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영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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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영화사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남미 영화사
1. 식민지 초기
2. 토착 영화
3. 유성영화
4. 남미의 뉴 시네마 운동
- 브라질 시네마노보 운동
- 쿠바 영화협회
- 아르헨티나 해방영화
5. 남미영화의 다양성(1980년대)

Ⅲ. 결론: 남미 영화와 사회

본문내용

. 영화는 처음에 관객으로 하여금 세르히오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든다. 비록 그가 관습적이고 부르주아적이라 해도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관객은 세르히오가 가지고 있는 비전뿐만 아니라 현실의 비전을 깨닫게 된다. 다큐멘터리의 기법을 사용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실이 자신을 압도해 오기 때문에 주인공은 자신을 점점 파괴한다. 그는 행동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영화의 결말부에 이르면 주인공은 자신의 공포와 무기력 때문에 바퀴벌레 같은 인간이 되어 버린다. 왜 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다시 영화를 보지 않으면 안 되게끔 강제하는가? 관객은 덫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과 주인공을 동일시했는데, 그 주인공이 결국에는 자신을 파괴하고 하잘 것 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다. \'왜 나는 세르히오에게 공감했을까?\' 관객은 자신에 대해 심사숙고하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세르히오에게 공감을 느꼈던 자신의 가치 체계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
③ 뉴 라틴아메리카 영화의 선구자 \"에스피노사\"
홀리오 가르시아 에스피노사 : 감독. 1926년 쿠바 아바나에서 출생. 1950년대에 로마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그 당시 이탈리아어로 시집을 출간했다. 쿠바로 돌아온 후 1954년 알레아와 공동 연출로 <탄광 노동자>를 만들었다. 이 영화 때문에 바티스타 정권하에서 투옥되기도 했으며, 혁명 후 뉴 라틴 아메리카 영화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불릴 정도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ICAIC의 위원장으로 활약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성공한 <후안 낀낀의 모험 Las Aventuras de Juan Quin Quin>(1967)과 <오 나의 아들 Son o no Son>(1977)외에도 1994년 작품인 <여왕과 왕 Reina y Rey>가 있다.
홀리오 가르시아 에스피노사(Julio Garcia Espinosa)는 브라질의 시네마 노보의 효시인 <리우 40도>와 거의 같은 시기인 1954년에 알레아와 함께 <탄광 노동자 El Megano>를 만들었다. 에스피노사가 이탈리아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귀국한 지 1년 후였다. 그는 바티스타의 독재 시대에 쿠바로 돌아왔고,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을 쿠바에 도입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탄광 노동자>는 아바나 남부 노동자의 생활을 표현한 소박한 사실주의 영화였다. 영화는 단 두 번 상영되었을 뿐 다시 바티스타 정권에 의해 압수되었고, 공동 감독인 에스피노사와 알레아는 수감되었다.
<탄광 노동자> 1954년작. 감독 에스피노사알레아. 16밀리 다큐멘터리 단편영화로 이 영화의 스태프는 영화가 완성되자마자 정치영화라는 이유로 바티스타 경찰에 체포되었고 영화는 상영금지 당했다.
④ 게릴라 출신의 영화 감독 \"움베르토 솔라스\"
움베르트 솔라스 : 1942-, 감독. 소년 시절 호세 마르티(Jose Marti)의 영향을 받아 게릴라에 가입했으며, 열일곱 살에 ICAIC의 창립 당시부터 참여했다. 극영화 데뷔작은 <마누엘라>(1966)이며, 3부작 <루시아>(1968)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칠레 칸타타>(1975)는 칠레 아옌데 정부의 성공과 좌절을 그린 영화로, 그의 칠레 민중에 대한 애정을 담은 영화다. 19세기 쿠바의 대표적인 문학 작품을 영화화한 <세실리아 Cecilia>(1982)역시 국내외의 호평을 받았다.
움베르토 솔라스는 ICAIC가 설립되던 해인 1959년에 이 기구에 참여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그의 초기 작품은 실험적이면서도 난해했다. 1966년 작품인 <마누엘라 Manuela>만이 2년 후면 드러날 거장의 풍모를 엿보게 한다. 3부작 <루시아 Lucia>(1968) 는 세 가지 다른 스타일을 배치한 안목과 독립적인 이야기 전개 방식의 변증법적인 복잡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1974년 작품인 <심파렐레 Simparele>와 <칠레 칸타타 Cantata de Chile>(1975)에서 솔라스는 다양한 대중 문화의 방식을 영화 속에 통합시키기 위해 회화적인 묘사와 무용의 기법 그리고 세밀한 원근법과 실험적인 조명 방식을 쓰고 있다.
첫 번째 루시아는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사라진 지주 계급에 대한 고찰이다. 1933년도의 두 번째 루시아는 도시 쁘띠 부르주아에 대한 이야기다. 1930년대의 봉기와 사회 변혁은 완전히 실패였음이 드러났다. 이는 국민 정서에 심한 타격을 주었고 역사에 대한 비관주의를 초래하기까지 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루시아가 카메라를 응시하는 것은 1930년대를 지배했던 감정에 대한 명백한 상징이다. 그 감정은 노력했으나 실패한 집단의 절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새 생명을 잉태하고 있지 않은가. 그 희망이 1960년대를 낳았다.
1960년대 루시아는 혁명의 초기 단계의 인물이다. 그녀는 농민인데, 그것은 혁명의 봉기가 기본적으로 농촌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자유로운 영화다. 1930년대의 쁘띠 부르주아의 프로젝트를 질책하는 것도 아니며, 1960년대 농촌 처녀에게 가부장적인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편협한 미학과 사고의 체제나 코드에서 벗어나려는 아방가르드적 시도였다.
- 아르헨티나 해방영화운동
1957년 영화법이 통과되고 영화예산과 배급 등을 담당하는 국립영화소(INC, Instituto Nacional de Cinematografia)가 창설되었다. 국립영화소의 지원을 받아 레오폴도 또레 닐슨(Leopoldo Torre Nilsson)은 <천사의 집>과 <함정 속의 손>을 제작하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페르란도 아얄라(Fernando Ayala)와 엑또르 올리베이라(Hector Oliviera)는 \'아리에\'(Aries)상을 창시하였다. 이들과 소위 \'60년도 세대\'란 그룹은 비싼 비용과 비효율적인 스튜디오시스템을 멀리하였다. 이 시기에 뛰어난 작품들로서는 시몬 펠만(Simon Felman)의 <거래>, 마르띠네스 수아레스(Martinez Suarez)의 <맞서서(Dar la cara)>, 보르헤스의 소설을 각색한 레네 무히까(Rene Mugica)의 <장미빛 모퉁이의 사내>, 라우따로 무루아(Lautaro Murua)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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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3.13
  • 저작시기2014.3
  • 파일형식한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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