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목 차>
1. 서론
1) 채만식의 생애
(1) 혈연적 계보
(2) 학력,경력 및 가정
(3) 사회적 상황
2. 채만식이 말하고 있는 세상
1) 식민지 현실 그대로의 모습
2) 암흑기속 좌절로 인한 허무
3) 해방 후 자각과 전망
3. 채만식의 세상을 보는 방법
1)풍자에 대해서
2)채만식 소설에서 풍자의 대상
(1)서술자가 자신을 풍자
(2)서술자가 바라보는 대상을 풍자
4.다른 문학을 통한 세계관 반영, 상호 인물성
1)후일담의 상호 인물적 양상
2)고전소설의 인물을 재사용하는 상호 인물적 양상
5. 결론
<참고자료>
1. 서론
1) 채만식의 생애
(1) 혈연적 계보
(2) 학력,경력 및 가정
(3) 사회적 상황
2. 채만식이 말하고 있는 세상
1) 식민지 현실 그대로의 모습
2) 암흑기속 좌절로 인한 허무
3) 해방 후 자각과 전망
3. 채만식의 세상을 보는 방법
1)풍자에 대해서
2)채만식 소설에서 풍자의 대상
(1)서술자가 자신을 풍자
(2)서술자가 바라보는 대상을 풍자
4.다른 문학을 통한 세계관 반영, 상호 인물성
1)후일담의 상호 인물적 양상
2)고전소설의 인물을 재사용하는 상호 인물적 양상
5. 결론
<참고자료>
본문내용
부터 받던 환경 때문에 그의 성격이 지나치게 예민하고 섬세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2)학력, 경력사항 및 가정
채만식은 임피보통학교를 1914년 졸업하고 상경하여 1922년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이어 와세다 대학 부속 와세다 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했으나 1924년 제적되었다. 1919년 채만식 일생일대 사건인 ‘결혼’을 하게 된다. 그의 결혼은 곧 불행으로 이어졌고, 그 불행은 이어 채만식의 생애 전체에 걸친 불행을 초래 했다. 채만식의 문학활동은 보통 3기로 구분된다. 제 1기는 문단 등단의 시기부터 <레디메이드 인생>이 발표되기까지의 10년간이다. 채만식은 동아일보기자 생활을 하던 중 이광수의 추천으로 단편 <세길로>를 가지고 문단에 등단한다 이어 1926년 조선일보로 전근, 10년동안 여러 곳의 신문사나 잡지사 등에서 기자생활을 한다. 어느 한 곳에 정착을 못하고 이곳저곳 전전긍긍하는 것은 유년시절 가정으로부터 지나친 편애로 적응하기 힘들어서 이라고 한다. 이후 그는 ‘정신을 차리고’ 문학 창작에만 전념한다. 이뜻은 생활고의 가중을 의미한다. 이기간동안 그의 대표적 풍자소설, 단편<레디메이드 인생><패배자의 무덤>등과 장편<인형의 집을 나와서>등을 발표한다.
1930년대부터 일제의 탄압이 더 심해지고 작가들의 문학활동은 더 힘들어진다. 채만식은 이와중에 2번째 결혼을 한다. 이때부터 해방전까지 제 2기로 본다. 결혼후에 2남 1녀를 출생하고 그때부터 ‘집’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채만식은 그래서 조선일보에 대표작 장편 <탁류>를 연재하고, 1938년 <태평천하>를 조광에 발표한다.
다음으로 제 3기는 해방부터 삶을 마치기까지의 5년간이다. 채만식은 1945년 이후 이리로 낙향을 한다. 해방과 더불어 단편소설 <논 이야기><맹순사><미스터 방>등을 발표한다. 1948년 <도야지>등과 중편 <민족의 죄인>을 집필하고 1949년 마지막으로 장편<소년은 자란다>를 완성한다 그러나 이작품은 살아있는동안 발표되지 못하고 그이후에 발표되어 유작으로 볼 수있다. 채만식은 1950년 6.25발발 2주전에 가난과 폐결핵으로 인해 49세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3) 시대적 상황
채만식이 태어난 1880~1910년대는 이른바 개항기로 이시기는 전근대적 사고방식과 신문명에 접한 개화의식의 갈등으로 특징지어진다. 국가의식, 개화사상의 고취, 신도덕관의 반영, 구습타파의 사상은 곧 기성의 인습을 제거하여 신문화를 이룩하고자 하는 사회개혁의 의지를 표방한다. 또한 1910년대부터 시작된 일본의 탄압은 시간이 갈수록 가혹해져갔고 이에대해 우리의 대항역시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났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은 우리나라에 식민지 파쇼통치를 실시했는데, 이런 일본의 압력은 당시 우리 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30년대에 더욱 더 가혹해진 일제의 조선탄압정책은 그이전 20년대 말과 30년대 초에 발생한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공황위기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만주침략을 위한 지리적 발판으로 조선을 지목하고 그리하여 일본은 30년대 이전보다 착취의 가속화가 되었다. 이에따라 조선의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 일본을 등에 업고 그들이 했던 방식을 모방한 대지주들이 농민들의 몰락을 더욱 부추겼다. 뿐만아니라 일본은 사상의 문제까지 개입하여 강압적인 탄압정책을 폈으며, 이러한 1930년대의 시대적 상황은 우리 문학계에 있어 자유로운 창작권리마저 박탈했다. 이러한 외부적 압박에 맞서 구인회나 카프작가들에 의해 집단에서 분리된 개별화된 인물을 묘사하며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채만식은 이효석등과 함께 동반자 작가였으나 나중에 갈수록 시대 비판적인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비록 카프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자신의 작품 가운데 일부를 프로문학이라 생각했다.
이후 8.15 광복에 의한 국권회복은 역사에 일대 전기를 가져오게 되지만, 이는 다른 문제점을 야기했다. 그동안 있던 일제의 약탈에선 벗어났지만 구한말에서 광복에 이르는 동안의 우리나라 근대자본주의 성립과정은 성급하여 이데올로기적 혼란을 겪게된다. 이와같은 현실에서 채만식은 해방을 문제의 해결이 아닌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2. 채만식이 말하고 있는 세상
1) 식민지 현실 그대로의 모습
채만식이 쓴 「탁류」는 1937년 10월 12일부터 1938년 5월 17일 까지 198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되던 장편 소설이다 「탁류」의 전체적 줄거리는 매우 통속적으로 구성 되어 있지만, 이런 줄거리와 지엽적 사건을 통해 1930년대의 비참한 식민지 시대의 피지배 계층에 대해 극명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탁류」는 1930년대 한국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채만식은 일제 식민시대 우리 민족의 빈곤문제만 제시하는 것만 아닌 가난할 수밖에 없던 시대적 상활을 통해 일제 식민지 수탈 정책의 잔학함을 비판, 폭로하였다. 조창환, <채만식 해방전후 소설연구>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黃海)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 째 얼러 좌르르 쏟아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 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群山)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탁류」는 항구도시 군산을 배경으로 설정하고 ‘미두장’이란 곳을 등장시킨다. 항구도시 군산을 일제가 쌀을 비롯해 농산물과 각종 지하자원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식민수탈의 현장으로 이곳으로 이주해온 일본인들은 식민지배의 혜택을 누리며 호의 호식하는 곳이다. 따라서 군산은 식민지배의 불합리와 민족의 울분이 응어리진 장소이다. ‘미두장’은 일제의 산미증식 계획에 따라 호남평야에서 생산되는 미곡을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해 온갖 수탈과 기만이 벌어지는 현장이다. 이곳은 식민지 시대의 경제적 모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한기선, <채만식 소설 연구 : 작가의식과 기법을 중심으로>
망건 쓰고 귀 안 뺀 촌샛님들이 도무지 어쩐 영문인 줄 모르게 살림이 요모로 조모로 오그라들라 치면 초조한 끝에 허욕이 난다.(중략) 좀 똑똑하다는 축이 일확천금의 큰 뜻을 품고 인천으로
(2)학력, 경력사항 및 가정
채만식은 임피보통학교를 1914년 졸업하고 상경하여 1922년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이어 와세다 대학 부속 와세다 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했으나 1924년 제적되었다. 1919년 채만식 일생일대 사건인 ‘결혼’을 하게 된다. 그의 결혼은 곧 불행으로 이어졌고, 그 불행은 이어 채만식의 생애 전체에 걸친 불행을 초래 했다. 채만식의 문학활동은 보통 3기로 구분된다. 제 1기는 문단 등단의 시기부터 <레디메이드 인생>이 발표되기까지의 10년간이다. 채만식은 동아일보기자 생활을 하던 중 이광수의 추천으로 단편 <세길로>를 가지고 문단에 등단한다 이어 1926년 조선일보로 전근, 10년동안 여러 곳의 신문사나 잡지사 등에서 기자생활을 한다. 어느 한 곳에 정착을 못하고 이곳저곳 전전긍긍하는 것은 유년시절 가정으로부터 지나친 편애로 적응하기 힘들어서 이라고 한다. 이후 그는 ‘정신을 차리고’ 문학 창작에만 전념한다. 이뜻은 생활고의 가중을 의미한다. 이기간동안 그의 대표적 풍자소설, 단편<레디메이드 인생><패배자의 무덤>등과 장편<인형의 집을 나와서>등을 발표한다.
1930년대부터 일제의 탄압이 더 심해지고 작가들의 문학활동은 더 힘들어진다. 채만식은 이와중에 2번째 결혼을 한다. 이때부터 해방전까지 제 2기로 본다. 결혼후에 2남 1녀를 출생하고 그때부터 ‘집’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채만식은 그래서 조선일보에 대표작 장편 <탁류>를 연재하고, 1938년 <태평천하>를 조광에 발표한다.
다음으로 제 3기는 해방부터 삶을 마치기까지의 5년간이다. 채만식은 1945년 이후 이리로 낙향을 한다. 해방과 더불어 단편소설 <논 이야기><맹순사><미스터 방>등을 발표한다. 1948년 <도야지>등과 중편 <민족의 죄인>을 집필하고 1949년 마지막으로 장편<소년은 자란다>를 완성한다 그러나 이작품은 살아있는동안 발표되지 못하고 그이후에 발표되어 유작으로 볼 수있다. 채만식은 1950년 6.25발발 2주전에 가난과 폐결핵으로 인해 49세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3) 시대적 상황
채만식이 태어난 1880~1910년대는 이른바 개항기로 이시기는 전근대적 사고방식과 신문명에 접한 개화의식의 갈등으로 특징지어진다. 국가의식, 개화사상의 고취, 신도덕관의 반영, 구습타파의 사상은 곧 기성의 인습을 제거하여 신문화를 이룩하고자 하는 사회개혁의 의지를 표방한다. 또한 1910년대부터 시작된 일본의 탄압은 시간이 갈수록 가혹해져갔고 이에대해 우리의 대항역시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났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은 우리나라에 식민지 파쇼통치를 실시했는데, 이런 일본의 압력은 당시 우리 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30년대에 더욱 더 가혹해진 일제의 조선탄압정책은 그이전 20년대 말과 30년대 초에 발생한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공황위기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만주침략을 위한 지리적 발판으로 조선을 지목하고 그리하여 일본은 30년대 이전보다 착취의 가속화가 되었다. 이에따라 조선의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 일본을 등에 업고 그들이 했던 방식을 모방한 대지주들이 농민들의 몰락을 더욱 부추겼다. 뿐만아니라 일본은 사상의 문제까지 개입하여 강압적인 탄압정책을 폈으며, 이러한 1930년대의 시대적 상황은 우리 문학계에 있어 자유로운 창작권리마저 박탈했다. 이러한 외부적 압박에 맞서 구인회나 카프작가들에 의해 집단에서 분리된 개별화된 인물을 묘사하며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채만식은 이효석등과 함께 동반자 작가였으나 나중에 갈수록 시대 비판적인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비록 카프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자신의 작품 가운데 일부를 프로문학이라 생각했다.
이후 8.15 광복에 의한 국권회복은 역사에 일대 전기를 가져오게 되지만, 이는 다른 문제점을 야기했다. 그동안 있던 일제의 약탈에선 벗어났지만 구한말에서 광복에 이르는 동안의 우리나라 근대자본주의 성립과정은 성급하여 이데올로기적 혼란을 겪게된다. 이와같은 현실에서 채만식은 해방을 문제의 해결이 아닌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2. 채만식이 말하고 있는 세상
1) 식민지 현실 그대로의 모습
채만식이 쓴 「탁류」는 1937년 10월 12일부터 1938년 5월 17일 까지 198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되던 장편 소설이다 「탁류」의 전체적 줄거리는 매우 통속적으로 구성 되어 있지만, 이런 줄거리와 지엽적 사건을 통해 1930년대의 비참한 식민지 시대의 피지배 계층에 대해 극명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탁류」는 1930년대 한국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채만식은 일제 식민시대 우리 민족의 빈곤문제만 제시하는 것만 아닌 가난할 수밖에 없던 시대적 상활을 통해 일제 식민지 수탈 정책의 잔학함을 비판, 폭로하였다. 조창환, <채만식 해방전후 소설연구>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黃海)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 째 얼러 좌르르 쏟아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 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群山)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탁류」는 항구도시 군산을 배경으로 설정하고 ‘미두장’이란 곳을 등장시킨다. 항구도시 군산을 일제가 쌀을 비롯해 농산물과 각종 지하자원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식민수탈의 현장으로 이곳으로 이주해온 일본인들은 식민지배의 혜택을 누리며 호의 호식하는 곳이다. 따라서 군산은 식민지배의 불합리와 민족의 울분이 응어리진 장소이다. ‘미두장’은 일제의 산미증식 계획에 따라 호남평야에서 생산되는 미곡을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해 온갖 수탈과 기만이 벌어지는 현장이다. 이곳은 식민지 시대의 경제적 모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한기선, <채만식 소설 연구 : 작가의식과 기법을 중심으로>
망건 쓰고 귀 안 뺀 촌샛님들이 도무지 어쩐 영문인 줄 모르게 살림이 요모로 조모로 오그라들라 치면 초조한 끝에 허욕이 난다.(중략) 좀 똑똑하다는 축이 일확천금의 큰 뜻을 품고 인천으로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