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수원화성과 근대성
1) 수원화성의 개요
2) 근대성
2. 수원화성
1) 배경
2) 축조과정
3) 사용된 재료
4) 화성행궁의 배치
5) 화성행궁의 주요건물
3. 세계 최초의 공사 실명제
4. 벽돌의 도입
1) 배경
2) 화성에서의 벽돌에 의한 새로운 조형
5. 조선후기 목조건축의 변화
1) 다포식 건물의 전형, 팔달문
2) 대표적인 익공식 건물, 화서문
6. 새로운 성곽, 새로운 건축미
1) 화성의 5대 암문
2) 화성의 수문
3) 화성의 각루
4) 화성의 공심돈
5) 화성의 적대
6) 화성의 노대
7) 화성의 포루(砲樓)
8) 화성의 치성
7. 수원성의 근대성
8. 맺음말
9. 출처
1) 수원화성의 개요
2) 근대성
2. 수원화성
1) 배경
2) 축조과정
3) 사용된 재료
4) 화성행궁의 배치
5) 화성행궁의 주요건물
3. 세계 최초의 공사 실명제
4. 벽돌의 도입
1) 배경
2) 화성에서의 벽돌에 의한 새로운 조형
5. 조선후기 목조건축의 변화
1) 다포식 건물의 전형, 팔달문
2) 대표적인 익공식 건물, 화서문
6. 새로운 성곽, 새로운 건축미
1) 화성의 5대 암문
2) 화성의 수문
3) 화성의 각루
4) 화성의 공심돈
5) 화성의 적대
6) 화성의 노대
7) 화성의 포루(砲樓)
8) 화성의 치성
7. 수원성의 근대성
8. 맺음말
9. 출처
본문내용
된 3면에는 여장을 두르고 성벽 정면에는 현안을 두었다. 치성위에 지은 누각을 포루라 하고 또 이와는 약간 다르나 대포를 장비한 것을 포루라 한다. 성벽이 휘어 돌아가는 모퉁이의 돌출부에 세운 누각을 각루 라 한다. 또 성문의 좌우에 배치한 치성으로 성문을 수호하기 위한 것을 적대라 한다.
7. 수원화성과 근대성
화성의 입지는 이전의 다른 도시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그 지세는 팔달산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평탄하고 주변에도 너른 평지가 많아서 장차 도시 성장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18세기 이전까지 조선의 도시에서 이런 조건을 갖춘 곳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큰 도시들은 사방에 산이 둘러싸여 있었고 인근에도 산성을 맞추기에 알맞은 큰 산을 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것은 풍수지리설의 영향으로 군사적으로 유리한 지세를 선택하고자 했던 전통적인 도시관에서 나온 결과였다.
도시 한복판의 가로를 열십자 형태로 낸 경우도 화성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다른 도시의 경우 과거에 열십자형 도로였다 할지라도 억지고 T자형으로 꾸미기도 하였다. 이런 것과 비교해 볼 때, 화성 중심부의 십자가로는 기존의 가로 조성 전통을 뛰어넘는 새로운 것이었다. 여기에 신작로라는 제2가로를 조성해서 부차적인 도로 소통을 꾀한 것도 이전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면모였다. 십자가로가 도심부의 원활한 소통을 대비한 것이라면, 신작로의 건설 계획은 도심부에서부터 도시 외곽까지의 소통을 염두에 둔 도로 계획이었다.
도심을 관통하는 하천 준설 또한 이전과는 다른 것이었다. 종전의 도시가 주로 성안의 물을 밖으로 내보내는 소극적인 수리 관리에 머물렀다면 화성에서는 먼 수원지에서 물을 끌어들여 이를 성안으로 관통시키는 적극적인 수리 정책을 추진하였다. 성곽 주변에 저수지를 건설한 것 역시 이 도시의 안정적인 경제 기반 확보를 염두에 둔 과감한 수리작업이었다. 이러한 점들은 분명히 조선시대의 다른 도시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혁신적인 것이며 화성만이 갖는 도시의 선진성이기도 하였다. 이런 점을 바탕으로 화성은 행정이나 군사, 경제 등 모든 면에서 대도시로 성장할 잠재력을 점차 갖추어 갔다. 또한 행궁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도 화성의 도시 위상을 높이는 데 한몫을 하였다. 왕의 행차는 그 자체로도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왕이 며칠을 머문다는 것은 이 도시가 잠시 동안이지만 도성의 역할을 맡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에 장용외영을 화성에 배치함으로써 군사적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또한 성곽을 갖추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화성의 위상을 더욱 뒷받침 해 주었다.
이처럼 화성은 18세기 다른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선진적인 제반 특성을 지난 계획 신도시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화성을 모든 면에서 시대의 한계를 완벽하게 뛰어넘은 혁신적인 도시라 평가하기는 어렵다. 화성은 어디까지나 왕조 사회의 한계 속에서 조성된 도시였기 때문이다. 화성축성이 시작되던 1794년 정조는 축성의 의의를 이렇게 말했다. “이 역(화성성역)은 기호 요충의 땅을 위해서만도 아니고, 5천 병마의 무리를 위해서만도 아니다. 하나는 선침(현륭원)을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행궁을 위해서이다. 마땅히 민심을 즐겁게 하고, 민력을 가볍게 하는데 힘써야 한다.” 화성의 위상은 이 한마디에서 잘 드러난다. 정조는 성곽을 쌓는 일은 무엇보다 왕실의 무덤을 보호하고 행궁을 지키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즉, 화성은 왕실의 도시인 셈이다. 또한 정조는 강력한 왕권이 신하들 위에 군림하던 중국 한나라를 왕조 통치의 이상으로 삼았던 듯, 화성 건설 과정에는 이런 한나라에 관한 글이 종종 보인다. 성곽 정문을 장안문으로 하고 행궁 정문을 신풍루로 지은 것도 모두 한나라와 관련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도시 화성의 건설에는 강력한 군주가 다스리는 왕조 사회에 대한 정조의 꿈과 이상이 강하게 드리워져 있었다고 생각된다.
어떤 면에서 화성은 철저히 왕조 사회의 틀 안에서 건설된 신도시였다. 이 도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의사 결정권은 왕 한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정조는 도시 건설의 처음 입안자인 동시에 최종 결정자였다. 구 수원읍의 주민을 이전시키고 여기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쌓는 모든 일을 불과 6,7년 만에 끝마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왕 정조가 화성의 도시건설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런 구조에서는 왕 한사람에게 어떤 일이 발생하면 도시 건서 전체에 치명적인 결함이 생기기 마련이다. 1800년 성곽 건설 후 불과 4년이 지난 그 해 여름에 정조는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왕의 죽음으로 인해 대도시로의 성장을 약속받은 듯했던 화성의 번영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왕조시대의 도시 화성은 여기서 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8. 맺음말
화성은 조선의 꽃이요, 우리나라 성곽의 꽃이다. 그러나 꽃이 아무리 아름답고 향기가 그윽해도 제대로 가꾸고 보살피지 않으면 시들거나 죽어버린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은 그래서 자명해진다. 이 아름다운 화성을 어떻게 가꾸고 지킬 것인가. 화성에 서려 있는 소중한 정신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교훈으로 만들 것인가. 화성을 건설한 사람들도 훌륭했지만 그것을 잘 지키고 가꾼 오늘날의 우리들도 훌륭했다고, 이백년 후의 후손들이 우리를 평가할 수 있도록 무거운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앞으로도 꾸준히 보존과 함께 도시의 내부를 가꾸어 나가는 데 지혜와 노력을 모은다면, 200년 전 정조가 건설한 계획 신도시 화성은 앞으로도 우리의 소중한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더 많은 노력을 통해 수원의 옛 모습을 보존하고, 정조가 세우고자 했던 신도시 화성의 정신을 알리는데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수원 성곽뿐만 아니라 수원 화성 신도시 자체가 우리의 역사적 가치를 내재한 좋은 문화재로 인정받고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다.
9. 출처
유봉학, 꿈의 문화유산 화성, 신구문화사, 1996
김동운, 실학 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 돌베게, 2002
수원시, 수원 화성행궁, 수원시, 2003
김동욱, 화성 축성에서 본 18세기 건설기술, 대한토목학회
7. 수원화성과 근대성
화성의 입지는 이전의 다른 도시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그 지세는 팔달산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평탄하고 주변에도 너른 평지가 많아서 장차 도시 성장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18세기 이전까지 조선의 도시에서 이런 조건을 갖춘 곳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큰 도시들은 사방에 산이 둘러싸여 있었고 인근에도 산성을 맞추기에 알맞은 큰 산을 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것은 풍수지리설의 영향으로 군사적으로 유리한 지세를 선택하고자 했던 전통적인 도시관에서 나온 결과였다.
도시 한복판의 가로를 열십자 형태로 낸 경우도 화성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다른 도시의 경우 과거에 열십자형 도로였다 할지라도 억지고 T자형으로 꾸미기도 하였다. 이런 것과 비교해 볼 때, 화성 중심부의 십자가로는 기존의 가로 조성 전통을 뛰어넘는 새로운 것이었다. 여기에 신작로라는 제2가로를 조성해서 부차적인 도로 소통을 꾀한 것도 이전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면모였다. 십자가로가 도심부의 원활한 소통을 대비한 것이라면, 신작로의 건설 계획은 도심부에서부터 도시 외곽까지의 소통을 염두에 둔 도로 계획이었다.
도심을 관통하는 하천 준설 또한 이전과는 다른 것이었다. 종전의 도시가 주로 성안의 물을 밖으로 내보내는 소극적인 수리 관리에 머물렀다면 화성에서는 먼 수원지에서 물을 끌어들여 이를 성안으로 관통시키는 적극적인 수리 정책을 추진하였다. 성곽 주변에 저수지를 건설한 것 역시 이 도시의 안정적인 경제 기반 확보를 염두에 둔 과감한 수리작업이었다. 이러한 점들은 분명히 조선시대의 다른 도시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혁신적인 것이며 화성만이 갖는 도시의 선진성이기도 하였다. 이런 점을 바탕으로 화성은 행정이나 군사, 경제 등 모든 면에서 대도시로 성장할 잠재력을 점차 갖추어 갔다. 또한 행궁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도 화성의 도시 위상을 높이는 데 한몫을 하였다. 왕의 행차는 그 자체로도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왕이 며칠을 머문다는 것은 이 도시가 잠시 동안이지만 도성의 역할을 맡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에 장용외영을 화성에 배치함으로써 군사적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또한 성곽을 갖추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화성의 위상을 더욱 뒷받침 해 주었다.
이처럼 화성은 18세기 다른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선진적인 제반 특성을 지난 계획 신도시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화성을 모든 면에서 시대의 한계를 완벽하게 뛰어넘은 혁신적인 도시라 평가하기는 어렵다. 화성은 어디까지나 왕조 사회의 한계 속에서 조성된 도시였기 때문이다. 화성축성이 시작되던 1794년 정조는 축성의 의의를 이렇게 말했다. “이 역(화성성역)은 기호 요충의 땅을 위해서만도 아니고, 5천 병마의 무리를 위해서만도 아니다. 하나는 선침(현륭원)을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행궁을 위해서이다. 마땅히 민심을 즐겁게 하고, 민력을 가볍게 하는데 힘써야 한다.” 화성의 위상은 이 한마디에서 잘 드러난다. 정조는 성곽을 쌓는 일은 무엇보다 왕실의 무덤을 보호하고 행궁을 지키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즉, 화성은 왕실의 도시인 셈이다. 또한 정조는 강력한 왕권이 신하들 위에 군림하던 중국 한나라를 왕조 통치의 이상으로 삼았던 듯, 화성 건설 과정에는 이런 한나라에 관한 글이 종종 보인다. 성곽 정문을 장안문으로 하고 행궁 정문을 신풍루로 지은 것도 모두 한나라와 관련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도시 화성의 건설에는 강력한 군주가 다스리는 왕조 사회에 대한 정조의 꿈과 이상이 강하게 드리워져 있었다고 생각된다.
어떤 면에서 화성은 철저히 왕조 사회의 틀 안에서 건설된 신도시였다. 이 도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의사 결정권은 왕 한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정조는 도시 건설의 처음 입안자인 동시에 최종 결정자였다. 구 수원읍의 주민을 이전시키고 여기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쌓는 모든 일을 불과 6,7년 만에 끝마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왕 정조가 화성의 도시건설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런 구조에서는 왕 한사람에게 어떤 일이 발생하면 도시 건서 전체에 치명적인 결함이 생기기 마련이다. 1800년 성곽 건설 후 불과 4년이 지난 그 해 여름에 정조는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왕의 죽음으로 인해 대도시로의 성장을 약속받은 듯했던 화성의 번영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왕조시대의 도시 화성은 여기서 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8. 맺음말
화성은 조선의 꽃이요, 우리나라 성곽의 꽃이다. 그러나 꽃이 아무리 아름답고 향기가 그윽해도 제대로 가꾸고 보살피지 않으면 시들거나 죽어버린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은 그래서 자명해진다. 이 아름다운 화성을 어떻게 가꾸고 지킬 것인가. 화성에 서려 있는 소중한 정신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교훈으로 만들 것인가. 화성을 건설한 사람들도 훌륭했지만 그것을 잘 지키고 가꾼 오늘날의 우리들도 훌륭했다고, 이백년 후의 후손들이 우리를 평가할 수 있도록 무거운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앞으로도 꾸준히 보존과 함께 도시의 내부를 가꾸어 나가는 데 지혜와 노력을 모은다면, 200년 전 정조가 건설한 계획 신도시 화성은 앞으로도 우리의 소중한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더 많은 노력을 통해 수원의 옛 모습을 보존하고, 정조가 세우고자 했던 신도시 화성의 정신을 알리는데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수원 성곽뿐만 아니라 수원 화성 신도시 자체가 우리의 역사적 가치를 내재한 좋은 문화재로 인정받고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다.
9. 출처
유봉학, 꿈의 문화유산 화성, 신구문화사, 1996
김동운, 실학 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 돌베게, 2002
수원시, 수원 화성행궁, 수원시, 2003
김동욱, 화성 축성에서 본 18세기 건설기술, 대한토목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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