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무슨 생각으로 제 4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여 하느님을 섬길 최강의 무적 함대를 지휘하기로 결정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베네치아에 모인 십자군 전쟁 참가자들은 이 함대를 사용하는데 필요한 경제력이 없었다. 꾀 많고 눈이 먼 80세 노인단돌로 도제는 성지로 가기 전에 베네치아를 돕고 비용을 충당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렇게 해서 1203년 함대가 콘스탄티노플의 관문 골든 혼에 정박했다. 공격은 다음 해까지 계속됐고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단돌로는 라틴 제국을 세우고 꼭두각시 황제를 왕위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과 이후 도제에 임명된 사람들을 ‘십자군의 맹주이자 비잔틴 제국 절반의 통치자’ 라고 공표했다. 이는 십자군 전쟁으로 획득한 영토 중 베네치아가 차지하게 된 8분의 3에 해당했다. 단돌로가 어디까지 직접 관여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베네치아는 이제 교역의 제 1인자가 되어 번영했다. 아드리아 해를 직접 장악한 것은 물론, 콘스탄티노플과 흑해 연안뿐만 아니라 아드리아 해 여기저기에 기지를 두어 지중해 동부 전역에 마르코 성인의 깃발이 휘날렸다. 리알또 주변 시장은 물건들로 넘쳐났고 멀리 중국에서 온 상품도 있어 이 곳에서 하역했다가 다시 이탈리아와 유럽으로 운반했다.
전쟁과 평화, 흑사병
13세기에 흑해와 동지중해 연안에서 제노바의 입지가 커지자 베네치아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첫 번째 충돌은 팔레스타인 아코 해안에 있는 기독교인 거주지에서 두 진영 사이에 폭동이 일어나면서 발생했다. 이 싸움은 1258년 제노바가 아코 해안에서 불명예스럽게 퇴각하면서 끝났다.
제노바와의 갈등은 14세기에도 계속 되었다. 페라라 통치권에 대한 교황령과의 다툼도 계속되고 1310년에는 베네치아 내란이 발생했다. 이 내란은 가차없이 진압되고 후속 조치로 ‘10인 평의회 Consiglio dei Dieci’가 조직되어 치안을 관장했다. 이 의원회는 나중에 CIA 겸 내각의 역할 하고, ‘대평의회 Maggior Consiglio’에서 교대로 피선되는 의원들은 베네치아와 전 유럽에서 어느 경쟁국도 필적할 수 없는 정보망을 갖추었다. 또한 최초로 이탈리아 본토, 즉 트레비조와 그 주변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획득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싸움을 시작하기 전 이들 상선은 흑해에서 가장 비참한 것을 들여왔다. 1348년 흑사병을 가져 온 것이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베네치아도 엄청난 타격을 받아 매일 6백여 명이 죽어나갔다. 운하에서는 위 아래 할 것 없이 짐배가 바삐 움직였다.
두 강대국의 갈등은 1379년에 극에 달했다. 제노바 함대가 베네치아의 리도 섬 연안까지 침범해 들어와 코앞의 끼오지아를 점령했다. 빠도바와 헝가리도 제노바 대열에 끼어 베네치아의 영토를 넘나들었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1380년 끼오지아에서 제노바군을 무찔렀다.
터키의 진군
1453년 5월 29일 터키가 콘스탄티노플을 침략해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킬 무렵 베네치아는 모든 면에서 최고로 발달해 있었다. 제노바와의 끼오지아 전투 이후 베네치아는 해상 문제에 관한 한 대부분 끼어들지 않았다. 15세기 초 베네치아는 일련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동쪽으로는 고리찌아부터 서쪽으로는 베르가모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베네치아는 정복지에 대해 기존 법을 유지할 수 있게 함으로써 오랫동안 종복민의 지지를 받았다. 다른 이탈리아 독재자의 정복에 비하 변화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외당한 종복지의 귀족층은 베네치아에 대해 확실히 덜 열광했다. 이후 250여년 간 밀라노나 불만을 품은 이웃 도시 국가와 산발적인 전쟁을 치르기도 했지만 날개 달린 사자 베네치아의 법령 아래 대부분 평화로웠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자 그리스 피난민들이 베네치아로 밀려들었다. 베네치아가 그리스에서 가장 가깝기도 했지만 가장 관대한 나라(그리스 정교회를 관용했다)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의 대사들은 고심 끝에 교역 협정을 체결하고 의기 양양한 술탄 메멧 2세와도 겨우 계약을 맺지만 곧 이어 새로운 가혹한 현실에 부딪혔다. 1500년경 베네치아가 가진 그리스의 재산 대부분을 오스만 제국이 차지한 것이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세계를 발견하고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포르투갈을 출발해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했다는 소식에도 베네치아의 어두운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조만간 대서양 세력이 지중해 세력을 누르고 베네치아의 교역에 타격을 가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베네치아에 대항하는 깡브레 동맹의 결성은 더욱 목전의 문제로 되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베네치아가 너무 강해졌다고 판단하고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합스부르그 왕가의 막시밀리안 1세를 대신하여), 스페인 및 기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지지를 조장하고 있었다. 베네치아를 산산 조각 내는데 도와주면 이들 국가는 넓은 영토를 보상 받을 수 있었다. 1509년 4월 프랑스 군대가 베네치아로 진군했고 베네치아는 1년 안에 내륙 영토의 대부분을 빼앗겼다. 1516년 동맹이 와해되자 베네치아는 영토를 모두 회복했다.
그러나 가장 고요한 공화국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 국가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헨리 8세의 영국,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 스페인까지 확장하고 미국에 새로이 식민지를 건설하는 합스부르그 왕국과 같은 유럽의 거대한 민족국가에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강대국을 주변에 둔 베네치아는 생존하기 위해 어느 때 보다도 더 치밀하게 행동해야 했다. 그래서 무장 중립 정책을 택하고 유럽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려 애썼다.
터키가 동유럽 영토에 관여하고 있던 몇 년 동안 베네치아는 터키와의 마찰도 피할 수 있었다. 1537년 슐레이만 1세는 그리스의 코르푸 섬을 차지하려다가 실패하자 화가 나서 베네치아령 그리스 섬 몇 개와 펠로폰니소스에 남아있던 기지 두 곳을 연이어 집어삼켰다. 그가 키프로스마저 점령하자 결국 기독교 세력이 연합하여 들고 일어났다. 베네치아, 스페인, 교황령이 매년 함대를 조직해서 ‘터키’가 멸망할 때까지 싸우기로 맹세한 것이다. 1571년 돈 후안이 지휘하고 베네치아가 상당 부분을 부담한 거대한 연합 함대는 그리스 레판토 해전에서 투르크 족에게 승리를 거
베네치아는 이제 교역의 제 1인자가 되어 번영했다. 아드리아 해를 직접 장악한 것은 물론, 콘스탄티노플과 흑해 연안뿐만 아니라 아드리아 해 여기저기에 기지를 두어 지중해 동부 전역에 마르코 성인의 깃발이 휘날렸다. 리알또 주변 시장은 물건들로 넘쳐났고 멀리 중국에서 온 상품도 있어 이 곳에서 하역했다가 다시 이탈리아와 유럽으로 운반했다.
전쟁과 평화, 흑사병
13세기에 흑해와 동지중해 연안에서 제노바의 입지가 커지자 베네치아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첫 번째 충돌은 팔레스타인 아코 해안에 있는 기독교인 거주지에서 두 진영 사이에 폭동이 일어나면서 발생했다. 이 싸움은 1258년 제노바가 아코 해안에서 불명예스럽게 퇴각하면서 끝났다.
제노바와의 갈등은 14세기에도 계속 되었다. 페라라 통치권에 대한 교황령과의 다툼도 계속되고 1310년에는 베네치아 내란이 발생했다. 이 내란은 가차없이 진압되고 후속 조치로 ‘10인 평의회 Consiglio dei Dieci’가 조직되어 치안을 관장했다. 이 의원회는 나중에 CIA 겸 내각의 역할 하고, ‘대평의회 Maggior Consiglio’에서 교대로 피선되는 의원들은 베네치아와 전 유럽에서 어느 경쟁국도 필적할 수 없는 정보망을 갖추었다. 또한 최초로 이탈리아 본토, 즉 트레비조와 그 주변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획득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싸움을 시작하기 전 이들 상선은 흑해에서 가장 비참한 것을 들여왔다. 1348년 흑사병을 가져 온 것이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베네치아도 엄청난 타격을 받아 매일 6백여 명이 죽어나갔다. 운하에서는 위 아래 할 것 없이 짐배가 바삐 움직였다.
두 강대국의 갈등은 1379년에 극에 달했다. 제노바 함대가 베네치아의 리도 섬 연안까지 침범해 들어와 코앞의 끼오지아를 점령했다. 빠도바와 헝가리도 제노바 대열에 끼어 베네치아의 영토를 넘나들었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1380년 끼오지아에서 제노바군을 무찔렀다.
터키의 진군
1453년 5월 29일 터키가 콘스탄티노플을 침략해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킬 무렵 베네치아는 모든 면에서 최고로 발달해 있었다. 제노바와의 끼오지아 전투 이후 베네치아는 해상 문제에 관한 한 대부분 끼어들지 않았다. 15세기 초 베네치아는 일련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동쪽으로는 고리찌아부터 서쪽으로는 베르가모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베네치아는 정복지에 대해 기존 법을 유지할 수 있게 함으로써 오랫동안 종복민의 지지를 받았다. 다른 이탈리아 독재자의 정복에 비하 변화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외당한 종복지의 귀족층은 베네치아에 대해 확실히 덜 열광했다. 이후 250여년 간 밀라노나 불만을 품은 이웃 도시 국가와 산발적인 전쟁을 치르기도 했지만 날개 달린 사자 베네치아의 법령 아래 대부분 평화로웠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자 그리스 피난민들이 베네치아로 밀려들었다. 베네치아가 그리스에서 가장 가깝기도 했지만 가장 관대한 나라(그리스 정교회를 관용했다)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의 대사들은 고심 끝에 교역 협정을 체결하고 의기 양양한 술탄 메멧 2세와도 겨우 계약을 맺지만 곧 이어 새로운 가혹한 현실에 부딪혔다. 1500년경 베네치아가 가진 그리스의 재산 대부분을 오스만 제국이 차지한 것이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세계를 발견하고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포르투갈을 출발해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했다는 소식에도 베네치아의 어두운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조만간 대서양 세력이 지중해 세력을 누르고 베네치아의 교역에 타격을 가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베네치아에 대항하는 깡브레 동맹의 결성은 더욱 목전의 문제로 되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베네치아가 너무 강해졌다고 판단하고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합스부르그 왕가의 막시밀리안 1세를 대신하여), 스페인 및 기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지지를 조장하고 있었다. 베네치아를 산산 조각 내는데 도와주면 이들 국가는 넓은 영토를 보상 받을 수 있었다. 1509년 4월 프랑스 군대가 베네치아로 진군했고 베네치아는 1년 안에 내륙 영토의 대부분을 빼앗겼다. 1516년 동맹이 와해되자 베네치아는 영토를 모두 회복했다.
그러나 가장 고요한 공화국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 국가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헨리 8세의 영국,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 스페인까지 확장하고 미국에 새로이 식민지를 건설하는 합스부르그 왕국과 같은 유럽의 거대한 민족국가에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강대국을 주변에 둔 베네치아는 생존하기 위해 어느 때 보다도 더 치밀하게 행동해야 했다. 그래서 무장 중립 정책을 택하고 유럽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려 애썼다.
터키가 동유럽 영토에 관여하고 있던 몇 년 동안 베네치아는 터키와의 마찰도 피할 수 있었다. 1537년 슐레이만 1세는 그리스의 코르푸 섬을 차지하려다가 실패하자 화가 나서 베네치아령 그리스 섬 몇 개와 펠로폰니소스에 남아있던 기지 두 곳을 연이어 집어삼켰다. 그가 키프로스마저 점령하자 결국 기독교 세력이 연합하여 들고 일어났다. 베네치아, 스페인, 교황령이 매년 함대를 조직해서 ‘터키’가 멸망할 때까지 싸우기로 맹세한 것이다. 1571년 돈 후안이 지휘하고 베네치아가 상당 부분을 부담한 거대한 연합 함대는 그리스 레판토 해전에서 투르크 족에게 승리를 거
키워드
추천자료
[인문과학] 보험과 생활
유리의 성질과 파괴
일본 문화와 사회(일본 드라마와 영화)
비정성시 - 영화감상문
베를린 국제 영화제(The berlin Intertationnal Film Festival)
나트륨 영양교육 수업(자료)
나트륨 영양교육 수업(ppt자료)
독일의 역사
해양 대국 포르투갈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해를 중심으로-
공연예술 라 트라비아타 비교분석
[스웨덴정부, 스웨덴정부 정보화, 스웨덴정부 행정개혁, 스웨덴정부 여성정책, 스웨덴정부 사...
[세계문화기행] 이탈리아
마키아벨리 군주론을 읽고, 서평
(카페베네 마케팅케이스) 카페베네 성공전략과 마케팅사례분석및 카페베네 미래 마케팅전략 제언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