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개인, 민족, 국가 그리고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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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에서의 개인, 민족, 국가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차

Ⅰ. 서

Ⅱ. 공동체 : 이상적 모형과 경험적 실체
1. 공동체의 개념
2. 공동체의 유형
3. 공동체의 성립․유지 조건
4. 공동체의 이념

Ⅲ. 공동체주의의 이론적 배경
1. 공동체주의의 등장배경 -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
2. 공동체주의 이론의 변화와 발전
3. 현대 공동체주의의 특성
4. 한계

Ⅳ. 한국사회에 있어서 공동체 - 논의와 역사적 고찰

Ⅴ. 결

[ 참고문헌 ]

본문내용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의 계층분화로 발전된 것은 농업의 시작과 같은 노동 생산력의 발전이 이루어진 뒤였으리라 생각된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정규적인 잉여의 발생과 함께 사적 소유가 출현하게 되고 토지의 사유화가 진행되면서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온 지배계급이 성립한다. 이는 곧 ‘공동체가 곧 사회’였던 단계에서, ‘공동체가 보다 큰 사회의 일부로 존속’하게 되는 단계로의 변화로 파악된다. 공동체가 보다 큰 사회의 일부로 존속하게 되는 단계에서 그 사회가 신분제에 입각한 계급사회인 경우 공동체는 전체 사회구조를 장악하는 지배계급에 의하여 종속적타율적 지위를 부여받게 된다. 조선시대의 상황은 바로 이러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사적 계기가 어느 정도 발전하는 과정에서 외부의 인위적인 힘에 의해 사적 계기가 공동적 계기를 일정한 수준에서 유지보존시킴으로써 공동적 계기는 해체되지 않고 사적 계기와 맞물려 종속적타율적 성격을 띠게 된다.(김경일, 1985)
우리 사회의 역사를 보면 공동체 성원들은 일견 국가와 지배층의 수탈을 감수하면서 종속적타율적 관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사과정의 보다 면밀한 검토를 통해 우리는 그들이 종속적 관계의 탈피를 위하여 여러 가지의 형태로 반응하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반응양상중의 하나는 조선사회의 지배적인 이념이었던 유교적 관행의 실천을 통하여 자신들의 신분 상승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일부 상민들에 의한 동족 집단의 조직화는 바로 이와 같은 노력의 좋은 보기가 될 것이다. 상민들에 의한 동족 지연집단의 형성 및 발전은 왜란, 호란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한 현상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양란이후 특히 조선조 말기에 이르면 상민의 신분상승이 상대적으로 용이해졌음을 뜻하는 것인 바 이와 같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는 물론 경제적 기반이 있어야 했고 그것은 바로 토지의 소유를 의미했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토지의 실질적 사유 현상이 용인됨으로 해서 사회의 변화과정에 따라 신분적 계급관계와 토지소유가 기계적으로 일치하지 않게 되었다. 특히 양란으로 인하여 상민의 농토로부터의 이탈이 가능해졌고 은결의 급증으로 인하여 상민들의 토지에 대한 접근이 상대적으로 완화되었다. 또 하나 지적해야 할 점은 조선시대에 양반이 되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에 양반이 되는 길은 과거에 합격하거나, 국가의 내우외환시에 공적을 세움으로써 가능하였다. 그러나 그 외에 지방에서는 벼슬에 의하지 않고서도 유교지식의 습득과 유교적 이념의 실천을 통해서 양반이 될 수도 있었다. 조선말기에 이르면 이러한 현상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됨으로 해서 조선사회의 양반신분은 지역에 따라 달리 규정되는 상대적 개념이 되어 갔다. 상민의 일부는 이와 같이 경제적 기반과 문중단결을 공고히 해 나가면서 유교적 지식의 습득과 이의 실천이라는 지침을 따름으로서 자신들이 처한 종속적타율적 상황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의 지배적인 체제 이데올로기의 강화와 확신을 의미하는 것이며 상대적으로 공동체문화의 축소내지 해체에 기여한 반응양식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와 달리 당시의 지배적인 체제(이념)에 대립하면서 공동체문화의 확산을 도모하는 반응양식도 관찰되는데 대표적인 예는 조선조말에 일어난 각종의 민란과 1984년의 동학운동을 들 수 있다. 특히 동학운동은 농민전쟁의 성격을 띠며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는 피지배계층이었던 농민이 그 주체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마을공동체와 그 주민들이 자신들이 처한 종속적타율적 상황을 적극적으로 타개하려 했던 움직임이었다. 다만 소규모 민란의 경우 그것은 대체로 마을공동체 자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 그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투쟁의 대상도 마을이나 고을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러나 동학운동에 이르면 그것은 전체 사회의 체제개혁을 밑으로부터 요구하는 민중봉기의 성격을 띠게 된다. 특히 동학사상은 신분의 평등과 남녀의 평등을 공자로 하는 평등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것은 동시에 일종의 농민민주주의에 의한 개인의 각성과 유토피아적 평등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다는 사실이 우리의 주목을 끈다. 여하튼 민란에서 동학에 이르는 다양한 농민의 봉기는 모두 마을공동체가 그 거점이 되었으며, 자신들의 공동체적 삶을 위협하는 전체 사회구조에 대한 개혁을 추구함으로써 공동체문화의 확산을 도모하였다는 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 우리나라의 공동체 및 공동체적 조직은 현저히 쇠퇴하게 되고 그 발전이 변형, 왜곡되었다. 일제는 우선 마을공동체의 자치적 성격이 그들의 식민지 통치에 장애가 도리 것으로 판단하고 자연촌락의 ‘자치성’의 소멸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1910년에서 1917년에 이르는 일련의 지방제도 개정을 살펴보면 1912년에 면장이 동리 소유재산을 관리하게 하였고, 1914년 면의 통폐합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마을의 행정단위를 인위적으로 조정하여 동리의 수요를 크게 줄임으로써 일제의 행정관청이 직접 전제적으로 장악하는 지배체제를 만들었다. 또한 일재의 토지조사사업 등을 비롯한 식민정책의 강행에 따라 자작농과 소작농의 지위가 불안정하게 되었으며, 또 그로 인해 농민층의 분화가 격화됨에 따라 촌락공동체적 성격도 크게 쇠퇴하게 되었다. 일제는 또 한편으로는 그들의 식민통치에 권위적인 인간관계를 이용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조선시대의 지배계층을 비호육성하는 정책을 쓰기도 하였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에도 신분적 요소는 식민지 권력적 요소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농촌마을의 공동체적 성격은 크게 변질되어 갔다.
815 광복이후 우리 사회는 급격한 사회문화적 변화를 겪어 왔다. 이에 따라 농촌 사회의 양상도 크게 바뀌었다. 그 변화의 요인으로 작용한 것들은 농지개혁, 625, 의무교육, 화폐경제, 산업화 등등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수많은 요인들 중에서 특히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침투와 산업간 불균형, 개발정책의 추진은 최근의 전체 사회의 경제적 구조와 그것에 농민경제가 편입되는 방식의 변화에 따라 농민사회의 구조적 위치도 달라지게 되었으며 이에 따른 농민의 적용방식 또한 변화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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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5.12.03
  • 저작시기20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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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989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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