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이해 1학년 C형] 한글의 창제에 대해 간략히 기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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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언어의 이해 1학년 C형] 한글의 창제에 대해 간략히 기술하시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방통대 국어국문학과 1학년 언어의 이해 C형] 한글의 창제에 대해 간략히 기술하시오.

<목 차>

Ⅰ. 들어가며

Ⅱ. 우리나라 문자 한글(훈민정음)
1. 훈민정음 창제 이전
2. 훈민정음의 창제
1) 훈민정음이란?
2) 훈민정음 창제의 동기와 목적
3)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반대
(1) 훈민정음 반대 상소
(2) 세종의 훈민정음 반대상소 반박
4) 훈민정음의 반포
5) 훈민정음의 우수성
(1) 훈민정음의 기발한 발상과 디자인
(2) 훈민정음의 조직성
(3) 경이로운 모음체계
(4)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표음문자
(5) 훈민정음의 모아쓰기
3. 한글의 명칭 변천
1) 훈민정음(訓民正音)
2) 언문(諺文)
3) 반절(反切)
4) 국문(國文)
5) 한글

Ⅲ. 나가며


<참고문헌>

본문내용

단이자 도구이다. 인간은 집단생활과 노동과정을 통해 얻은 지식과 기술을 상호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언어가 생성, 발전해 왔다.
우리말의 기원을 밝히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우리민족은 몽고, 만주, 터키 등의 여러 종족과 같은 우랄 알타이어족에 속한다. 그 후 중앙아시아에서 동쪽으로 옮겨 온 우리민족의 일부는 만주에 정착하였고 이때의 말이 부여어, 그 중 일부가 남쪽으로 내려와 만들어 진 말을 한어, 북쪽에 자리 잡고 있던 부여족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고구려어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고구려, 백제를 쳐 삼국을 통일한 후 신라의 말이 중심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라시대에 와서 이두문자로 쓴 기록이 남아있는데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다가 만든 이두는 원효대사의 아들인 설총이 처음 지어 썼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한자(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고구려 초기)와 함께 활용되었다.
2. 훈민정음의 창제
1) 훈민정음이란?
훈민정음예의본과 글자를 지은 뜻과 사용법 등을 풀이한 훈민정음해례본이 있다.
전자에 대해서는 세종실록과 월인석보 첫 권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어 널리 알려졌으나 후자에 대하여는 1940년 발견될 때까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한글의 형체에 대하여 고대글자 모방설, 고전 기원설, 범자 기원설, 몽골문자 기원설, 심지어는 창살 모양의 기원설까지 나올 정도로 구구한 억설이 있었으나 이 책의 출현으로 모두 일소되고 발음기관 상형설이 제자원리였음이 밝혀졌다. 후자는 예의·해례·정인지 서문 등 3부분 33장으로 되었는데 예의는 세종이 직접 지었고 해례는 정인지,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최항,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 집현전 학사가 집필하였다. 정인지가 대표로 쓴 서문에는 1446년 9월 상순으로 발간 일을 명시하고 있어 후일 한글날 제정의 바탕이 되었다.
2) 훈민정음 창제의 동기와 목적
훈민정음의 창제 동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세종대왕은 그것을 훈민정음에서 몸소 언급했는데 그 내용을 보자면,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 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予 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엾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쉬이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훈민정음 서문 풀이>
이러하다. 이 글을 통해 세종대왕의 생각을 읽어보자. 일단,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배달말이라 불리는 말을 쓰고 있었다. 한문은 이 배달말을 표현해내기에 맞지 않은 점이 많았다. 게다가 우리의 말을 다른 나라의 글자를 빌려 쓰는 점을 세종대왕은 안타깝게 여겼으며, 한문은 일반인이 배우기에 너무나 어려웠다. 때문에 글자를 깨치지 못한 일반인들은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 뜻을 알릴 수 없었다. 말을 전할 수 없으니 그에 따른 억울함이 오죽했으랴. 이러한 여러 상황을 통찰하고 세종대왕은 모든 백성들이 글을 쉽게 익혀 일상생활에 편히 쓰도록 하여 민중 문화의 보급과 생활의 향상을 꾀함에 그 목적이 있었다.
이와 다른 창제의 동기나 목적을 세종은 실제 생활에서 언급하기도 했는데,
“모름지기 세민(細民)으로 하여금 금법(禁法)을 알게 하여 두려워서 피하게 함이 옳겠다.” (14/11/07 임술)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 효자 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26/02/20 경자)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 (28/09/29 갑오)
라고 하며 글을 알아서 백성들이 법을 잘 알지 못해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하려했고, 훈민정음 창제가 사회기풍과 풍속의 변화에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백성들의 의사소통과 그 편리함에 대해 훈민정음이 큰 도움이 되리라 믿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3)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반대
우리가 알기로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과 뜻이 맞아 오랜 세월 노력 끝에 만들어진 것이라 했다. 헌데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 103 26/02/20 경자에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긴 상소를 통해 반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달리 집현전 학자들을 비롯한 여러 지식인들이 세종대왕과 뜻이 달랐던 것이다.
(1) 훈민정음 반대 상소
그 내용을 몇 가지 간추리자면 이러하다.
1. 우리 조선은 조종(임금의 시조)서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으로 대국(중국)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따랐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함의 때를 당하여, 언문을 만듦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은 것이고, 새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모양이 비록 옛 전자를 본받았다 할지라도, 소리를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이 모두 옛것에 반대되니, 사실에 근거하는 바 없습니다. 만약, 중국에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어찌 중국을 섬기고, 중국 문물이나 사상을 우러러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으리까?
1. 예로부터 구주(중국의 모든 국토)의 안에 풍토가 비록 다르오나 사투리에 따라 따로 글자를 만드는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골, 서하, 여진, 일본, 서번의 무리가 각각 제 글자가 있으나, 이는 모두 오랑캐의 일이라,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전해오는 말에 하(중국)로써 오랑캐를 변하게 한다 하였지, 오랑캐가 변하게 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나이다. 역대의 중국이 모두 우리나라를 기자의 유풍(전해오는 풍속)이 있어, 문물과 예악이 중화와 비긴다 하였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듦은 중화를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는 것이 옵니다. 이는 이른바 소합의 향(소아시아에서 나는 소합향 나무의 껍질에서 얻은 향료)을 버리고 말똥구리의 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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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5.09.14
  • 저작시기2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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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981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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