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어 스페인 북부와 프랑스 남부에 있는 구석기시대의 동굴에서도 똑같은 벽화나 부조 등이 발견됨으로써 인류 최고(最古)의 경탄할 만한 미술이라는 것이 실증되었다. 오늘날에서는 구석기시대 후기 마들렌기(약 1만~2만 년 이전)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벽화의 대부분은 천장에 그려져 있다. 매머드토나카이들소사슴 등이 흑적갈색으로 그려져 있는데 그 생생한 묘사, 아름다운 색채와 입체감은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이 벽화를 통하여 당시의 예술활동뿐만 아니라 수렵의 방법이나 무기신앙 등을 알 수 있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있다.
가 발견됨에 따라 이 시기부터 고대 문명이 열렸다고 본다. B.C. 3000년께 이베로족은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하였다. B.C. 6세기~B.C. 5세기에 동부 및 남부 지역에 이베로족, 페니키아족, 그리스족들이 이주하여 정착하였고, 서부 및 중부 지역에 중앙 유럽으로부터 흘러온 켈트족이 정착하여 이베로족과 혼혈되어 켈트족이 정착하여 이베로족과 혼혈되어 켈트이베로족이 되었다. B.C. 3세기~B.C. 2세기께 남동부 지역으로 진출한 카르타고인들이 패권을 잡게 되면서 2차 포에니 전쟁(218~201)이 일어났다. 3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가 승리하면서 이베리아 반도는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B.C. 1세기에 이베리아 반도를 \'이베리아(Iberia)\' 또는 \'이스파니아(Hispania)라고 칭하게 되었으며, 기독교도들이 이 시기에 이베리아 반도로 유입해 왔다.
3. 로마제국의 멸망
3세기 중엽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제국은 위기에 들어갔다. 알레한드로 세베로(Aleandro Severo) 황제(235) 이후로 군이 황제를 지명하는 등, 제국의 권위에 대항하는 반란들이 갈수록 잦아짐으로써 제국의 권위는 점점 더 약해져 갔고 여기에 내전과 불안정한 기후 때문에 경제가 시시각각으로 어려워져 도시는 점점 더 약해져 갔고 도시는 점점 더 피폐해졌다. 시골이 경제력을 장악하게 되고 한명의 지주에게 너무나 많은 땅이 집중 되었다. 도시 생활이 어려워지자 시골로 도시민들이 몰려가 시골에는 땅을 소유한 지주와 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농부들 간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지금까지도 스페인 남부 지역에서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를 정복자들은 스페인계 아메리카로 가져갔다. 로마는 경제적 쇠락과 권위 상실에 군인 문제까지 안게 되었다. 로마제국은 갈수록 국경을 지킨다는 일이 힘들어졌고, 이때 북쪽에서 게르만족인 서고트족이 들어왔다. 3세기 말 테오도로시우스 황제가 권좌에 있을 동안 그들과 로마는 그런 대로 잘 지냈지만 이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후계자이자 그의 아들인 오노리오는 동맹을 맺었고 그 때부터 스페인은 서고트족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4. 서고트족하의 스페인 (411~711)
5세기 로마제국은 붕괴 일보 직전에 있었고 이미 이전부터 용병으로 20만 명의 게르만족이 스페인 안으로 파고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서고트족이 410년에 스페인내륙을 약탈하고 공격을 시작했을 때 로마하에 있었던 스페인은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게르만족은 유목민으로서 강한 민족인데 로마인들은 이들이 라틴어가 아닌 다른 단어로 \'말을 더듬는다(발부세아르)\'하여 \'바르바로(야만인이란뜻)\'라 불렀다.
반면 로마는 내부에서 서서히 붕괴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정치적인 힘이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스페인의 로마인들은 새로운 상황을 수용하여 서로 융화되려는 노력을 했기 때문에 스페인에 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 이렇게 스페인에 들어온 서고트족은 용병술에는 강했지만 문화라곤 없었던 민족이었으며 이단인 아리우스파의 교리를 받아들이고 6세기에 단일 정치구조를 만들고 똘레도를 수도로 했다. 그러나 589년 똘레도 종교회의에서 고트족 최초의 군주 레오비힐도의 아들 에르메네힐도는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였으며 언어는 라틴어를 받아들였으며 그 당시 세비야의 대주교이자 중세 최초의 철학자로 문화의 정신이라고 불렸던 성 이시도로는 라틴어로 스페인에서 로마문화를 구해냈고 스페인을 기독교화 시키는데 주력했다.
『어원론』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라틴어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을 심어주고 로마법의 재편성을 통하여 스페인에 지속적인 법적 공동체의 인식을 부여했고 이런 개혁을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를 정비하여 교회와 국가의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그 둘 간의 결합을 공표하였다. 그러나 \'자유민 사상\'을 가진 서고트족은 그들의 속성상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에 귀속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서고트족이 지배한 2세기 사이에 30명의 왕이 즉위하여 자신만의 독립영지를 가질 정도였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계속되었던 그들간의 분쟁은 결국 교회에게 결정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이 일은 훗날 스페인과 중남미 정치의 불변의 요소가 되었다.
5. 아랍 지배하의 스페인
622년 마호멧이 이끄는 이슬람 세력은 무어인들이 이베리아 반도 아래 아프리타 북부해안까지 영토를 넓혀나가게끔 했다. 확장 일로에 있던 이들에게 남은 일은 바로 위의 스페인으로 올라오는 것이었고 그런 일은 식은 죽 먹기처럼 쉬웠다. 711년 서고트족의 마지막 왕 로드리고는 세우따의 부왕이었던 돈 훌리안 백작의 반란을 막아내지 못했는데, 그들 간의 내분이야말로 무어인들에게 서고트왕국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주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고트족의 왕 에히까(Egica)의 아들 위띠사(Witiza)왕이 710년에 죽자 그의 아들을 세습시키려고 했던 세력은 710년에 왕권을 쥔 로드리고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위띠사의 아들들은 모로코의 정복자인 무사(Muza)에게 용병을 요청했고 무사의 부관인 타릭(Tarik)이 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과 이부 아랍 귀족으로 구성된 7,000명의 부대를 이끌고 스페인 땅으로 들어 왔다. 일설에 의하면 딸을 로드리고 왕에게 능욕당한 훌리안 백작은 왕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 군대의 수장 타릭에게 도움을 청했고 타릭의 군대가 스페인에 들어옴으로써 스페인내 무어인의 지배역사가 시작되었다. 여하튼 타릭과 연이은 무사에 의한 스페인 점령은 1492년까지 800년 동안 지속되었다. 무어인에게
가 발견됨에 따라 이 시기부터 고대 문명이 열렸다고 본다. B.C. 3000년께 이베로족은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하였다. B.C. 6세기~B.C. 5세기에 동부 및 남부 지역에 이베로족, 페니키아족, 그리스족들이 이주하여 정착하였고, 서부 및 중부 지역에 중앙 유럽으로부터 흘러온 켈트족이 정착하여 이베로족과 혼혈되어 켈트족이 정착하여 이베로족과 혼혈되어 켈트이베로족이 되었다. B.C. 3세기~B.C. 2세기께 남동부 지역으로 진출한 카르타고인들이 패권을 잡게 되면서 2차 포에니 전쟁(218~201)이 일어났다. 3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가 승리하면서 이베리아 반도는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B.C. 1세기에 이베리아 반도를 \'이베리아(Iberia)\' 또는 \'이스파니아(Hispania)라고 칭하게 되었으며, 기독교도들이 이 시기에 이베리아 반도로 유입해 왔다.
3. 로마제국의 멸망
3세기 중엽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제국은 위기에 들어갔다. 알레한드로 세베로(Aleandro Severo) 황제(235) 이후로 군이 황제를 지명하는 등, 제국의 권위에 대항하는 반란들이 갈수록 잦아짐으로써 제국의 권위는 점점 더 약해져 갔고 여기에 내전과 불안정한 기후 때문에 경제가 시시각각으로 어려워져 도시는 점점 더 약해져 갔고 도시는 점점 더 피폐해졌다. 시골이 경제력을 장악하게 되고 한명의 지주에게 너무나 많은 땅이 집중 되었다. 도시 생활이 어려워지자 시골로 도시민들이 몰려가 시골에는 땅을 소유한 지주와 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농부들 간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지금까지도 스페인 남부 지역에서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를 정복자들은 스페인계 아메리카로 가져갔다. 로마는 경제적 쇠락과 권위 상실에 군인 문제까지 안게 되었다. 로마제국은 갈수록 국경을 지킨다는 일이 힘들어졌고, 이때 북쪽에서 게르만족인 서고트족이 들어왔다. 3세기 말 테오도로시우스 황제가 권좌에 있을 동안 그들과 로마는 그런 대로 잘 지냈지만 이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후계자이자 그의 아들인 오노리오는 동맹을 맺었고 그 때부터 스페인은 서고트족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4. 서고트족하의 스페인 (411~711)
5세기 로마제국은 붕괴 일보 직전에 있었고 이미 이전부터 용병으로 20만 명의 게르만족이 스페인 안으로 파고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서고트족이 410년에 스페인내륙을 약탈하고 공격을 시작했을 때 로마하에 있었던 스페인은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게르만족은 유목민으로서 강한 민족인데 로마인들은 이들이 라틴어가 아닌 다른 단어로 \'말을 더듬는다(발부세아르)\'하여 \'바르바로(야만인이란뜻)\'라 불렀다.
반면 로마는 내부에서 서서히 붕괴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정치적인 힘이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스페인의 로마인들은 새로운 상황을 수용하여 서로 융화되려는 노력을 했기 때문에 스페인에 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 이렇게 스페인에 들어온 서고트족은 용병술에는 강했지만 문화라곤 없었던 민족이었으며 이단인 아리우스파의 교리를 받아들이고 6세기에 단일 정치구조를 만들고 똘레도를 수도로 했다. 그러나 589년 똘레도 종교회의에서 고트족 최초의 군주 레오비힐도의 아들 에르메네힐도는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였으며 언어는 라틴어를 받아들였으며 그 당시 세비야의 대주교이자 중세 최초의 철학자로 문화의 정신이라고 불렸던 성 이시도로는 라틴어로 스페인에서 로마문화를 구해냈고 스페인을 기독교화 시키는데 주력했다.
『어원론』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라틴어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을 심어주고 로마법의 재편성을 통하여 스페인에 지속적인 법적 공동체의 인식을 부여했고 이런 개혁을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를 정비하여 교회와 국가의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그 둘 간의 결합을 공표하였다. 그러나 \'자유민 사상\'을 가진 서고트족은 그들의 속성상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에 귀속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서고트족이 지배한 2세기 사이에 30명의 왕이 즉위하여 자신만의 독립영지를 가질 정도였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계속되었던 그들간의 분쟁은 결국 교회에게 결정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이 일은 훗날 스페인과 중남미 정치의 불변의 요소가 되었다.
5. 아랍 지배하의 스페인
622년 마호멧이 이끄는 이슬람 세력은 무어인들이 이베리아 반도 아래 아프리타 북부해안까지 영토를 넓혀나가게끔 했다. 확장 일로에 있던 이들에게 남은 일은 바로 위의 스페인으로 올라오는 것이었고 그런 일은 식은 죽 먹기처럼 쉬웠다. 711년 서고트족의 마지막 왕 로드리고는 세우따의 부왕이었던 돈 훌리안 백작의 반란을 막아내지 못했는데, 그들 간의 내분이야말로 무어인들에게 서고트왕국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주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고트족의 왕 에히까(Egica)의 아들 위띠사(Witiza)왕이 710년에 죽자 그의 아들을 세습시키려고 했던 세력은 710년에 왕권을 쥔 로드리고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위띠사의 아들들은 모로코의 정복자인 무사(Muza)에게 용병을 요청했고 무사의 부관인 타릭(Tarik)이 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과 이부 아랍 귀족으로 구성된 7,000명의 부대를 이끌고 스페인 땅으로 들어 왔다. 일설에 의하면 딸을 로드리고 왕에게 능욕당한 훌리안 백작은 왕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 군대의 수장 타릭에게 도움을 청했고 타릭의 군대가 스페인에 들어옴으로써 스페인내 무어인의 지배역사가 시작되었다. 여하튼 타릭과 연이은 무사에 의한 스페인 점령은 1492년까지 800년 동안 지속되었다. 무어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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