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신장 위구르. 타이완과 중국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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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티베트.신장 위구르. 타이완과 중국의 관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중국과 티베트 문제
1) 티베트 문제의 전망
2) 티베트 문제의 현주소
3) ‘실질적 진전이 없는 협상은 중단한다’
4) 강경 노선의 선회 가능성
5) 티베트의 영원한 지도자 달라이 라마
2, 중국과 위구르 신장과의 관계
1) 연원 깊은 서역의 땅, 신장의 독립의 꿈
2) 민족적 박탈감과 차별로 촉발된 봉기
3) 이슬람과 ‘돌궐족의 역사’에 뿌리를 둔 위구르 독립 운동
4) 해마다 터져 나오는 독립에의 외침
5) 위구르인의 대모 레비야 카디르
3. 중국과 타이완
1) 타이완, 중국이 세계 패권국으로 가는 시금석
2) 불통, 부독이 정책
3) 여론의 대세는 현상 유지


Ⅲ. 맺는말

본문내용

일 중국 정부와 티베트 대표는 총 17조로 이뤄진 <티베트의 평화적 해방 방법에 관한 중앙인민정부와 티베트 지방정부의 협약>에 서명하였다. 이 협약의 요지는 티베트의 제도와 생활방식을 존중하는 전제 하에 중국 해방군이 티베트에 진주하여 서남 변경지역을 보위한다는 것이었다. 이 해 9월 9일, 중국의 3천여 해방군이 리사에 진주하고 티베트의 다른 지역에도 2만여 명의 해방군이 진주함으로써 완전히 티베트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8년에 이르러 중국 정부는 우선 티베트 정부 관할 밖에 있는 쓰촨과 칭하이성의 티베트인 거주 지역에 인민공사제도, 즉 ‘대약진 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는 현지 티베트인들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 일으켜 곳곳에서 격렬한 충돌이 발생하였다. 1959년 이 무장 폭동은 티베트의 라싸까지 확산되었고, 중국 정부는 모택동의 지시하에 해방군이 무자비하게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중국 정부는 3월 28일 티베트 지방의 정교합일 정부 해산 명령을 내렸다. 결국 달라이 라마와 10만 여 티베트 인들은 인도와 네팔 등지로 망명하였고, 이어 인도에 망명정부를 세웠다. 그리고 1959년 6월 20일, 달라이 라마는 ‘17조 협약’이 불승인을 선포하고, 이 17조협약이 티베트 정부와 티베트 국민들이 무력의 협박 아래 체결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를 떠난 이후 티베트에서는 판첸 및 일부의 세속 종교 귀족들이 중국 정부와 협력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판첸은 사실상 베이징 당국의 티베트 통치에 있어서의 꼭두각시로 간주되고 있다.
1980년 대 들어 그간 줄곧 티베트 독립을 주자하던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실질적 자치’요구로 그 태도를 변화시켰고, 천안문 사태 직후 한때 다시 독립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1997년 이후 자신이 요구하는 바가 실질적인 자치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특히 최근에는 홍콩이나 마카오 방식의 ‘일국 양제’의 형식에 의한 티베트의 자치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의 핵심적 요구 중 하나가 바로 중국 군대의 철수이고, 이에 대하여 중국 정부는 역사적으로 일찍이 중화민국이 강력한 군대를 티베트에 주둔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중국의 티베트에 대한 주권이 도전받는 틈을 제공했다고 지적하면서 강력한 군대의 주둔이야말로 중국의 티베트에 대한 주권을 보장한다고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달라이 라마의 이른바 ‘실질적 자치’ 주장은 군사적으로 중국과 대항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실상 독립을 발판으로 삼고자 하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하고 있다.
현재 티베트 망명정부는 티베트가 1912년 이전에 한 번도 중국에 지배를 받은 적이 없으며, 티베트의 영토가 오늘날 티베트성만이 아니라 중국 내 티베트인들이 거주하는 칭하이성과 간쑤성 그리고 쓰촨성의 모든 지역과 나아가 인도의 영토로 편입되어 있는 짱난 지역까지 포함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 정부는 중국에의 티베트 귀속이 청나라를 비롯한 과거 중국 역대로부터 계승되어온 것이며 이는 천 년 전까지 소급될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제까지 세계적으로 종교문제가 단기간에 특히 무력으로 해결된 적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중국이라는 이 거대한 국가가 역사적으로 2.3년 마다 분열과 통일을 반복해왔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비록 현일 욱일 승천하는 중국의 정치군사력의 위세 하에 티베트의 독립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언젠가 티베트가 독립할 시기가 반드시 오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그 독립의 시기가 단기간에 오리라는 예측은 현 시점에서 지극히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3) ‘실질적 진전이 없는 협상은 중단한다’
중국 당국과 티베트 망명 정부의 협상이 진전이 보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2009년 10월 25일 티베트의 자치권을 확대하기 위한 중국과의 협상 단념의 뜻을 밝혔다.
2009년에 73세를 맞은 달라이 라마는 10월 25일, 인도 북부의 다람살라에서 열린 공개 강연에서 ‘중국과의 오랜 협의 과정에서 그동안 중도 노선을 성실하게 견지해왔지만, 중국 측으로부터 어떠한 긍정적인 반응도 받지 못했다. 나는 이미 포기 하였다.’ 면서 ‘티베트 문제는 달라이 라마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600만 티베트인들의 문제이며, 티베트 망명정부에 티베트인들과 향후 행동 방침에 대해 논의해 결정할 것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티베트 망명정부의 관계자는 자유 아시아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달라이 라마는 그가 주장한 중도 노선이 세계 각국과 중국 지식인들이 지지를 받았지만 티베트 정세가 여전히 악화되고 있어 티베트의 장래는 개인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전하면서 ‘만약 10월 말에 열릴 중국과의 협상도 이제까지의 협상처럼 아무런 실질적인 진전이 없다면 티베트 망명정부는 현재 진행중인 중국과의 모든 접촉과 대화를 중단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달라이 라마의 이러한 태도 변화는 그 해 3월에 티베트성도 라싸에서 벌어진 대규모 티베트 분리 독립 시위가 중국 정부에 의해 강제 진압된 이후 티베트 망명정부와 달라이 라마 사이에 전개된 노선투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당시 달라이 라마는 더욱 강력한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그룹들의 비판을 받아야 했다.
달라이 라마의 ‘중도 노선’이란 중국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티베트의 완전자치 행정체를 허용하고 티베트 전역의 비군사화를 실시하여 외교와 국방은 중국 정부가 행사하고 기타의 권한은 자치정부가 행사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티베트의 독자적인 문화와 종교 전통을 보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티베트의 한족의 대규모 이주를 방지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크게 보면 청나라 시기의 티베트 통치방식과 유사하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청나라는 1750년 대신 제도를 설치하고 대신이 군사와 외교를 책임지게 하였고, 달라이 라마와 판첸이 티베트의 종교 업무를 관할했다.
어쨌든 달라이 라마는 베이징 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중국 정부와 특사를 통한 대화를 시작했으나 자치의 성격과 범위 등을 놓고 별다른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통일전선부의 주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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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5.10.07
  • 저작시기20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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