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후의 연극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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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근대 이후의 연극의 흐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차>
Ⅰ 머리말
Ⅱ 근대 초기의 연극
Ⅲ 1920년대 연극
Ⅳ 1930년대 연극
Ⅴ 1940년대 연극
Ⅵ 해방 후 암흑기의 연극
Ⅶ 현대의 연극
Ⅷ 맺음말
[참고 문헌]

본문내용

좌는 사실주의에 기저를 둔 멜로드라마를 전문으로 하는 극단이었고 동극좌는 역사극을 전문으로 하였으며 희극좌는 파스를 전문으로 하는 극단이었다. 그러나 3개의 단체를 동시에 운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며 대중들은 하나의 단체에만 관심을 둘 뿐 여러 극단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결국 희극좌가 동극좌와 병합되면서 호화선으로 재출범되었고 청춘좌와 함께 동양극장을 대표하는 2대 극단이 되었다. 호화선은 음악부를 증설하여 극과 음악의 조화를 꾀하고 단원을 보강하여 공연활동을 시작하였다. 초기에 동양극장은 개장 이후 적자공연이었으나 <단종애사>를 공연한 이후에 흑자공연으로 돌아섰으며 두 개의 전속극단이 연중무휴 전국 각지와 북만주까지 순회공연을 가지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임선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와 이서구의 <어머니의 힘>과 같은 공연이 여성 관객의 호응을 불러일으키면서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홍순언이 갑자기 요절하여 배구자가 경영권을 최독견에 일임하였고 결국 부도 처리되면서 동양극장의 운영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으며 여러 단원들은 새로 창단된 극단인 아랑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동양극장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여기에 새로 극장의 지배인인 된 김태윤은 연극전문인이 아니었으며 연극에 대한 애정도 없어 그 명성만을 유지한 채 상업극단으로 남게 되었다.
동양극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전용극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연극의 기술뿐만 아니라 직업극단화를 가능케 하는 등 연극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특히 근대극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던 홍해성이 동양극장에 자리를 굳히고 대중극의 연출가로 변신한 것은 우리 연극사에서 크게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당시 저질적인 대중극의 체질개선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홍해성의 풍부한 전문지식과 창조력은 다른 극단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한 수준 향상을 가져오게 되면서 건전하며 유익하고 재미있는 대중극의 창출로 이어지게 되고 동양극장 또한 우리나라 극장의 대명사는 물론 연극의 대중화와 신파극의 토착화, 대중극단 탄생의 기반을 제공하고 고정관객을 확보하면서 연극의 활성화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고 할 수 있다.
3) 역사극
3.1 운동과 역사 재고 작업을 통해서 민족의식이 높아졌으며 특히 3.1 운동은 민중들의 항일독립운동의 계기가 되었고 역사의식을 일깨웠다. 이와 함께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한국통사를 지어 우리 역사에 대한 주체적 인식을 만들고 민족사학을 형성하였으며 애국적 위인이나 명장들의 전기에 대한 독서열이 고양되어 역사 전기물들이 활발하게 창작되었다. 그러면서 민족적, 역사적 자각이 팽배하던 시기 상황에서 역사극이 1920년대 후반부터 흥행하기 시작한다. 역사극운동은 김진구가 주동하였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진구는 야담운동을 통해 민중의식을 계몽하고자 하였다. ‘야사(野史)가 모든 억압과 기위의 눈을 숨겨서 정말 민중의 의사와 그네의 실적을 적어 노흔 것’이기 때문에 ‘야담은 민중예술이오 민중오락물‘이라는 것이다. 또한 민족성과 역사를 동일시한 뒤 민족의 정신사적 근간으로 역사를 설정하고 역사는 민중의 역사인 야사가 중요하다는 논리를 강조하였다. 김진구, 「야담출현의 필요성」, 『동아일보』, 1928, 2.1 참조
이러한 야담운동은 조선시대극연구회의 결성으로 발전하였다. 조선시대극연구회는 김옥균의 포부를 그린<대무대의 붕괴>, 전봉준의 투쟁을 그린<반역자의 최후>라는 작품을 창작하여 순회공연 계획을 세웠으나 검열 중에 내용이 불온하다고 생각된 일제에 의해 불허가 되면서 공연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1920년 후반에 <임꺽정전>,<단종애사>등의 역사소설이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하면서 유치진, 임선규, 함세덕의 역사극이 대단한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유치진의 <마의태자와 낙랑공주>는 낙랑공주와 마의태자 사이의 인간적인 애정과 국운을 건 갈등을 중심으로 전개한 낭만적 역사극으로 당시 일제의 압제 하에서 신음하던 시기에 나라를 잃고 애통해 하는 마의태자의 설움을 우리 민중들의 울적한 가슴에 스며들면서 관객들의 호응을 받았다. 함세덕의 <낙화암>은 식민지시대 최고의 역사극으로 평가될 만큼 높은 평가를 받는다. <낙화암>은 백제의 멸망사를 왕실 중심으로 하여 연극화 시킨 것인데 백제 말기 왕실의 내부사정과 갈등을 개성적인 인물을 통해 현실감 있게 재구성한 점과 마지막까지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왕세자(융)와 왕세손(문사)의 애국적인 투지를 그려 놓은 점에서 창조성이 돋보인다. 특히 함세덕은 역사의식을 창조적으로 조화시켰으며 식민지 치하에서 점차 망각되어 가던 민족적 주체성과 역사의식을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차원에서 일깨우고 자각시키고자 하였기에 그러한 의도를 상당 부분 충족시킨 작품의 완성도는 높이 평가를 받았다.
당시 역사극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 두 입장이 드러난다. 민족주의 세력은 민족교육, 고전의 발굴, 한글운동에 힘썼고 사회주의 세력은 카프를 결성한 시기부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활동한다. 이 두 세력은 역사극의 형성에 있어서 작품의 성격을 결정하는 기반이 되었는데 민족주의 계열의 역사극은 일제 치하 현실에 대한 우의적인 반영으로 나타나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는 반면 프로계열의 역사극은 식민지 현실의 극복을 위해 혁명성을 내세웠다. 하지만 일제의 연극 검열이 강화되면서 점차 역사극의 목표는 탄압과 통제에 대응하여 올바른 역사인식을 표현해야 할 사명을 가지는 것이었고 이러한 시대적 요구가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는 작가의 역사의식의 달려있었다. 한국연극협회, 「한국현대연극 100년: 인물연극사」, 연극과 인간, 2009
그러나 연극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현실을 반영함으로써 점차 역사극은 현실도피적인 역사극으로 창작되었으며 1940년대 들어서 친일연극의 길을 걷기도 하였다.
4) 30년대 프롤레타리아 연극
한편 카프(KAPF)는 제1차 방향전환으로 카프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을 제명하고 제2차 방향전환으로 조직을 개편하여 문학, 연극, 영화, 미술, 음악의 다섯 부서를 두면서 카프 연극부는 임화를 중심으로 조선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카프의 재조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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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5.11.15
  • 저작시기20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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