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시대개관
Ⅱ. 1910년대의 시
1. 1910년대 시문학의 양상
2. 신체시의 과도기적 성격
1) 최남선과 신체시의 의의와 한계
2) 춘원과 그 밖의 시인들
(1) 춘원(春園) 이광수
(2) 소성(小星) 현상윤
(3)소월(素月) 최승구
(4)유암(流暗) 김여제
3) 김억과 『태서문예신보』의 시인들
Ⅲ. 1910년대의 소설
1. 소설의 전대(前代)문학과의 관계
2. 1910년대 소설의 양상
1) 부르주아 계몽주의자의 허위의식과 이광수의 소설
(1) 이광수 소설에 대한 이해
(2)「무정」을 통해 보는 이광수 소설의 한계점
2) 부르주아 계몽주의자의 자기인식과 비관주의적 단편소설
3) 국외의 항일투쟁과 신채호의 소설
4) 창조파 등장과 순수문예 선언
◎ 생각해볼 문제
Ⅱ. 1910년대의 시
1. 1910년대 시문학의 양상
2. 신체시의 과도기적 성격
1) 최남선과 신체시의 의의와 한계
2) 춘원과 그 밖의 시인들
(1) 춘원(春園) 이광수
(2) 소성(小星) 현상윤
(3)소월(素月) 최승구
(4)유암(流暗) 김여제
3) 김억과 『태서문예신보』의 시인들
Ⅲ. 1910년대의 소설
1. 소설의 전대(前代)문학과의 관계
2. 1910년대 소설의 양상
1) 부르주아 계몽주의자의 허위의식과 이광수의 소설
(1) 이광수 소설에 대한 이해
(2)「무정」을 통해 보는 이광수 소설의 한계점
2) 부르주아 계몽주의자의 자기인식과 비관주의적 단편소설
3) 국외의 항일투쟁과 신채호의 소설
4) 창조파 등장과 순수문예 선언
◎ 생각해볼 문제
본문내용
‘한국 詩歌史上 혁명적인 의의’를 지닌 것으로 보면서도 각 연 대응 행끼리의 정형적 자수율 때문에 ‘반율문적(半律文的)’(즉 반정형적)인 것으로 보아 ‘형태상의 불안정성’을 말하고 있다. 또 김춘수 교수도 이러한 현상에 대해 ‘기형적인 자유시 내지 준자유시’로 보면서, “심리적으로는 퍽 불안항 형태라 할 수 있겠고, 역사적으로는 진보적인 형태”라고 하여 과도기 시 형식으로서의 약점과 역사적인 진보성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 이 경우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형태란 신체시 형식의 근대로의 근접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새로운 면모로 구어체와 의성어의 사용을 들 수 있겠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시는 그 이전의 개화가사나 창가보다 구어체 어휘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속도감을 수반한 문체 역시 간과될 일이 아니다. 또 하나 신체시에는 행과 연에 대한 인식의 자취와 함께 구두점의 사용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본래 구두점의 사용은 작품의 형태, 특히 운율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닌다. 구두점은 시작에 사용될 때 의미의 단락과 단락 사이에 쓰이면서 그 한계를 명시하는 역할을 한다. 아울러 다음 단란과 연결, 호흡 조정 문제까지를 담당해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체시의 구두점 사용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일 역시 간과될 일은 아니다. 그 역시 이 유형에 속하는 작품들의 근대적 성향이라고 보아야겠다.
그러나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의 신체시의 새로움은 근대 자유시로의 발전에 직결되기에는 또한 많은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그 한계는 시대의식과 형식에 모두 해당된다. 새로운 세대에 의해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새로운 사상이 도입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 시만큼 강하게 상징하여 드러낸 시가는 일찍이 없었으나 1905년에 이미 실질적 외교권이 상실된 시대적 상황을 생각한다면, 맹목의 계몽주의를 이처럼 잘 보여주는 것 또한 없다 하겠다. 자유, 평동 등의 관념이 객관적 현실 속에서 개성적으로 표현되지 못하고 기성화되고 당위적인 감정에 압도되고 있는 것이다.
그 형식에 있어서도 새로운 형태를 탄생시킨 것이기는 하나 모처럼 채용한 구어(口語) 시문체(詩文)가 지닌 스스로운 리듬과 자수율에의 집착, 이 이율적(二律的)인 모습을 타개하기에는 육당의 시적 미의식과 그 리듬 의식이 너무 허약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새로운 시 형식을 위한 어떠한 미적 노력도 생각하기 어려웠던 시기에, 또 단 한 명의 전문시인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에, 육당은 매우 의식적으로 새로운 시에 대한 형식 시험을 시도했던 것이다. 최남선은 자신이 부정하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전문적인 시인이었고 새로운 시를 위한 근대적인 형식 시험은 최남선의 신체시 이후부터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신체시가 근대 자유시 형성의 유일한 동기라고 할 수 없지만 매우 중요한 계기와 시금석의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임은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2) 춘원과 그 밖의 시인들
주로 육당과 춘원으로 대표되는 1910년대의 시단에는 사실 그들 이외에도 소성(小星) 현상윤, 소월(素月) 최승구 유암(流暗) 김여제 등 많은 시인들이 『소년』『청춘』뿐만이 아니라 『학지광』『신문계(新文界)』등의 여러 잡지에 다양한 형식의 시를 발표했다.
(1) 춘원(春園) 이광수
춘원은 최남선과 더불어 『태서문예신보』이전까지의 시단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大韓興學報』9호(1901.1)에 「獄中豪傑」을 발표하면서 시작(詩作)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 때 그는 고주(孤舟) 혹은 외배 등의 필명을 사용했다. 그 후 『소년』『새별』『학지광』『청춘』『여자계』등에 「곰」「우리영웅(英雄)」「님나신 날」「말듣거라」「새 아이」「내 소원」「생활난」「벗」「침묵의 미」「극웅행(極熊行)」「어머니의 무릎」등을 발표하게 된다. 그의 작품 수는 많지 않으나 육당과 마찬가지로 신체시 뿐만 아니라 시조언문풍월가사 등 전통적인 형식을 적절하게 변용하기도 하면서 다양한 형식의 시를 창작했다.
이 시기에 그의 시는 계몽적인 관념성이라는 측면에서 대체로 그 지향하는 바가 최남선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형식이 육당의 신체시보다 자유스럽고 그 형상성에 있어서 더 세련된 측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육당보다 한 걸음 나아갔다고 할 수 있겠다.
춘원은 우리의 전통적인 시 형식에 기대면서도 다양한 형식 시험을 통해 정형의 틀을 깨트리고자 노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것에 기댄 만큼 그의 형식에 대한 시험은 더 과감한 실험성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계몽적 목적성을 실현하는 한계 내에 머물다가 그 계몽성을 더 적극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소설로 나아간다.
(2) 소성(小星) 현상윤
소성 현상윤이 활동한 기간은 동경 유학생이었던 1910년대 중.후반으로 한정되나, 한국 근대문학이 형성되는 1910년대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담당하고 있다.
현상윤은 핍박받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과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을 시의 주제로 표현하였는데, 그의 시 「실낙원」 『소성의 만필 제5』.
에서는 고구려와 통일신라 시대를 \'낙원\'에,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의 현실을 \'낙원 상실\'에 비유하여, 찬란한 과거의 역사와 대비한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을 선명하게 부각시켜놓고 있다.
그는 우리 나라가 일제의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힘을 기를것, 다시 말하자면 \"강력주의\"를 주장하였고, 이는 그의 시 「산아희로 생겨나서」『청춘』 제6호, 1915.3, p.86.
에 그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즉, 사나이라면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옳음과 진리를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함을 강조하여 사나이의 힘찬 기상과 역사적 소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그의 시에서 예전의 영예로운 시대를 \'낙원\'으로 이상화시키고 있는 점, 식민지의 현실을 전지전능한 사랑의 \'님\'에게 호소하며 벗어나고자 하는 태도 등에세는 현상윤의 이상주의적 시의 경향 또한 볼 수 있다.
(3)소월(素月) 최승구
계몽적 이상을 노래하고 개인의 폐쇄적 내면의 갈등을 호소하는 데 집착했던 1910년대의 대부분의 시인들과 달리 최승구는 제국주의의 폭력성을 시의 제제로 삼고 문학적으로 대응하였다.
둘째로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새로운 면모로 구어체와 의성어의 사용을 들 수 있겠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시는 그 이전의 개화가사나 창가보다 구어체 어휘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속도감을 수반한 문체 역시 간과될 일이 아니다. 또 하나 신체시에는 행과 연에 대한 인식의 자취와 함께 구두점의 사용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본래 구두점의 사용은 작품의 형태, 특히 운율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닌다. 구두점은 시작에 사용될 때 의미의 단락과 단락 사이에 쓰이면서 그 한계를 명시하는 역할을 한다. 아울러 다음 단란과 연결, 호흡 조정 문제까지를 담당해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체시의 구두점 사용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일 역시 간과될 일은 아니다. 그 역시 이 유형에 속하는 작품들의 근대적 성향이라고 보아야겠다.
그러나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의 신체시의 새로움은 근대 자유시로의 발전에 직결되기에는 또한 많은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그 한계는 시대의식과 형식에 모두 해당된다. 새로운 세대에 의해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새로운 사상이 도입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 시만큼 강하게 상징하여 드러낸 시가는 일찍이 없었으나 1905년에 이미 실질적 외교권이 상실된 시대적 상황을 생각한다면, 맹목의 계몽주의를 이처럼 잘 보여주는 것 또한 없다 하겠다. 자유, 평동 등의 관념이 객관적 현실 속에서 개성적으로 표현되지 못하고 기성화되고 당위적인 감정에 압도되고 있는 것이다.
그 형식에 있어서도 새로운 형태를 탄생시킨 것이기는 하나 모처럼 채용한 구어(口語) 시문체(詩文)가 지닌 스스로운 리듬과 자수율에의 집착, 이 이율적(二律的)인 모습을 타개하기에는 육당의 시적 미의식과 그 리듬 의식이 너무 허약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새로운 시 형식을 위한 어떠한 미적 노력도 생각하기 어려웠던 시기에, 또 단 한 명의 전문시인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에, 육당은 매우 의식적으로 새로운 시에 대한 형식 시험을 시도했던 것이다. 최남선은 자신이 부정하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전문적인 시인이었고 새로운 시를 위한 근대적인 형식 시험은 최남선의 신체시 이후부터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신체시가 근대 자유시 형성의 유일한 동기라고 할 수 없지만 매우 중요한 계기와 시금석의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임은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2) 춘원과 그 밖의 시인들
주로 육당과 춘원으로 대표되는 1910년대의 시단에는 사실 그들 이외에도 소성(小星) 현상윤, 소월(素月) 최승구 유암(流暗) 김여제 등 많은 시인들이 『소년』『청춘』뿐만이 아니라 『학지광』『신문계(新文界)』등의 여러 잡지에 다양한 형식의 시를 발표했다.
(1) 춘원(春園) 이광수
춘원은 최남선과 더불어 『태서문예신보』이전까지의 시단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大韓興學報』9호(1901.1)에 「獄中豪傑」을 발표하면서 시작(詩作)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 때 그는 고주(孤舟) 혹은 외배 등의 필명을 사용했다. 그 후 『소년』『새별』『학지광』『청춘』『여자계』등에 「곰」「우리영웅(英雄)」「님나신 날」「말듣거라」「새 아이」「내 소원」「생활난」「벗」「침묵의 미」「극웅행(極熊行)」「어머니의 무릎」등을 발표하게 된다. 그의 작품 수는 많지 않으나 육당과 마찬가지로 신체시 뿐만 아니라 시조언문풍월가사 등 전통적인 형식을 적절하게 변용하기도 하면서 다양한 형식의 시를 창작했다.
이 시기에 그의 시는 계몽적인 관념성이라는 측면에서 대체로 그 지향하는 바가 최남선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형식이 육당의 신체시보다 자유스럽고 그 형상성에 있어서 더 세련된 측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육당보다 한 걸음 나아갔다고 할 수 있겠다.
춘원은 우리의 전통적인 시 형식에 기대면서도 다양한 형식 시험을 통해 정형의 틀을 깨트리고자 노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것에 기댄 만큼 그의 형식에 대한 시험은 더 과감한 실험성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계몽적 목적성을 실현하는 한계 내에 머물다가 그 계몽성을 더 적극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소설로 나아간다.
(2) 소성(小星) 현상윤
소성 현상윤이 활동한 기간은 동경 유학생이었던 1910년대 중.후반으로 한정되나, 한국 근대문학이 형성되는 1910년대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담당하고 있다.
현상윤은 핍박받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과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을 시의 주제로 표현하였는데, 그의 시 「실낙원」 『소성의 만필 제5』.
에서는 고구려와 통일신라 시대를 \'낙원\'에,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의 현실을 \'낙원 상실\'에 비유하여, 찬란한 과거의 역사와 대비한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을 선명하게 부각시켜놓고 있다.
그는 우리 나라가 일제의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힘을 기를것, 다시 말하자면 \"강력주의\"를 주장하였고, 이는 그의 시 「산아희로 생겨나서」『청춘』 제6호, 1915.3, p.86.
에 그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즉, 사나이라면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옳음과 진리를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함을 강조하여 사나이의 힘찬 기상과 역사적 소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그의 시에서 예전의 영예로운 시대를 \'낙원\'으로 이상화시키고 있는 점, 식민지의 현실을 전지전능한 사랑의 \'님\'에게 호소하며 벗어나고자 하는 태도 등에세는 현상윤의 이상주의적 시의 경향 또한 볼 수 있다.
(3)소월(素月) 최승구
계몽적 이상을 노래하고 개인의 폐쇄적 내면의 갈등을 호소하는 데 집착했던 1910년대의 대부분의 시인들과 달리 최승구는 제국주의의 폭력성을 시의 제제로 삼고 문학적으로 대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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