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1920년대 독립운동의 양상과 성격
2. 독립군단의 편성배경
3. 1920년대 만주 무장투쟁의 배경
4. 홍범도[洪範圖, 1868~1943]
5. 봉오동 전투의 서막, 삼둔자 전투
6. 봉오동전투의 전개과정
7. 봉오동 전투의 여파로 인한 독립군 연합 결성
8. 김좌진[金左鎭, 1889~1930]
9. 청산리대첩
10. 청산리 대첩의 전개과정
11. 청산리대첩의 의의와 영향의 재검토
12. 맺음말
13. 소감문
참고문헌
2. 독립군단의 편성배경
3. 1920년대 만주 무장투쟁의 배경
4. 홍범도[洪範圖, 1868~1943]
5. 봉오동 전투의 서막, 삼둔자 전투
6. 봉오동전투의 전개과정
7. 봉오동 전투의 여파로 인한 독립군 연합 결성
8. 김좌진[金左鎭, 1889~1930]
9. 청산리대첩
10. 청산리 대첩의 전개과정
11. 청산리대첩의 의의와 영향의 재검토
12. 맺음말
13. 소감문
참고문헌
본문내용
키워갔다.
3. 1920년대 만주 무장투쟁의 배경 김성남,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수막새, 2005, 283쪽.
1919년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자극을 받아 3.1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으나, 3.1운동은 일제의 잔혹한 탄압으로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후 독립운동 세력은 힘을 키워 후일을 기약하자는 ‘실력양성론’자들과 일제에 비타협적인 직접적 무장투쟁을 주장했던 ‘무력항쟁론’자들 그리고 식민사관에 물들어 일제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 내에서 자율권을 찾는 ‘자치론’자들로 나뉘었다.
무력항쟁론을 신봉하던 독립투사들은 국내에서 더 이상 무장독립운동을 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본거지를 만주쪽으로 옮겼다.
1920년대에는 일제가 아직 만주를 장학하지 못하고 있었고, 또 국내와 가까운데다가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중조선인의 지원을 받으면서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거기에 만주에는 1918년에 이미 대종교인을 주축으로 한 북로군정서가 만들어져 있었고, 1919년 3월 13일 3.1운동에 자극받아 길림성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1919년 4월에는 구춘선과 안무가 주축이 된 대한국민회가 만들어지고 신흥무관학교도 설립되었다.
4.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윤병석, 「 독립군사 」 -봉오동, 청산리의 독립전쟁- , 지식산업사, 1990, 152쪽.
1868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나 사냥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1907년 일제의 총포관리법에 반발하여 1907년 11월 산포대를 조직, 일본군을 공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강제합병 되자 독립군을 조직하여 곳곳에서 싸워 큰 성과를 얻었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는 약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 3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120여 명을 사살, 그때까지의 독립군이 올린 전과 중 최대의 승전을 기록하였으며, 그해 9월 청산리 전투에서는 북로군정서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였으며, 연합부대의 사령관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 후 독립운동단체가 흑룡강의 국경지대에 집결하자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부총재가 되었으며, 1921년 레닌 정부의 협조를 얻어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군의 실력양성에 힘쓰던 중 1921년 6월 소련 당국의 한국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령으로 빚어진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자 소련군과 충돌하여 많은 희생자를 낸 채 북만주로 탈출하였다. 그 후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1943년 병사하였다.
레닌 정부의 지원을 받는 등,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드러냈기 때문에 김좌진 장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않은 인물이다.
5. 봉오동 전투의 서막, 삼둔자 전투 김성남,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수막새, 2005, 287쪽.
1920년대 무장독립 투사들의 전투양상은 국경을 넘나들며 일본군들 도발한 뒤, 만주내의 유리한 지역으로 유인하여 공격하는 작전을 주로 썼던 것으로 보인다.
상해의 임시정부는 국내 비밀행정조직을 통하여 자금을 조달하여 군대의 질을 높이려 했으나,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무위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독립군은 무기와 자금을 스스로 조달할 수밖에 없었고 최대한 전력을 보전하고 효과적으로 전력을 운용하기 위하여 한반도 내에서의 교전을 피하고 일본군을 만주내로 유인해 싸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1920년 6월 4일 화룡현 길림성에서 벌어진 삼둔자 전투는 봉오동이나 청산리 대첩과 같은 전투와 비교해보면 상당히 소규모 교전이라고 할 수 있지만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발단이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삼둔자 전투는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이 함경북도 종성에 침투하여 일본군 헌병대를 격파하고 퇴각하자, 이에 분노한 일본군에서 1개 중대로 추격하면서 시작되었다.
홍범도는 인군의 독립군부대를 하나로 통일하여 약 400명의 병력을 지휘하고 있던 인물로 삼둔자 전투 이전부터 두만강을 넘나들며 국경에 배치된 일본군을 수차례 습격했던 전력이 있다.
홍범도는 갑진, 혜산, 자성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했으며, 만포진에서는 70명의 일본군을 사살한 전적까지 가지고 있었다.
3.1운동 이후 조직적인 투쟁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일제는 비록 소규모의 전투지만, 상습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하는 홍범도를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다. 이에 일본군은 홍범도 부대의 기습을 막기 위하여 아리요시가 이끄는 한 개 중대를 동원해 월강추격대대(신속기동군)을 편성했다.
두만강을 건너온 신속기동군은 독립군의 행방을 찾을 수 없자 삼둔자 마을에 있던 무고한 한인동포를 대량 학살하고, 재차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진격로를 미리 예측하고 있던 홍범도 부대는 삼둔자 서남방에서 매복작전을 펼쳐 일본군을 모두 궤멸시켰다.
6. 봉오동전투의 전개과정 김성남,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수막새, 2005, 292쪽.
삼둔자 전투에 나갔던 신속기동군이 패배하고 돌아오자 일본 주둔군 제 19사단장은 야스가와 소좌 휘하의 한 개 대대를 증원군으로 급파했다.
일본군은 이 기회에 홍범도 부대의 뿌리를 뽑기로 결심하고 독립군의 본거지를 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에 야스가와와 아리요시는 각각의 병력과 남양 수비대를 합쳐 약 3,400여명의 부대를 이끌고 봉오동으로 출진했다.
일본군의 진격이 시작되자 홍범도는 그들이 국경지대의 지형을 숙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之자 형태의 복잡한 계곡으로 구성되어 있는 봉오동의 지형을 이용하여 매복전을 준비했다.
봉오동에 있는 계곡의 끝에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개활지가 있었다. 비록 이 장소는 폭이 100미터 남짓한 좁은 지역이었으나 적군을 그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전멸시킬수도 있는 완벽한 매복지였다.
홍범도는 독군부부대를 동쪽 산지의 시루봉에 배치하고, 신민단 부대는 남쪽에 배치했으며 자신의 본대는 서쪽을 막아 전열을 가다듬고 전투준비를 마친 후에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1920년 6월 7일 오전 일본군 척후대가 개활지 입구에 그 모습을 드러내자, 홍범도는 유인 소대를 편성하여 습격을 가했다.
일본군 척후대는 황급히 후퇴하여 뒤에 따라오고 있던 본대에 독립군의 위치를 보고했다.
일본군 본대는 그날 점심
3. 1920년대 만주 무장투쟁의 배경 김성남,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수막새, 2005, 283쪽.
1919년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자극을 받아 3.1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으나, 3.1운동은 일제의 잔혹한 탄압으로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후 독립운동 세력은 힘을 키워 후일을 기약하자는 ‘실력양성론’자들과 일제에 비타협적인 직접적 무장투쟁을 주장했던 ‘무력항쟁론’자들 그리고 식민사관에 물들어 일제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 내에서 자율권을 찾는 ‘자치론’자들로 나뉘었다.
무력항쟁론을 신봉하던 독립투사들은 국내에서 더 이상 무장독립운동을 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본거지를 만주쪽으로 옮겼다.
1920년대에는 일제가 아직 만주를 장학하지 못하고 있었고, 또 국내와 가까운데다가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중조선인의 지원을 받으면서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거기에 만주에는 1918년에 이미 대종교인을 주축으로 한 북로군정서가 만들어져 있었고, 1919년 3월 13일 3.1운동에 자극받아 길림성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1919년 4월에는 구춘선과 안무가 주축이 된 대한국민회가 만들어지고 신흥무관학교도 설립되었다.
4.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윤병석, 「 독립군사 」 -봉오동, 청산리의 독립전쟁- , 지식산업사, 1990, 152쪽.
1868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나 사냥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1907년 일제의 총포관리법에 반발하여 1907년 11월 산포대를 조직, 일본군을 공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강제합병 되자 독립군을 조직하여 곳곳에서 싸워 큰 성과를 얻었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는 약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 3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120여 명을 사살, 그때까지의 독립군이 올린 전과 중 최대의 승전을 기록하였으며, 그해 9월 청산리 전투에서는 북로군정서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였으며, 연합부대의 사령관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 후 독립운동단체가 흑룡강의 국경지대에 집결하자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부총재가 되었으며, 1921년 레닌 정부의 협조를 얻어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군의 실력양성에 힘쓰던 중 1921년 6월 소련 당국의 한국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령으로 빚어진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자 소련군과 충돌하여 많은 희생자를 낸 채 북만주로 탈출하였다. 그 후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1943년 병사하였다.
레닌 정부의 지원을 받는 등,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드러냈기 때문에 김좌진 장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않은 인물이다.
5. 봉오동 전투의 서막, 삼둔자 전투 김성남,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수막새, 2005, 287쪽.
1920년대 무장독립 투사들의 전투양상은 국경을 넘나들며 일본군들 도발한 뒤, 만주내의 유리한 지역으로 유인하여 공격하는 작전을 주로 썼던 것으로 보인다.
상해의 임시정부는 국내 비밀행정조직을 통하여 자금을 조달하여 군대의 질을 높이려 했으나,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무위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독립군은 무기와 자금을 스스로 조달할 수밖에 없었고 최대한 전력을 보전하고 효과적으로 전력을 운용하기 위하여 한반도 내에서의 교전을 피하고 일본군을 만주내로 유인해 싸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1920년 6월 4일 화룡현 길림성에서 벌어진 삼둔자 전투는 봉오동이나 청산리 대첩과 같은 전투와 비교해보면 상당히 소규모 교전이라고 할 수 있지만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발단이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삼둔자 전투는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이 함경북도 종성에 침투하여 일본군 헌병대를 격파하고 퇴각하자, 이에 분노한 일본군에서 1개 중대로 추격하면서 시작되었다.
홍범도는 인군의 독립군부대를 하나로 통일하여 약 400명의 병력을 지휘하고 있던 인물로 삼둔자 전투 이전부터 두만강을 넘나들며 국경에 배치된 일본군을 수차례 습격했던 전력이 있다.
홍범도는 갑진, 혜산, 자성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했으며, 만포진에서는 70명의 일본군을 사살한 전적까지 가지고 있었다.
3.1운동 이후 조직적인 투쟁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일제는 비록 소규모의 전투지만, 상습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하는 홍범도를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다. 이에 일본군은 홍범도 부대의 기습을 막기 위하여 아리요시가 이끄는 한 개 중대를 동원해 월강추격대대(신속기동군)을 편성했다.
두만강을 건너온 신속기동군은 독립군의 행방을 찾을 수 없자 삼둔자 마을에 있던 무고한 한인동포를 대량 학살하고, 재차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진격로를 미리 예측하고 있던 홍범도 부대는 삼둔자 서남방에서 매복작전을 펼쳐 일본군을 모두 궤멸시켰다.
6. 봉오동전투의 전개과정 김성남,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수막새, 2005, 292쪽.
삼둔자 전투에 나갔던 신속기동군이 패배하고 돌아오자 일본 주둔군 제 19사단장은 야스가와 소좌 휘하의 한 개 대대를 증원군으로 급파했다.
일본군은 이 기회에 홍범도 부대의 뿌리를 뽑기로 결심하고 독립군의 본거지를 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에 야스가와와 아리요시는 각각의 병력과 남양 수비대를 합쳐 약 3,400여명의 부대를 이끌고 봉오동으로 출진했다.
일본군의 진격이 시작되자 홍범도는 그들이 국경지대의 지형을 숙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之자 형태의 복잡한 계곡으로 구성되어 있는 봉오동의 지형을 이용하여 매복전을 준비했다.
봉오동에 있는 계곡의 끝에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개활지가 있었다. 비록 이 장소는 폭이 100미터 남짓한 좁은 지역이었으나 적군을 그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전멸시킬수도 있는 완벽한 매복지였다.
홍범도는 독군부부대를 동쪽 산지의 시루봉에 배치하고, 신민단 부대는 남쪽에 배치했으며 자신의 본대는 서쪽을 막아 전열을 가다듬고 전투준비를 마친 후에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1920년 6월 7일 오전 일본군 척후대가 개활지 입구에 그 모습을 드러내자, 홍범도는 유인 소대를 편성하여 습격을 가했다.
일본군 척후대는 황급히 후퇴하여 뒤에 따라오고 있던 본대에 독립군의 위치를 보고했다.
일본군 본대는 그날 점심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