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포르투갈의 역사와 문화- 대항해시대의 떠오르던 스타, 경제 위기의 스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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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스페인·포르투갈의 역사와 문화- 대항해시대의 떠오르던 스타, 경제 위기의 스타 되다.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 론
2. 본 론
(1) 古代의 스페인·포르투갈
1)초기의 이베리아 반도 - 유럽으로부터의 고립 가까운 아프리카
2) 히스파니아 - 로마와 카르타고, 그리고 지중해 문화로의 편입
(2) 中世의 스페인·포르투갈
1) 이슬람 문명과의 만남
2) 대제국으로의 도약 - 국토회복운동과 지리상의 발견
(3) 近·現代의 스페인·포르투갈
1) 해가지지 않는 제국의 몰락
2) 스페인 독립운동과 식민지의 상실
3) 스페인 내전과 이베리아의 군사독재정권
3. 결 론 - 스페인·포르투갈 역사의 意義

본문내용

이 이베리아 반도를 천국과 같이 여겼다는 의미일 것이다. 황폐한 북아프리카와 달리 수량이 풍부한 이베리아 반도는 분명 아랍인들에게 살기 좋은 장소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인들은 이베리아를 완전하게 점령하지 못했다.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개종을 강요하지 않고 이베리아의 기독교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던 이슬람인들의 종교적인 관용이 북쪽에 있던 기독교 왕국들의 저항 정신을 말살시키지 못했고 이것이 카톨릭교 왕국의 부흥과 국토회복운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이베리아 반도를 다시 점령하고나서 이슬람인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고 축출함으로써 종교적으로도 카톨릭의 완전한 통일을 이루었다. 사상적으로 완전히 이베리아를 굴복시키지 않았기에 결국 이슬람은 이베리아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베리아 반도에 남은 이슬람의 우수한 문화와 과학기술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강대국으로 발전하는데에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대제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로마와 카르타고의 문화를 계승하면서 이슬람의 문화를 융합시켜 시너지를 일으킬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그 계기가 이베리아 반도에 찾아오게 된다.
2) 대제국으로의 도약 : 국토회복운동과 지리상의 발견
<그라나다의 함락>
앞서 이야기하였듯 이슬람의 이베리아 반도 지배는 카톨릭 세력이 남아있던 북부에서 일어난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이 시작하면서 종결되었다. 800년 동안의 국토회복운동은 오늘날 스페인에서 그 자체로 ‘십자군(Crusade)’이라고 평가받는 사건이었다. 그 시작은 722년 펠라요(Pelayo) 장군이 ‘코바동가(Covadonga)’동굴에서의 전투에서 무어인을 격파하면서부터였다. 그 이후부터 북부의 기독교 세력은 점차 남쪽으로 무어인들을 격파해 나갔고 당시 소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던 알 안달루스 왕조는 이를 막을 여력이 없었다.
당시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으로부터 회복했던 영토는 모두 왕족 형태의 독립적인 기독교 국가로 성장하였다. 1212년에 라스 나바스 전쟁 이후에 국토회복운동이 종결되었는데 이시기에 형성된 국가들은 크게 5개였다. 그 국가들은 다음과 같다. 북부 중앙의 레온-카스티야 왕국(Reino de Leon y Castilla), 북부 산악지대의 나바라 왕국(Reino de Navarra), 지중해 동부의 카탈루냐-아라곤(Reino de Cataluna y Aragon) 왕국의 기독교 왕국들과 이슬람 최우의 왕국이었던 나자리(Nazari) 왕조의 그나라다 왕국(Reino de Granada) 그리고 포르투갈 왕국(Reino de Portugal)이었다. 이시기부터 포르투갈이 독립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당시의 왕국들은 11세기 이후에 서유럽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흡수하기 시작하였다.
<1037년의 이베리아 반도산초 3세 사후 나바라 왕국은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남부의 초록색은 이슬람 영토로 여러 소국으로 분열되어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왕국들 중에서 가장 큰 영토를 자랑하는 두 왕국의 군주였던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Isabel I, 1451.4.22 ~ 1504.11.26.)과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Fernando II, 1452.3.10 ~ 1516.1.23.) 은 각자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1469년에 정략결혼을 하는데 이를 통해서 카스티야-아라곤(Reino de Castilla y Aragon) 왕국이 탄생한다. 카스티야-아라곤 왕국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기독교 왕국이었고 이러한 공헌으로 이 두 군주는 ‘카톨릭 왕들(Los Reyes Catolicos)’이라는 칭호를 얻는다. 전제적인 중앙집권화를 추구했던 카톨릭 왕들은 곧바로 내치를 안정시키면서 남쪽의 그라나다를 함락시키고 나바라 왕국과 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을 각각 통합한다. 특히 페르난도 왕은 마키아벨리가 “근대적 군주상의 모범이다.”라고 평할만큼 대외정책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부정적인 요소도 있었다. 1478년 설치된 종교재판소는 스페인 사회와 정치 전반에 엄청난 퇴행을 몰고 왔다. 종교재판소는 금융업에 종사하던 유대인과 무슬림을 학살, 추방하였고, 덕분에 이후 스페인의 경제 인프라는 후진적인 구조를 유지하게 되었다.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左)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右)>
국토회복운동은 단순하게 옛날에 이슬람에게 빼앗긴 땅을 다시 되찾는 운동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 결과를 보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먼저 국토회복운동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지리상의 발견을 이끄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이베리아의 종교가 기독교로 완전하게 통일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슬람과 로마, 카르타고의 유산을 접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대외적으로 뻗을수 있는 힘을 축적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시기에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바다 넘어 異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강해졌고 이것이 오스만제국에 의해 동서무역로가 봉쇄된 것과 맞물려서 기존의 루트와는 아예 다른 교역 루트를 찾아야 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지리상의 발견을 이끌게 되었다.
마젤란과 콜럼버스가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내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교황의 중재로 ‘토르데시야스(Tordesillas) 조약’을 맺으면서 식민지 개척은 더 활발해진다 특히 코르테스와 피사로가 아즈테카와 잉카등 중남미의 여러 국가들을 점령하고 그곳의 금과 은을 본국으로 유입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또한 식민지에서 나오는 각종 자원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세계의 중심으로 일어서는데 중요한 산업 기반과 젖줄이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신대륙에서 유입된 금과 은은 높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빈부격차를 강화시켰다. 이로 인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경제는 처음부터 곪아 들어가기 시작한다. 이 모든 문제는 이후 합스부르크 왕조 시대의 스페인 군주들이 치러야 할 문제였다.
<마젤란의 항해지도(위)와 대항해 시대의 탐험가들(아래), 왼쪽부터 마젤란, 바스코 다가마, 콜럼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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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6.18
  • 저작시기2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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