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조선후기의 천주교
Ⅰ. 조선후기 천주교의 도입
1.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사
1) 조선후기 당대 연구
2) 개항기 및 일제강점기 연구
2. 천주교의 기원
1) 임진왜란 기원설
2) 천진암 창립설
3) 1784년 독자적 창립
3. 천주교 도입의 배경
1) 사회 · 역사적 상황
2) 조선후기 성리학의 구체적인 폐해
Ⅱ. 천주교에 대한 인식과 생활
1. 지식인들의 고민
2. 민인들의 바람
3. 천주교인들의 일상생활
1) 사회적 관행의 변화
2) 종교생활의 특성
3) 신앙 집회의 특성
4) 일상 생활의 전개
4. 박해와 순교
Ⅲ. 조선후기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
서 론
1.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의 근거
2. 가족윤리에 대한 인식
3. 사회윤리에 대한 인식
4. 실천적 행동의 특성
Ⅳ. 결론
Ⅰ. 조선후기 천주교의 도입
1.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사
1) 조선후기 당대 연구
2) 개항기 및 일제강점기 연구
2. 천주교의 기원
1) 임진왜란 기원설
2) 천진암 창립설
3) 1784년 독자적 창립
3. 천주교 도입의 배경
1) 사회 · 역사적 상황
2) 조선후기 성리학의 구체적인 폐해
Ⅱ. 천주교에 대한 인식과 생활
1. 지식인들의 고민
2. 민인들의 바람
3. 천주교인들의 일상생활
1) 사회적 관행의 변화
2) 종교생활의 특성
3) 신앙 집회의 특성
4) 일상 생활의 전개
4. 박해와 순교
Ⅲ. 조선후기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
서 론
1.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의 근거
2. 가족윤리에 대한 인식
3. 사회윤리에 대한 인식
4. 실천적 행동의 특성
Ⅳ. 결론
본문내용
자리 잡게 된다. 또한 부녀자들이 신도 가운데 상당부분을 점하게 된다. 그리고 천주교 신앙은 연령과 무관한 지지를 얻게 된다.
2. 민인들의 바람
교회가 창설된 지 2년만인 1786년경 천주교 신도의 구성이 ‘士’에서 ‘民’으로 확대된다. 이는 당시 사회와 민인들에게 서학인 천주교가 힘을 주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1791년에는 조상제사문제가 발생했다. 천주교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조산제사를 거부하던 ‘윤지충’이 죽음을 당하자 이 사건을 조사하던 조정의 명령에 의해 서학도는 사대부 대접을 받을 수 없게끔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양반 출신의 신도들은 상당수가 서학사상을 포기하고 유학의 입장으로 회귀해 돌아갔다. 이 부분에서도 서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신분적 구성의 변화에 기인한 바가 컸다. 즉 1791년 이후 교회의 지도층이 양반으로부터 중인 이하의 신분층으로 이동해갔다. 그리고 교회에 남아있던 양반 신도들도 더 이상 국가나 사회로부터 선비로서 대우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학에 남아있던 양반들은 이미 스스로가 특권을 포기하거나 이미 몰락한 사람들이었다. 지도층뿐만 아니라 신도들 구성에서도 민중적 특성이 두드러지는데 19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정부당국자들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무지한 서민이나 아녀자들이 서학도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와 같은 구성적 변화는 한글본 천주교 서적들의 확산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민중종교운동으로서 천주교 수용현상이 광범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천주교 탄압에 비례하여 더욱 강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1839년의 천주교 탄압사건의 과정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강화되었고, 1850년대에 이르러서 한때 프랑스 선교사들이 몰락양반 출신의 신도들을 중용하려고 하자, 조선인 신부였던 최양업과 같은 이는 이에 반발하여 신분제 폐단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1866년 이래 수년간 계속되었던 천주교 박해과정에서 조선정부에 체포되어 신문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비특권적 민인들이었다.
천주교 신앙이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 사회에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회와 민인들에게 변화된 사회상을 인정해주고 있음과 동시에 사회의 변화를 촉진시켜준다는 점이었다. 즉 당시 사회에서는 신분제도의 문란과 함께 민인들의 의식수준이 향상되어 가던 과정에서 해로운 인간관과 평등관에 대한 자각이 강화되고 천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천주교에서는 이러한 변화의 정당성을 교리를 통해 설명하고 있었으며, 인간을 인격적 존재로 이해하고 천주로부터 부여받은 불가침적 양심법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스스로를 확인했다는데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3. 천주교인들의 일상생활
1) 사회적 관행의 변화
① 새로운 시간관에 대한 이해
조선후기 사회에서는 음력을 기준으로 하여 일상생활이 진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에게 교회에서의 주간개념이나 윤일개념 또는 서기를 기준으로 한 시간개념은 새로운 시간관념이었다. 신도들은 교회의 전례력을 존중하고 이에 따른 생활도 영위해 나갔다. 첨례표가 서울의 신도들에게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18세기 말부터였다. 그들은 첨례표를 통해 서기 연도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 19세기 중엽의 첨례표에는 서기로 ‘턴쥬강생후’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주간의 개념이 자리 잡지는 못하였다. 1784년 서울에 교회가 세워진 후 신도들은 주일이라는 개념을 확실히 가지게 되었다. ‘주일’은 주간의 개념을 구성하는 7요일 가운데 기초가 되는 개념이었다. 신도들은 7일마다 즉 매 일요일마다 정기적으로 모여서 신앙집회를 가지고 있었다. 초기 신도들의 주일 개념은 ‘노동을 파하고 거룩히 지내라’는 ‘파공’에 대한 천주십계의 규정을 통해서 신도들의 일상생활 안에 침투하였다. 당시의 신도들에게 요일의 개념은 명확하게 제시되어있지 않았지만 일부 신도들은 교회 전례력에 따른 주일과 금요일의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1799 청주에서 순교한 원 야고보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는 지난날의 탐식죄를 갚기 위하여 매주 ‘금요일’ 마다 금식을 했고 주일과 축일에는 음식을 많이 장만하여 모든 사람을 청하여 먹게 하고 주일을 기쁘게 보내고 천주의 은혜에 감사해야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1800년 이중배와 원경도가 부활절을 맞아 “개를 잡고 술을 많이 장만하여,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지낸”일을 보아 당시 신도들이 교회의 전례력에 따라 부활절 및 주요 축일을 기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종교적 의례와 시간 개념 형성의 상관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의 일상생활은 여전히 음력에 의해서 진행되어 나가고 있었지만 그 생활에 새롭게 서기와 주간 내지는 요일의 개념이 첨가되면서 그들의 일상생활은 조선후기의 일반적인 생활과는 구별되었고 이러한 시간생활의 새로운 틀은 그들이 후일 일반 주거지와는 구별되는 교우촌을 형성케 하는 여러 요인 중 하나로 추정해 볼 수 있다.
② 결혼에 대한 규정
조선후기 사회에 있어서 결혼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양반 지배층에 있어서 결혼은 가문의 계승과 가세의 확장이라는 의미가 짙었으므로 일정한 통혼권이 관습으로 전해지고 있었고 결혼은 성리학적 예론과 인간관에 의해 규정되고 있었다. 따라서 축첩 내지 중혼이 일반적으로 용인되고 있었고 과부의 개가는 금지되었다. 그러나 18,19 세기 서울의 신앙 공동체 에서는 이런 기존의 결혼관습에 대한 도전을 시도했고, 결혼에 있어서 새로운 기준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당시 교회에서는 결혼당사자의 의사를 절대적으로 존중해야함을 강조하며 억혼을 금지하고 신도들의 자신 자식을 비신도들에게 보내어 기르게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고 자식들에 결혼에 있어서도 신도들 사이의 결혼을 장려했다. 그 결과 신도들에게서는 중첩된 인척관계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보편화된 관행으로 보기 어렵다.
당시 일반적인 결혼관행은 신분내혼이었고, 통혼권도 동일한 신분 내로 제한되어있었다. 그러나 신도들은 신앙을 매개로 한 새로운 통혼권을 형성하였다. 이것은 신분내혼의 관행을
2. 민인들의 바람
교회가 창설된 지 2년만인 1786년경 천주교 신도의 구성이 ‘士’에서 ‘民’으로 확대된다. 이는 당시 사회와 민인들에게 서학인 천주교가 힘을 주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1791년에는 조상제사문제가 발생했다. 천주교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조산제사를 거부하던 ‘윤지충’이 죽음을 당하자 이 사건을 조사하던 조정의 명령에 의해 서학도는 사대부 대접을 받을 수 없게끔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양반 출신의 신도들은 상당수가 서학사상을 포기하고 유학의 입장으로 회귀해 돌아갔다. 이 부분에서도 서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신분적 구성의 변화에 기인한 바가 컸다. 즉 1791년 이후 교회의 지도층이 양반으로부터 중인 이하의 신분층으로 이동해갔다. 그리고 교회에 남아있던 양반 신도들도 더 이상 국가나 사회로부터 선비로서 대우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학에 남아있던 양반들은 이미 스스로가 특권을 포기하거나 이미 몰락한 사람들이었다. 지도층뿐만 아니라 신도들 구성에서도 민중적 특성이 두드러지는데 19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정부당국자들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무지한 서민이나 아녀자들이 서학도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와 같은 구성적 변화는 한글본 천주교 서적들의 확산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민중종교운동으로서 천주교 수용현상이 광범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천주교 탄압에 비례하여 더욱 강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1839년의 천주교 탄압사건의 과정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강화되었고, 1850년대에 이르러서 한때 프랑스 선교사들이 몰락양반 출신의 신도들을 중용하려고 하자, 조선인 신부였던 최양업과 같은 이는 이에 반발하여 신분제 폐단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1866년 이래 수년간 계속되었던 천주교 박해과정에서 조선정부에 체포되어 신문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비특권적 민인들이었다.
천주교 신앙이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 사회에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회와 민인들에게 변화된 사회상을 인정해주고 있음과 동시에 사회의 변화를 촉진시켜준다는 점이었다. 즉 당시 사회에서는 신분제도의 문란과 함께 민인들의 의식수준이 향상되어 가던 과정에서 해로운 인간관과 평등관에 대한 자각이 강화되고 천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천주교에서는 이러한 변화의 정당성을 교리를 통해 설명하고 있었으며, 인간을 인격적 존재로 이해하고 천주로부터 부여받은 불가침적 양심법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스스로를 확인했다는데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3. 천주교인들의 일상생활
1) 사회적 관행의 변화
① 새로운 시간관에 대한 이해
조선후기 사회에서는 음력을 기준으로 하여 일상생활이 진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에게 교회에서의 주간개념이나 윤일개념 또는 서기를 기준으로 한 시간개념은 새로운 시간관념이었다. 신도들은 교회의 전례력을 존중하고 이에 따른 생활도 영위해 나갔다. 첨례표가 서울의 신도들에게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18세기 말부터였다. 그들은 첨례표를 통해 서기 연도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 19세기 중엽의 첨례표에는 서기로 ‘턴쥬강생후’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주간의 개념이 자리 잡지는 못하였다. 1784년 서울에 교회가 세워진 후 신도들은 주일이라는 개념을 확실히 가지게 되었다. ‘주일’은 주간의 개념을 구성하는 7요일 가운데 기초가 되는 개념이었다. 신도들은 7일마다 즉 매 일요일마다 정기적으로 모여서 신앙집회를 가지고 있었다. 초기 신도들의 주일 개념은 ‘노동을 파하고 거룩히 지내라’는 ‘파공’에 대한 천주십계의 규정을 통해서 신도들의 일상생활 안에 침투하였다. 당시의 신도들에게 요일의 개념은 명확하게 제시되어있지 않았지만 일부 신도들은 교회 전례력에 따른 주일과 금요일의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1799 청주에서 순교한 원 야고보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는 지난날의 탐식죄를 갚기 위하여 매주 ‘금요일’ 마다 금식을 했고 주일과 축일에는 음식을 많이 장만하여 모든 사람을 청하여 먹게 하고 주일을 기쁘게 보내고 천주의 은혜에 감사해야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1800년 이중배와 원경도가 부활절을 맞아 “개를 잡고 술을 많이 장만하여,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지낸”일을 보아 당시 신도들이 교회의 전례력에 따라 부활절 및 주요 축일을 기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종교적 의례와 시간 개념 형성의 상관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의 일상생활은 여전히 음력에 의해서 진행되어 나가고 있었지만 그 생활에 새롭게 서기와 주간 내지는 요일의 개념이 첨가되면서 그들의 일상생활은 조선후기의 일반적인 생활과는 구별되었고 이러한 시간생활의 새로운 틀은 그들이 후일 일반 주거지와는 구별되는 교우촌을 형성케 하는 여러 요인 중 하나로 추정해 볼 수 있다.
② 결혼에 대한 규정
조선후기 사회에 있어서 결혼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양반 지배층에 있어서 결혼은 가문의 계승과 가세의 확장이라는 의미가 짙었으므로 일정한 통혼권이 관습으로 전해지고 있었고 결혼은 성리학적 예론과 인간관에 의해 규정되고 있었다. 따라서 축첩 내지 중혼이 일반적으로 용인되고 있었고 과부의 개가는 금지되었다. 그러나 18,19 세기 서울의 신앙 공동체 에서는 이런 기존의 결혼관습에 대한 도전을 시도했고, 결혼에 있어서 새로운 기준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당시 교회에서는 결혼당사자의 의사를 절대적으로 존중해야함을 강조하며 억혼을 금지하고 신도들의 자신 자식을 비신도들에게 보내어 기르게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고 자식들에 결혼에 있어서도 신도들 사이의 결혼을 장려했다. 그 결과 신도들에게서는 중첩된 인척관계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보편화된 관행으로 보기 어렵다.
당시 일반적인 결혼관행은 신분내혼이었고, 통혼권도 동일한 신분 내로 제한되어있었다. 그러나 신도들은 신앙을 매개로 한 새로운 통혼권을 형성하였다. 이것은 신분내혼의 관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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