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 론
2.
1953년의 정치적 변화와 남로당계의 종말
3.
김일성의 권력독점을 향한 첫걸음(1955년 8월~1956년 2월)
4.
반 김일성세력의 공개적도전과 김일성계의 승리(1956년 3월~ 1958년)
5.
1950년대의 정치변동과 김일성계의 권력독점의 의미
6.
결 론
서 론
2.
1953년의 정치적 변화와 남로당계의 종말
3.
김일성의 권력독점을 향한 첫걸음(1955년 8월~1956년 2월)
4.
반 김일성세력의 공개적도전과 김일성계의 승리(1956년 3월~ 1958년)
5.
1950년대의 정치변동과 김일성계의 권력독점의 의미
6.
결 론
본문내용
권력구조에서 소외되는 방식으로 불이익을 받았지 반당반혁명 분자로 숙청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1950년대는 경제 전략이나 당 사업에 있어서 중국식, 소련식, 조선식에 대한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백가쟁명 하던 시기이다. 문학, 예술, 학술분야에 있어서도 비교적 다양한 의견들이 허용되었으며 당 지도부의 입장과 차별을 보이는 간행물도 적지 않게 출판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북한의 사회주의 정권이 식민지시대에 다양한 공간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경력을 쌓은 여러 공산주의자 그룹들의 연립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김일성계에 의한 권력독점은 이러한 다양성의 토대를 완전히 제거하였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연안계, 소련계, 남로당계 등의 ‘반당종파’행위가 이러한 당내민주주의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계에 의한 권력독점과 함께 당내민주주의의 마지막 토대도 제거되었다. 1956년 제3차 당 대회 규약에서 보장되었던, 당 회의에서 “어떤 당원을 막론하고 비판”할 수 있는 권리, 당 지도기관 선거 시 “입후보자들을 찬성 또는 반대하거나 비판할 수 있는 무제한적 권리”, “당의 정책적 문제들을”, “자유롭게 토의하는” 권리 등은 김준엽. 북한 연구자료집 제II집, (서울: 고려대학교출판부, 1969), PP. 817~835.
김일성계의 권력독점이 제도적으로 완성된 1961년의 제4차 당 대회에서는 사라졌다.
또한 김일성계의 완전하고 독점적인 권력 장악은 북한 사회주의의 성격이 만주에서의 항일 빨찌산 투쟁을 통해 성장한 김일성과 그 세력들의 갖는 특유한 이데올로기적 성향에 의하여 매우 협소하게 규정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만주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서구와의 접촉부재로 인해 형성된 반 서구주의 반 자유주의, 유격대의 오랜 군사투쟁이 요구하는 호전성, 반 정치성, 수직적 권력질서지향 , 이들의 출신성분 및 제한된 해방지구에서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반 지식인적 민중지향성, 그리고 해외라는 특수공간에서 강제된 중국공산당과 소련공산당에 대한 이중적 경험에 토대한 민족주의적 자주성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향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더욱 강화되었고 결정적으로 1950년대의 권력투쟁과정에서 굳어져버렸다. 1960년대의 김일성의 주체노선의 확립, 주체사상의 유일사상화, 김일성 유일사상 유일지배체제의 확립 등은 이미 1950년대에 그 규정조건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6. 결 론
김일성 제거의 성공은 연안계와 소련계를 통한 중국과 소련의 대립을 격화시켰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북한은 어느 한쪽의 위성국가가 되거나 아니면 심각한 내전 형태의 권력투쟁을 겪었을 것이다. 김일성의 제거가 북한의 주권을 심각하게 손상시키고 북한사회주의를 상당히 외세 의존적인 것으로 만들어놓았을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지금보다는 훨씬 외부와의 접촉 범위가 넓은 사회주의경제체제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현재의 입장에서 볼 때 부정적인 결과였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가령 김일성 대신 친 중국계 인물이 들어섰더라면, 또는 친 소련계 인물이 들어섰더라면 북한사회주의는 훨씬 나은 체제가 되었을 것인가. 그리고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반도 통일을 촉진시켰을 것인가. 이런 가설적 질문에 대답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가설은 우리에게 1950년대 북한의 정치적 변화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게 해준다.
김일성 정권은 1950년대의 정치적 변화를 통해서 고도의 수직적이고 배제적인 일원적 권력구조의 단기적 안정성을 확보했다. 김일성계의 단일 세력에 의한 권력독점으로 인해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개혁을 하는데 필요한 충분한 권위가 이들에게 부여되었다. 뒤집어서 얘기하면 후진적 식민지경제에서 산업사회로의 이행은 해결할 수 없는 분파적 투쟁에 에워싸였다면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급진적 사회주의 이행을 막을 모든 걸림돌이 사라진 상황에서 1950년대 북한의 경제가 놀라울만한 성장과 변신을 이룬 것은 잘 알려져 있다. 1953~1956년의 성장률은 41.7%, 1957~1960년 사이의 성장률은 36.6%를 기록했으며, 1960년의 농업생산은 1953년의 2배를 넘었다. 1953년에 총 경작면적의 불과 0.6%에 지나지 않았던 농업협동농장은 1957년에는 93.7%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산업노동자수는 1956년 이후로 절반을 넘어서게 되었다. 북한은 분명히 단시일 내에 산업국가로 탈바꿈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성공은 오히려 북한의 초수직적인 권력구조를 정당화하였으며 그것이 가진 장기적 모순을 은폐하는 기능을 하였다. 1950년대에 정착된 권력구조로 인해 인민들과 당원들의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정치과정에 대한 참여는 억압되고 김일성을 정점으로 한 소수권력집단의 자의적 결정이나 오류에 대한 견제가 불가능해졌다. 김일성의 주체노선이 강력한 민족주의적 정서를 활용하기 시작했을 때 정권 혹은 김일성에 대한 도전이나 비판의 공간은 더욱 위축되었다. 그것은 김일성 혹은 김일성계 내부의 자기비판만으로는 제어될 수 없는 초법적 권력의 독주와 남용을 허용했으며 결국은 1960년대에 이르러 김일성에 대한 신적인 개인숭배에 기초한 유일사상, 유일지배체제의 형성에 공헌했다. 1950년대의 ‘김일성계 유일체제’는 1960년대 중반 이후에 굳어진 ‘김일성 유일체제’의 거름이었다. 그것은 북한의 우리식 주체 형 사회주의의 탄생과 함께 병리적 퇴행성 및 폐쇄적 자족성의 덫에 갇힌 북한식 사회주의의 몰락을 예고하는 서막이었을 뿐이다.
[참고 문헌]
1. 김성보 외.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현대사』. 서울: 웅진, 2004.
2. 이항동. 『북한정치와 발전전략』. 서울: 대여문화사, 1994.
3. 박형중. 『북한적현상의 연구-북한사회주의건설의 정치경제』. 서울: 연구사, 1994.
4. 최청호 외. 『북한사회주의건설의 정치경제』. 경남: 경남대학교출판부, 1993.
5. 고병철 외. 『한국전쟁과 북한사회주의체제 건설』. 경남: 경남대학교출판부, 1992.
6. 김준엽. 『북한연구자료집』. 서울: 고려대학교출판부, 1969.
7. 『로동신문』 1963년 10월 28일자.
1950년대는 경제 전략이나 당 사업에 있어서 중국식, 소련식, 조선식에 대한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백가쟁명 하던 시기이다. 문학, 예술, 학술분야에 있어서도 비교적 다양한 의견들이 허용되었으며 당 지도부의 입장과 차별을 보이는 간행물도 적지 않게 출판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북한의 사회주의 정권이 식민지시대에 다양한 공간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경력을 쌓은 여러 공산주의자 그룹들의 연립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김일성계에 의한 권력독점은 이러한 다양성의 토대를 완전히 제거하였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연안계, 소련계, 남로당계 등의 ‘반당종파’행위가 이러한 당내민주주의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계에 의한 권력독점과 함께 당내민주주의의 마지막 토대도 제거되었다. 1956년 제3차 당 대회 규약에서 보장되었던, 당 회의에서 “어떤 당원을 막론하고 비판”할 수 있는 권리, 당 지도기관 선거 시 “입후보자들을 찬성 또는 반대하거나 비판할 수 있는 무제한적 권리”, “당의 정책적 문제들을”, “자유롭게 토의하는” 권리 등은 김준엽. 북한 연구자료집 제II집, (서울: 고려대학교출판부, 1969), PP. 817~835.
김일성계의 권력독점이 제도적으로 완성된 1961년의 제4차 당 대회에서는 사라졌다.
또한 김일성계의 완전하고 독점적인 권력 장악은 북한 사회주의의 성격이 만주에서의 항일 빨찌산 투쟁을 통해 성장한 김일성과 그 세력들의 갖는 특유한 이데올로기적 성향에 의하여 매우 협소하게 규정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만주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서구와의 접촉부재로 인해 형성된 반 서구주의 반 자유주의, 유격대의 오랜 군사투쟁이 요구하는 호전성, 반 정치성, 수직적 권력질서지향 , 이들의 출신성분 및 제한된 해방지구에서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반 지식인적 민중지향성, 그리고 해외라는 특수공간에서 강제된 중국공산당과 소련공산당에 대한 이중적 경험에 토대한 민족주의적 자주성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향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더욱 강화되었고 결정적으로 1950년대의 권력투쟁과정에서 굳어져버렸다. 1960년대의 김일성의 주체노선의 확립, 주체사상의 유일사상화, 김일성 유일사상 유일지배체제의 확립 등은 이미 1950년대에 그 규정조건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6. 결 론
김일성 제거의 성공은 연안계와 소련계를 통한 중국과 소련의 대립을 격화시켰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북한은 어느 한쪽의 위성국가가 되거나 아니면 심각한 내전 형태의 권력투쟁을 겪었을 것이다. 김일성의 제거가 북한의 주권을 심각하게 손상시키고 북한사회주의를 상당히 외세 의존적인 것으로 만들어놓았을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지금보다는 훨씬 외부와의 접촉 범위가 넓은 사회주의경제체제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현재의 입장에서 볼 때 부정적인 결과였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가령 김일성 대신 친 중국계 인물이 들어섰더라면, 또는 친 소련계 인물이 들어섰더라면 북한사회주의는 훨씬 나은 체제가 되었을 것인가. 그리고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반도 통일을 촉진시켰을 것인가. 이런 가설적 질문에 대답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가설은 우리에게 1950년대 북한의 정치적 변화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게 해준다.
김일성 정권은 1950년대의 정치적 변화를 통해서 고도의 수직적이고 배제적인 일원적 권력구조의 단기적 안정성을 확보했다. 김일성계의 단일 세력에 의한 권력독점으로 인해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개혁을 하는데 필요한 충분한 권위가 이들에게 부여되었다. 뒤집어서 얘기하면 후진적 식민지경제에서 산업사회로의 이행은 해결할 수 없는 분파적 투쟁에 에워싸였다면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급진적 사회주의 이행을 막을 모든 걸림돌이 사라진 상황에서 1950년대 북한의 경제가 놀라울만한 성장과 변신을 이룬 것은 잘 알려져 있다. 1953~1956년의 성장률은 41.7%, 1957~1960년 사이의 성장률은 36.6%를 기록했으며, 1960년의 농업생산은 1953년의 2배를 넘었다. 1953년에 총 경작면적의 불과 0.6%에 지나지 않았던 농업협동농장은 1957년에는 93.7%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산업노동자수는 1956년 이후로 절반을 넘어서게 되었다. 북한은 분명히 단시일 내에 산업국가로 탈바꿈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성공은 오히려 북한의 초수직적인 권력구조를 정당화하였으며 그것이 가진 장기적 모순을 은폐하는 기능을 하였다. 1950년대에 정착된 권력구조로 인해 인민들과 당원들의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정치과정에 대한 참여는 억압되고 김일성을 정점으로 한 소수권력집단의 자의적 결정이나 오류에 대한 견제가 불가능해졌다. 김일성의 주체노선이 강력한 민족주의적 정서를 활용하기 시작했을 때 정권 혹은 김일성에 대한 도전이나 비판의 공간은 더욱 위축되었다. 그것은 김일성 혹은 김일성계 내부의 자기비판만으로는 제어될 수 없는 초법적 권력의 독주와 남용을 허용했으며 결국은 1960년대에 이르러 김일성에 대한 신적인 개인숭배에 기초한 유일사상, 유일지배체제의 형성에 공헌했다. 1950년대의 ‘김일성계 유일체제’는 1960년대 중반 이후에 굳어진 ‘김일성 유일체제’의 거름이었다. 그것은 북한의 우리식 주체 형 사회주의의 탄생과 함께 병리적 퇴행성 및 폐쇄적 자족성의 덫에 갇힌 북한식 사회주의의 몰락을 예고하는 서막이었을 뿐이다.
[참고 문헌]
1. 김성보 외.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현대사』. 서울: 웅진, 2004.
2. 이항동. 『북한정치와 발전전략』. 서울: 대여문화사, 1994.
3. 박형중. 『북한적현상의 연구-북한사회주의건설의 정치경제』. 서울: 연구사, 1994.
4. 최청호 외. 『북한사회주의건설의 정치경제』. 경남: 경남대학교출판부, 1993.
5. 고병철 외. 『한국전쟁과 북한사회주의체제 건설』. 경남: 경남대학교출판부, 1992.
6. 김준엽. 『북한연구자료집』. 서울: 고려대학교출판부, 1969.
7. 『로동신문』 1963년 10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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