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 중국식 사회주의의 이념과 특징
1.건국과 사회주의 건설기
2. 개혁개방과 경제발전기
3. 신권위주의 정권과 부강한 중국 등장기
Ⅱ. 중국의 정치체계
■ 국가 조직
(a) 중앙조직
1. 전국인민대표대회
2.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3. 국무원
4. 국가주석
5. 국가중앙군사위원회
6. 중앙인민정치협상회의
7. 사법기관
(b) 지방조직
1. 지방의 각급 인민대표대회
2. 지방의 각급 인민정부
3. 민족자치기구
■ 중국 공산당
1. 조직원칙
2. 당의 중앙조직
3. 당의 지방조직
4. 당의 기층조직
Ⅲ. 중국 시민사회의 논의
1. 중국 시민사회의 논의과정
2.「북경의 봄」민주화 운동, 천안문 항쟁과 시민사회 논의
3. 천안문항쟁 이후의 변화: 당국가체제의강화
4. 중국시민사회의 특징과 수준
Ⅳ. 정치변화를 통해 살펴본 국가기구와 공산당
1. 개혁이전까지의 중국정치의 역사적 경향
2. 정치변화
3. 중국공산당
Ⅴ.결론 - 중국의 민주화수준과 국가-시민사회 관게 그리고 당면과제
1.건국과 사회주의 건설기
2. 개혁개방과 경제발전기
3. 신권위주의 정권과 부강한 중국 등장기
Ⅱ. 중국의 정치체계
■ 국가 조직
(a) 중앙조직
1. 전국인민대표대회
2.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3. 국무원
4. 국가주석
5. 국가중앙군사위원회
6. 중앙인민정치협상회의
7. 사법기관
(b) 지방조직
1. 지방의 각급 인민대표대회
2. 지방의 각급 인민정부
3. 민족자치기구
■ 중국 공산당
1. 조직원칙
2. 당의 중앙조직
3. 당의 지방조직
4. 당의 기층조직
Ⅲ. 중국 시민사회의 논의
1. 중국 시민사회의 논의과정
2.「북경의 봄」민주화 운동, 천안문 항쟁과 시민사회 논의
3. 천안문항쟁 이후의 변화: 당국가체제의강화
4. 중국시민사회의 특징과 수준
Ⅳ. 정치변화를 통해 살펴본 국가기구와 공산당
1. 개혁이전까지의 중국정치의 역사적 경향
2. 정치변화
3. 중국공산당
Ⅴ.결론 - 중국의 민주화수준과 국가-시민사회 관게 그리고 당면과제
본문내용
이래로 지지부진하였고, 적자와 외국차관은 1984~1988년 사이 두 배가 되었다. 중앙정부가 탈중앙화로 인하여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1980년대 초부터 발생한 인플레이션은 1988년에 최고에 달했다. 게다가 1988년 여름에 새로운 가격개혁은 엄청난 사재기를 불러일으켰다. 경제개혁 동안 가난이 심각한 사회문제화가 되었다. 1988년 농촌의 1/3이 생존수준 이하의 생활을 하였고, 인플레로 인해 도시가구의 1/3이 실질소득의 감소로 고통을 받았다. 한편 사치와 부패가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이중가격제와 산업에서 경영계약제 도립, 그리고 외국인 투자와 무역이 부패의 근원이었다. 결국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88년 가을 당은 긴축정책의 하나로 가격개혁을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이 신용, 고용, 소득을 감소시킨 반면, 물가상승과 부패는 더욱 만연하게 되었다.
이러한 막다른 골목에는 근본적인 정치적 골칫거리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하나는 지도부에서 개혁파와 보수파 간의 경제개혁에 대한 합의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미 지방과 기업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진 상태에서 정부가 경제적 영역을 이끌 권력과 권위가 다시 주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체로 학생들은 운동에 무관심하였으나, 몇몇은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1985~1986년 운동을 통하여 학생운동의 연속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교육과 다른 계획을 통해 극복해 보려고 하였다. 대부분은 호요방 사망이전까지는 조용하였지만, 그러나 1980년대 말의 환경-경제위기, 도덕적 부패, 정치적 냉담-은 충분히 위기상황을 조성하였다. 게다가 개혁이 진행될수록 보수파의 반동은 더해졌다. 특히 개혁개방이 진행되면서 도덕적 위기감이 조성되고, 관료의 부패와 범죄의 증가는 보수파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1988~1989년 경제적으로 긴축정책이 실행되자 보수파는 정치적 개혁에 대한 압력에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2) 천안문 항쟁의 전개과정
학생들은 1983년이래 지적, 문화적 자유를 확대한 사람이 호요방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1989년 4월 15일 호요방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사망을 계기로 국민들의 당, 정에 대한 불만은 최고조에 이르렀고 지식인들의 급진적 민주개혁 욕구가 폭발했다. 1989년 4월 17일 천안문 광장에 수천 명의 대학생들이 모였다. 호요방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이들은 87년 민주화 시위에 관대한 태도를 보인 후 강제 퇴진 당했던 호요방에 대한 재평가와 정치 민주화, 자유화를 요구했다. 시위는 지방대학에서도 일어나 4월 25일까지 전국 80여 대학에서 15만여 명이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특히 호요방 추도식 다음날인 4월 23일에는 북경 소재 21개 대학의 대표들이 모여 ‘고교임시행동위원회(후에 북경시고등학원학생자치연합회로 개칭)’를 설립했다. 이로써 중국 내 민주화 운동 확대를 위한 조직이 학생들에 의해 최초로 정비됐다. 시위가 장기화되자 등소평은 4월 25일 당정치국확대회의에서 이 사태를 단순한 학생운동이 아닌 \'동란\'으로 규정하고 단호히 분쇄할 것을 촉구했다. <인민일보>는 학생 시위가 계획적인 음모이며 이를 계속할 경우 체포와 처형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이는 학생들을 자극해 4월 27일에는 천안문 광장에서 동란 규정 취소와 중국 당국과의 대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개됐다.
1919년 중국 베이징 학생들이 일으킨 반제국, 반봉건주의 혁명 운동인 5. 4운동 70주년을 앞두고 일어난 학생 시위는 중국 안팎에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5월 4일 1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5. 4운동 기념식은 별다른 사고 없이 끝났지만 여전히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대화 요구에 정부 측 답변이 없자 3000여명의 학생들은 5월 13일 정오부터 천안문 광장에 텐트를 치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시위대는 젊은 여성이 두 손을 모아 자유의 횃불을 들고 있는 9m 높이의 자유의 여신상을 천안문 광장에 세웠다. 시위대 총지휘부는 외국기자회견을 열어 \"현 정부는 대화 자격을 잃었으나 정부가 계엄령 철폐, 군대 철수, 민주화운동 참가 학생에 대한 보복 금지 보장, 신문 자유 실현 등 4가지를 응답하면 정부와 대화를 갖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틀 뒤 북경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30년만의 중ㆍ소 정상회담 취재를 위해 북경에 왔던 보도진을 통해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전 세계에 그대로 전해졌다.
5월 16일 중ㆍ소 정상회담에서 조자양 총서기는 등소평이 현직에서 물러났으면서도 여전히 막후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내용을 폭로한다. 17일 \"학생의 애국적 열정은 매우 귀중하다\"는 조자양의 천명을 계기로 천안문 광장의 시위는 100만 명 규모로 본격화된다. 시위대는 등소평을 강력하게 비난했고 천안문 광장에서는 등소평 모형을 만들어 불태우고 \"등소평은 물러가라\"는 구호와 표어가 등장했다. 정치 민주화와 자유를 요구하며 시작된 시위는 등소평에 대한 분노가 커지면서 새로운 양상으로 변했다. 조자양은 시위대를 무마하려고 했지만 정부 내 강경파와 시위대 사이에서 효과적인 조정책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5월 20일 오전 10시, 정부는 공산정권수립 이후 최초로 북경시 10개구 중 8개구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계엄령 선포에도 불구하고 시위 열기가 시들지 않자 마침내 등소평은 강경 진압을 선택했다. 6월 3일 중국 인민해방군 최정예 부대와 탱크들이 천안문 광장으로 밀려들었다. 이들은 시위대가 해산 명령에 응하지 않자 광장 양쪽에서 진입해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 시위대는 흩어지고 지도자들은 체포됐으며, 수백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 북경 시장 진희동의 보고에 의하면 이 때 민간인 3,000여 명이 부상당하고 200여 명이 사망하는 엄청난 희생이 초래됐다.
3) 천안문 항쟁의 시민사회운동으로서의 한계
천안문 항쟁을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저항으로 평가하는 대부분의 논의들의 근거는 천안문 항쟁 당시의 시민사회는 국가와는 대립하는 자기 의견을 가지고, 국가에 대해 정치적 저항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안문 항쟁의 진행과정을
이러한 막다른 골목에는 근본적인 정치적 골칫거리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하나는 지도부에서 개혁파와 보수파 간의 경제개혁에 대한 합의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미 지방과 기업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진 상태에서 정부가 경제적 영역을 이끌 권력과 권위가 다시 주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체로 학생들은 운동에 무관심하였으나, 몇몇은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1985~1986년 운동을 통하여 학생운동의 연속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교육과 다른 계획을 통해 극복해 보려고 하였다. 대부분은 호요방 사망이전까지는 조용하였지만, 그러나 1980년대 말의 환경-경제위기, 도덕적 부패, 정치적 냉담-은 충분히 위기상황을 조성하였다. 게다가 개혁이 진행될수록 보수파의 반동은 더해졌다. 특히 개혁개방이 진행되면서 도덕적 위기감이 조성되고, 관료의 부패와 범죄의 증가는 보수파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1988~1989년 경제적으로 긴축정책이 실행되자 보수파는 정치적 개혁에 대한 압력에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2) 천안문 항쟁의 전개과정
학생들은 1983년이래 지적, 문화적 자유를 확대한 사람이 호요방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1989년 4월 15일 호요방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사망을 계기로 국민들의 당, 정에 대한 불만은 최고조에 이르렀고 지식인들의 급진적 민주개혁 욕구가 폭발했다. 1989년 4월 17일 천안문 광장에 수천 명의 대학생들이 모였다. 호요방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이들은 87년 민주화 시위에 관대한 태도를 보인 후 강제 퇴진 당했던 호요방에 대한 재평가와 정치 민주화, 자유화를 요구했다. 시위는 지방대학에서도 일어나 4월 25일까지 전국 80여 대학에서 15만여 명이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특히 호요방 추도식 다음날인 4월 23일에는 북경 소재 21개 대학의 대표들이 모여 ‘고교임시행동위원회(후에 북경시고등학원학생자치연합회로 개칭)’를 설립했다. 이로써 중국 내 민주화 운동 확대를 위한 조직이 학생들에 의해 최초로 정비됐다. 시위가 장기화되자 등소평은 4월 25일 당정치국확대회의에서 이 사태를 단순한 학생운동이 아닌 \'동란\'으로 규정하고 단호히 분쇄할 것을 촉구했다. <인민일보>는 학생 시위가 계획적인 음모이며 이를 계속할 경우 체포와 처형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이는 학생들을 자극해 4월 27일에는 천안문 광장에서 동란 규정 취소와 중국 당국과의 대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개됐다.
1919년 중국 베이징 학생들이 일으킨 반제국, 반봉건주의 혁명 운동인 5. 4운동 70주년을 앞두고 일어난 학생 시위는 중국 안팎에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5월 4일 1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5. 4운동 기념식은 별다른 사고 없이 끝났지만 여전히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대화 요구에 정부 측 답변이 없자 3000여명의 학생들은 5월 13일 정오부터 천안문 광장에 텐트를 치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시위대는 젊은 여성이 두 손을 모아 자유의 횃불을 들고 있는 9m 높이의 자유의 여신상을 천안문 광장에 세웠다. 시위대 총지휘부는 외국기자회견을 열어 \"현 정부는 대화 자격을 잃었으나 정부가 계엄령 철폐, 군대 철수, 민주화운동 참가 학생에 대한 보복 금지 보장, 신문 자유 실현 등 4가지를 응답하면 정부와 대화를 갖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틀 뒤 북경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30년만의 중ㆍ소 정상회담 취재를 위해 북경에 왔던 보도진을 통해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전 세계에 그대로 전해졌다.
5월 16일 중ㆍ소 정상회담에서 조자양 총서기는 등소평이 현직에서 물러났으면서도 여전히 막후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내용을 폭로한다. 17일 \"학생의 애국적 열정은 매우 귀중하다\"는 조자양의 천명을 계기로 천안문 광장의 시위는 100만 명 규모로 본격화된다. 시위대는 등소평을 강력하게 비난했고 천안문 광장에서는 등소평 모형을 만들어 불태우고 \"등소평은 물러가라\"는 구호와 표어가 등장했다. 정치 민주화와 자유를 요구하며 시작된 시위는 등소평에 대한 분노가 커지면서 새로운 양상으로 변했다. 조자양은 시위대를 무마하려고 했지만 정부 내 강경파와 시위대 사이에서 효과적인 조정책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5월 20일 오전 10시, 정부는 공산정권수립 이후 최초로 북경시 10개구 중 8개구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계엄령 선포에도 불구하고 시위 열기가 시들지 않자 마침내 등소평은 강경 진압을 선택했다. 6월 3일 중국 인민해방군 최정예 부대와 탱크들이 천안문 광장으로 밀려들었다. 이들은 시위대가 해산 명령에 응하지 않자 광장 양쪽에서 진입해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 시위대는 흩어지고 지도자들은 체포됐으며, 수백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 북경 시장 진희동의 보고에 의하면 이 때 민간인 3,000여 명이 부상당하고 200여 명이 사망하는 엄청난 희생이 초래됐다.
3) 천안문 항쟁의 시민사회운동으로서의 한계
천안문 항쟁을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저항으로 평가하는 대부분의 논의들의 근거는 천안문 항쟁 당시의 시민사회는 국가와는 대립하는 자기 의견을 가지고, 국가에 대해 정치적 저항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안문 항쟁의 진행과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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