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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없음
본문내용
독창성이다. 뷰셋에게 예슈는 역사적으로 훌륭한 교사였지만 제자들의 가르침과 연속성이 없다. 제자들은 메시야 속성으로 인자(the Son of Man)을 천상적인 존재로 믿었다. 이 천상적인 존재가 속히 오심을 대망한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신앙이 종말론적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헬라지역으로 확대되면서 미래의 심판자에서 현재적 주로 숭배되었다는 것이다. 뷰셋은 “주”라는 용어가 원시 팔레스타인 교회와 헬라적 교회가 다르게 이해되었는데, 헬라 교회가 당대의 밀의종교(密儀宗敎)에서 사용되는 호칭을 전유했다는 것이다.
메이첸은 뷰셋의 팔레스타인 기독교와 전혀 다른 헬라 기독교라는 견해, 즉 바울의 종교가 이교에 기원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신약성경에서 주어진 정보에 의한다면 전혀 불가능한 가설로 비판했다. 즉 뷰셋은 성경 본문의 증거를 떠나서, 자기가 설정한 가설에 모든 역사적 상황을 짜 맞춘 것이다.
[바울종교의 기원을 밝히 성경 본문의 범위: 바울서신과 사도행전] 메이첸은 바울을 연구하기 위해서 성경을 근본으로 한다. 첫째는 바울서신이며 둘째는 사도행전이다.
먼저 13권의 바울서신에서 4권(갈라디아서, 고린도 전,후서, 로마서)은 튀빙겐 학파의 창시자인 바우어(Baur)에 의해서 진작이라고 인정되었다. 나머지 3개(데살로니가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는 만인이 인정하는(homologoumena \'아티레고메나\'(Antilegomena : 이의가 있는, 논쟁 중인 책들)
) 바울서신이다. 나머지 7개의 서신은 극단주의자를 제외한 역사가들은 바울의 진작으로 인정하고 있다. 나머지 3개의 서신(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을 바울의 서신으로 인정하면 보수주의(conservatism)이다. 바울의 목회서신(디모데전, 후서, 디도서)을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하는 학자는 없다. 메이첸은 인정하지만 인정과 불인정의 싸움은 끝이 없기 때문에, 합의된 공통 기반에서 논의를 진행하려한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도 바울의 동행자였다(행 16:11의 “우리”). 메이첸은 사도행전이 후대의 저작설이라는 견해를 일축시킨다. 사도행전이 누가의 저작임을 하르낙도 인정했다. 사도행전이 누가의 저작설임을 부인하는 진영은 자연주의 견해자들이었다. 이유로 바울서신과 일치되지 않음과 사도행전이 등장하는 기적 현상이었다.
자유주의 시대에 사도행전의 저자와 말씀에 대해서 거부했지만, 1920년대에서는 사도행전의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었다. 바울서신과 사도행전에서 유대교와 유대파 기독교에 대한 명확한 관계가 증명될 수 있다.
제 2 장 바울 개종 이전
(48-67/번역본 58-92)
메이첸은 바울의 개종 이전 시대에 대한 이해를 제시했다. 개종 이전의 사울은 바리새파로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박해하였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면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바울의 일생] 바울의 종교 기원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바울의 생애에서 그가 변화한 시대에 대한 고찰은 반드시 필요하다. 일단 바울이 개종 전에 예루살렘에는 역사적 예수와 초기 예루살렘 교회(the historical Jesus and with the primitive Jerusalem Church)가 있었다. 바울의 사상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제시하고 2 장에서는 바울의 생애에 집중한다.
[바울: 다소 출생]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길리기아의 수도인 다소 출생(Tarsus)이다. 1890년 크렌켈(Krenkel)은 사도행전을 신뢰하지 않고 근대적 사고에 적합하게 재구성하여 다소 출생을 부정하였다. 크렌켈은 바울이 헬라 문화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바울 서신의 초기 문헌에 헬라어에 대한 탁월한 구사로 크렌켈의 주장은 무의미하게 되었다. 현대 비평가들의 다수도 바울이 헬라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즉 바울이 다소 출생이라는 것은 보편적으로 인정되었다.
제롬(Jerome)은 바울이 갈릴리의 기샬라(Gischala in Galilee) 출생이라 보았다. 이에 메이첸은 제롬이 선천적으로 사물을 혼란시키는 버릇이 있다며 사도행전의 진술의 확실성을 강조했다. 잔(Zahn) 기샬라에 대해서 논문과 저술로 더 깊게 고찰했다. 근래에(1920년대) 바울의 부모가 갈릴리 기샬라에서 나온 것이라는 의견은 신빙성이 있다. 기샬라는 B.C 67년경에 유대가 로마에 항전하였던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것은 바울에 있는 히브리적인 사고(Aramaic and Palestinian)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소는 안디옥이나 고린도보다는 못하지만 지리적, 상업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또한 학문적으로도 스토아 철학자 아테노도루스(Athenodorus)가 있는 유명한 지역이었다. 다소는 상황에 대해서는 램지(Ramsay)와 보릭(Bohlig)에 의해 전문적으로 연구되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로마 시민권을 지닌 사울의 집안은 다소에서 상류층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의 시민권 문제는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이 일치하지 않는다. 사도행전은 명백하지만, 바울서신에서는 로마의 태형을 세 번이나 맞은(고후 11:25) 이유에 대해 난점이 있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특권을 포기함으로 쉽게 해소될 수 있다. 사도행전이나 서신에서 바울이 시민권을 소유하였다고 인정해야만 설명할 수 있다.
바울은 헬라사상과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여 이방세계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다. 그런데도 그의 가정에서는 엄격하게 분리된 유대인이었다. 이것은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서 모두 증명된다(고후 11:22, 빌 3:5). 사도행전 6장에서는 유대인이 헬라파와 히브리파로 구별되었다. 바울은 빌 3:5에서 자신을 아람어를 말하는 유대인으로 선언했다. 사울은 유대인 부모에게 유대주의를 계승받은 펠레스타인 유대인이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 메이첸이 사용한 a Jew of the Dispersion은 문자적으로는 “분산된 유대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2012년인 현재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a Jew of the Diaspora)이란 말이 사용됨으로 편집자가 편집했다.
이라는 견해는 일축되어야 한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 바리새인의 아들이었다(행 23:6). 라이프
메이첸은 뷰셋의 팔레스타인 기독교와 전혀 다른 헬라 기독교라는 견해, 즉 바울의 종교가 이교에 기원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신약성경에서 주어진 정보에 의한다면 전혀 불가능한 가설로 비판했다. 즉 뷰셋은 성경 본문의 증거를 떠나서, 자기가 설정한 가설에 모든 역사적 상황을 짜 맞춘 것이다.
[바울종교의 기원을 밝히 성경 본문의 범위: 바울서신과 사도행전] 메이첸은 바울을 연구하기 위해서 성경을 근본으로 한다. 첫째는 바울서신이며 둘째는 사도행전이다.
먼저 13권의 바울서신에서 4권(갈라디아서, 고린도 전,후서, 로마서)은 튀빙겐 학파의 창시자인 바우어(Baur)에 의해서 진작이라고 인정되었다. 나머지 3개(데살로니가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는 만인이 인정하는(homologoumena \'아티레고메나\'(Antilegomena : 이의가 있는, 논쟁 중인 책들)
) 바울서신이다. 나머지 7개의 서신은 극단주의자를 제외한 역사가들은 바울의 진작으로 인정하고 있다. 나머지 3개의 서신(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을 바울의 서신으로 인정하면 보수주의(conservatism)이다. 바울의 목회서신(디모데전, 후서, 디도서)을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하는 학자는 없다. 메이첸은 인정하지만 인정과 불인정의 싸움은 끝이 없기 때문에, 합의된 공통 기반에서 논의를 진행하려한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도 바울의 동행자였다(행 16:11의 “우리”). 메이첸은 사도행전이 후대의 저작설이라는 견해를 일축시킨다. 사도행전이 누가의 저작임을 하르낙도 인정했다. 사도행전이 누가의 저작설임을 부인하는 진영은 자연주의 견해자들이었다. 이유로 바울서신과 일치되지 않음과 사도행전이 등장하는 기적 현상이었다.
자유주의 시대에 사도행전의 저자와 말씀에 대해서 거부했지만, 1920년대에서는 사도행전의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었다. 바울서신과 사도행전에서 유대교와 유대파 기독교에 대한 명확한 관계가 증명될 수 있다.
제 2 장 바울 개종 이전
(48-67/번역본 58-92)
메이첸은 바울의 개종 이전 시대에 대한 이해를 제시했다. 개종 이전의 사울은 바리새파로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박해하였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면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바울의 일생] 바울의 종교 기원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바울의 생애에서 그가 변화한 시대에 대한 고찰은 반드시 필요하다. 일단 바울이 개종 전에 예루살렘에는 역사적 예수와 초기 예루살렘 교회(the historical Jesus and with the primitive Jerusalem Church)가 있었다. 바울의 사상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제시하고 2 장에서는 바울의 생애에 집중한다.
[바울: 다소 출생]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길리기아의 수도인 다소 출생(Tarsus)이다. 1890년 크렌켈(Krenkel)은 사도행전을 신뢰하지 않고 근대적 사고에 적합하게 재구성하여 다소 출생을 부정하였다. 크렌켈은 바울이 헬라 문화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바울 서신의 초기 문헌에 헬라어에 대한 탁월한 구사로 크렌켈의 주장은 무의미하게 되었다. 현대 비평가들의 다수도 바울이 헬라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즉 바울이 다소 출생이라는 것은 보편적으로 인정되었다.
제롬(Jerome)은 바울이 갈릴리의 기샬라(Gischala in Galilee) 출생이라 보았다. 이에 메이첸은 제롬이 선천적으로 사물을 혼란시키는 버릇이 있다며 사도행전의 진술의 확실성을 강조했다. 잔(Zahn) 기샬라에 대해서 논문과 저술로 더 깊게 고찰했다. 근래에(1920년대) 바울의 부모가 갈릴리 기샬라에서 나온 것이라는 의견은 신빙성이 있다. 기샬라는 B.C 67년경에 유대가 로마에 항전하였던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것은 바울에 있는 히브리적인 사고(Aramaic and Palestinian)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소는 안디옥이나 고린도보다는 못하지만 지리적, 상업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또한 학문적으로도 스토아 철학자 아테노도루스(Athenodorus)가 있는 유명한 지역이었다. 다소는 상황에 대해서는 램지(Ramsay)와 보릭(Bohlig)에 의해 전문적으로 연구되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로마 시민권을 지닌 사울의 집안은 다소에서 상류층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의 시민권 문제는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이 일치하지 않는다. 사도행전은 명백하지만, 바울서신에서는 로마의 태형을 세 번이나 맞은(고후 11:25) 이유에 대해 난점이 있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특권을 포기함으로 쉽게 해소될 수 있다. 사도행전이나 서신에서 바울이 시민권을 소유하였다고 인정해야만 설명할 수 있다.
바울은 헬라사상과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여 이방세계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다. 그런데도 그의 가정에서는 엄격하게 분리된 유대인이었다. 이것은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서 모두 증명된다(고후 11:22, 빌 3:5). 사도행전 6장에서는 유대인이 헬라파와 히브리파로 구별되었다. 바울은 빌 3:5에서 자신을 아람어를 말하는 유대인으로 선언했다. 사울은 유대인 부모에게 유대주의를 계승받은 펠레스타인 유대인이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 메이첸이 사용한 a Jew of the Dispersion은 문자적으로는 “분산된 유대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2012년인 현재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a Jew of the Diaspora)이란 말이 사용됨으로 편집자가 편집했다.
이라는 견해는 일축되어야 한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 바리새인의 아들이었다(행 23:6).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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