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신민회가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의 설립배경과 무관학교의 사범교육에 관하여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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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제강점기 신민회가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의 설립배경과 무관학교의 사범교육에 관하여 알아보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신식 무관학교 설립배경
2, 신민회의 독립군 기지 창설과 무관학교
3, 무관학교의 사범교육


Ⅲ. 맺는말

본문내용

권회복을 도모해야 한다는 의견에 찬동하고 그 준비를 하였다, 1910년 9월 중순경에 스스로 서간도를 시찰하고 1910년 12월 중순경에는 양기택을 방문하여 단체 이후 협의에 참여하였다, 주진수는 그의 출신 연고지인 강원에서 이주민 모집을 담당하였다, 주진수는 1910년 1월 초순에 향리와 재산을 매각하여 그 가족들을 서간도로 출발시켰다, 그는 김도희와 협의하여 박만준의 금전 일부를 인출하여 서간도에 토지와 가옥을 구입하여 단체 이주를 준비하였다, 서울에서는 신민회 간부들인 양기택, 임치정, 이동녕,이회영, 김도회,주진수 등이 극비리에 각 지역별 책임자를 중심으로 이주사업을 추진하였다, 신민회는 1910년 봄에 제 1기의 대 이주를 실행하였다,
한일합방이후 신민회에 의해서 추진된 서간도 집단 이민계획의 목적은 독립전쟁을 통한 국권회복 운동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래서 상당한 재력이 있는 다수의 국민들을 서간도로 이주 시켜서 토지를 구입하고 촌락을 만들어서 신영토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내에서 교육받은 다수의 청년 동지를 모집하여 신 영토에 보내어 민단을 세우고 학교를 세워 교육을 시켰다, 도한 무관학교를 세워서 문무겸전 교육을 실시하여 기회가 오면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3, 무관학교의 사범교육
신민회의 청소년들에게 국권회복에 적합한 신교육을 가르쳐서 교육구국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데 있었다, 신민회는 국내에서는 애국 계몽운동을 통하여 실력 양성에 주력하였다, 1910년 이후 신민회 간부들은 만주와 서북간도와 같은 국외에다가 독립군 기지를 창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현대적인 독립군을 양성하여 국권회복을 꾀하였다, 신민회 간부 중에는 국외 독립군 기지 창설과 해외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떠난 이동영, 이회영이 1911년 1월에 봉청성 유하현 삼연보 추가가에 도착하여 추진하였다, 그들을 뒤이어 도착한 이주민들과 함께 신한민촌을 건설하였다, 그해 4월 봄에는 경학원 또는 경학사를 조직하여 경제 자립을 위한 토지개간과 농업경영을 추진하고 독립군 기지 창설을 위한 준비로 사관양성기관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이회영은 구한말 육군문관학교 출신인 김형선, 이장녕 그리고 이관직 등의 장교들과 함께 서간도에 왔고 그들은 신흥강습소에서 초기의 교관으로 군사훈련을 맡았다, 신흥강습소의 초대 교장에는 이동영이, 2대 교장에는 이 광이 추대되었고, 교감에는 김달이, 학감에는 윤기섭이, 교사에 김창완, 이갑수, 이규용 등이 취임하였다, 초기의 신흥강습소의 교육은 추가가의 토착민들이 일본의 앞잡이라고 의심하여 협조해 주지 않았으므로 옥수수를 저장하였던 토착민의 빈 창고에서 시작하였다, 신흥강습소의 건립시기는 1911년 음력 5월로 김대략의 <백하일기-서정록>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김대략은 1911년 5월 7일자 일기에서 학교 찬무에 관한 기록이 있으며, 5월 14일에는 이날 하오에 개학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원병상에 의하면 신흥강습소란 명칭인 신흥이란 신민회의 신자와 다시 일어난다는 구국투쟁의 의미가 담신 흥자를 합한 것으로 나라를 새로 일어나게 한다는 의미가 함축 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 당시 신흥강습소의 재학생 수는 40여 명 이였다, 추가가에서의 신흥강습소 개교시의 학제는 본과와 군사학을 전수하는 특별과가 있었다, 1911년 11월 18일 김대략의 <백화일기-서정록>에 의하면 본과 반장 우등자와 소학과 반장 우등자라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과는 중학교 과정으로 특별과는 속성과로도 불렸던 바 단기간의 군사교육을 하였던 것이다, 원병상의 기록에 의하면 1911년에 신흥강습소의 제 1회 특기생으로 김련, 변영태, 이규봉, 성주식 등 40여명이 배출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1912년에는 가을 서간도로 탈출해 오는 동포의 수가 나날이 늘어나자 경학사도 나날이 늘어났다, 경학사는 1911~12년에 연이은 대흉년을 만나 재정이 곤란하게 되어 1912년 가을 이후로는 일을 하지 못하다가 자연이 해체되었다, 서간도로 탈출해 오는 동포의 수가 많아지자 경학사는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다시 부민단이 조직되었다, 초대 단장에는 허 혁을 추대하여 자치와 교육을 담당하고 부민단 중앙기관을 추가가 동남쪽 90리 떨어진 통하현 합니하에 두 개 되었다, 1913년 5월에 신흥강습소를 옮겨 교사를 낙성한 이후 신흥강습소 명칭을 신흥무관학교로 개칭, 승격하였다, 그 이 후 4년제 본과에다 6개월과 3개월 속성과를 병설하여 이곳을 찾아드는 젊은이들을 모두 수용하기 위해 대량 교육을 실시하였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2개년간은 교명에 따라 의무적으로 복무한다는 규정도 만들었다, 추가가에서 개교한 신흥강습소는 학교 수업료를 내지 않았다, 원병상도 삼보연 추가가의 황무지 개척과 민단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하여 운영하였다, 신흥강습소는 경학사의 부속기관으로 설치하여 모든 경비는 이주민이 부담하였다, 당시 황무지 개간을 위한 경학사와 신흥강습소의 운영비는 이철영과 이회영 일가가 2만 석의 토지를 매각한 대금으로 충당하였으며 예정되어 있었던 교포들의 자금조달이 거듭된 흉작으로 성금 지원이 불가능하게 되자 경영난에 봉착하였다, 그리하여 학교 당국의 춘경기에 토인들이 산을 빌렸고 학생들을 동원하여 밭을 일구어 옥수수와 콩을 심고 여름 내내 노력하여 얻은 돈으로 학교 유지비의 일부를 충당하기도 하였다고 하였다, 허은의 기록에 의하면 학교이 경영이 어려워지자 학교 식당의 식사도 학생들이 공동으로 마련하거나 유지들이 마련했다, 원병상도 당시 식당에서의 주곡물이 부유층 토착민들의 2~3년씩 창고에 저장하여 두어서 열에 뜨고 좀먹은 좁쌀로 밥솟 뚜껑을 열기만 하면 코를 찌르는 퀴퀴한 냄새가 나며 바람 모퉁이에서 먹다가는 바람에 날라 갈 정도의 끈기도 없고 영양가도 전무한 가축용 좁쌀이라고 하였다, 교직원의 복장도 사계절 백색 무명의 옷을 입었다, 상의에는 단추가 다섯 개 달렸고, 하의는 통으로 되었다, 학생들도 농사도 짓고 수업하기에 편리한 농천황색으로염색한 다치부(만주어)를 필로 끊어다가 만든 것으로 교직원과 같은 양식의 제복을 입었고 학생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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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5.10.08
  • 저작시기20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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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983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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