 이익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실행된 당시로서는 국제관계 원칙에 따라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국 국내에는 당연히 병합에 대한 찬반양론이 있었고 반대파의 일부로부터는 심한저항도 있었다.”
②일본서적
한국병합(217쪽)에 보면 “러일전쟁후 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국통감부라는 관청을 두어 경찰과 내장권을 장악하고 이어서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와 같은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조선의 민중은 무기를 들고 각지에서 봉기하여 의병운동 등을 일으키고 강력하게 저항하였으나 일본은 군대로 이를 진압하였다. 1910년에는 일본의 군대와 경찰이 서울을 경계하는 가운데 한국의 황제가 국가를 통치하는 권한을 일본에 위임하는 조약에 조언토록 함으로써 한국을 일본의 영토로 병합하였다. 이를 한국병합이라고 한다.”
③정부의 수정요구 의견
-한국병합 과정에서의 침략행위와 강제성을 은폐하고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기술
-의병투쟁과 안중근 의거 등 한국 내 저항을 축소하면서 극소수 친일파의 목소리를 고의로부각기술
[군대위안부]
①후소샤 교과서
고의로 누락시킴
②일본서적
조전쟁의 장기화와 중국,조선(263쪽)을 보면 “ 가장 많은 희생을 낸 것은 중국이었다. 전투나 강제연행 등에 의해 많은 인적 피해응 낸 것 외에 많은 경제피해를 냈다, 또 국내
  • 가격1,6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3.10.28
  • 저작시기2013.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8861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