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며-서낭제탈놀이
2. 여러 기원과 신화
3. 연희시기와 장소
3.1. 하회별신굿탈놀이
3.2. 강릉관노가면극
4. 전체과장
4.1. 하회별신굿탈놀이
4.2. 강릉관노가면극
5.인물의 역할 성격비교 -복색, 행동을 보고
5.1. 하회별신굿탈놀이
5.2. 강릉관노가면극
6. 탈과 춤사위 비교
7. 음악에 대해서
8. 비극성에 대해서
8.1. 하회별신굿탈놀이
8.2. 강릉관노가면극
9.특징분석과 해학, 풍자, 풍요, 벽사
10.연구사 현황-관노가면극
11. 나오며
※참고문헌
2. 여러 기원과 신화
3. 연희시기와 장소
3.1. 하회별신굿탈놀이
3.2. 강릉관노가면극
4. 전체과장
4.1. 하회별신굿탈놀이
4.2. 강릉관노가면극
5.인물의 역할 성격비교 -복색, 행동을 보고
5.1. 하회별신굿탈놀이
5.2. 강릉관노가면극
6. 탈과 춤사위 비교
7. 음악에 대해서
8. 비극성에 대해서
8.1. 하회별신굿탈놀이
8.2. 강릉관노가면극
9.특징분석과 해학, 풍자, 풍요, 벽사
10.연구사 현황-관노가면극
11. 나오며
※참고문헌
본문내용
문을 읽는 \'동제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 중심으로 무당이 주재하는 \'도당굿\'일 것이다. 그러나 유식동제보다 원초적인 것으로 축문도 없이 제주가 조용히 정성을 드린다는 \'산제(山祭)\'가 있다. 즉 산제와 당제·동제가 부락제의 기본유형이 된다. 이러한 부락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현재 서낭가면이 전해지고 있는 경북 안동시 하회동의 동제와 별신굿놀이이다. 하회동의 서낭신은 \'무진생서낭님\'이며, 이곳 서낭제의 평상제는 보통 동제(洞祭)라 부르고, 10년에 한 번씩 지내는 별신제(別神祭:별신굿) 또는 도신제(禱神祭)라 부르는 임시특별제가 있다가 1928년 이래 중단되었다. wikipedia.org. 하회별신굿 탈놀이
또한 강릉관노가면극의 기원은 대체로 3가지 기원설로 집약되는데, 김이사부 정복연회설, 부락제 연관설, 부락신화 연관설이다. 김이사부 정복연회설은 우산국 정복과 관련하여 연회를 기원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우산국은 지금의 을릉도로 이사부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정복한 이후 승전의 여흥으로 탈놀이를 했다는 것이다. 서낭제에서 연희되므로 토속적인 농경의례와 무속 서낭제와 긴밀하다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당초은 인간과 자연의 갈등을 주술적으로 해결하려는 굿이었으나 점차 인간과 인간들의 갈등을 예술적으로 전환하면서 탈놀이가 성립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강릉관노가면극에 대한 자료는 고려사(918~1392)에 고려 태조 왕건(918~943)때 강릉 사람 왕순식이 대관령에서 제사하였다는 기록에서 시원를 찾을 수 있으며,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추강(秋江) 남효온(1454~1493)의「추강냉화」에도 영동지역 사람들은 음력 4월~5월에 택일하여 산신제(山神祭)를 지내고 사흘동안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했다. 그리고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의 문집에도 대관령산신찬병서라는 글이 있는데 계묘년(1603) 5월에 잡희를 베풀어 신(神)을 즐겁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인 부락신화설은 강릉지방의 마을신화와 연관시켜 보는 것이다. 관노가면극의 등장인물인 양반, 광대, 소매각시, 시시딱딱이, 장자마리로 고중되어 이를 신화에 대입시켜보면 범일국사가 창건한 명주군 구정면 학산리의 굴산사 창설과 종주의 탄생설화, 대관령국사선낭신과 혼배한 여서낭신의 설화의 연희화로 양반과 소매각시로 분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설화는 하회별신굿탈놀이에서도 나타난다. 안동의 현지에도 서낭의 설화가 있는데, 하회의 서낭신은 의성 김씨 무진생 여신으로 열다섯에 남편과 사별하고 청상과부가 된 각시신이다. 각시신이 주신이 되기 이전에는 그녀의 시모가 되는 할미신이 맡았는데, 할미신의 신력이 떨어지자, 젊은 각시신을 주신으로 모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남편과 사별한 각시신을 달래기 위해 탈놀이에서 소의 고환을 잘라 바치거나 등장인물과 이성적 갈등과 성행위를 연출한다. 그리고 연희적 기원을 보면 그 채록본은 임동권 강릉단오제(1966. 8), 최상수산대, 성황신체가면극 연구(1942, 1958), 최철 영동민속지(1972), 장정룡 강릉관노가면극 연구(1989)이 있다. 추엽 융의 당시에 전승이 끊긴 탈놀이를 산대희라고 하며 일본 민속학지에 발표하였고, 강릉 가면극은 연희자들이 관노라는 것이 공개되자 전승상 큰 애로를 겪었다. 개화이후 관노가 없어진지 수십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관노가면극이라고 호칭함으로써 연희를 기피하는 것이다. 이전에 허균이 성소부부고에서 이에 대해 잡희라고 말하고, 강릉 향토지의 증수 임영지(1933)에서도 창우희 잡희라는 문구가 보인다. 즉 강릉가면극은 허균의 잡희에서 창우배로 다시 가면극으로 어휘가 바뀌면서 정립되었다. 허균이 본 잡희가 강릉가면극이 같은 것인지는 알수 없으나 그 역사는 단오제에 전승되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문화콘텐츠 닷컴과 서연호, 서낭굿 탈놀이, 장정룡 강릉관노가면극 연구, 장정룡, 강릉단오제 현장론 탐구, 장정룡, 강릉단오제 관노가면극 역사적 검토,를 서로 참고, 편집하였다.
3. 연희시기와 장소
3.1 하회가면극
하회마을의 지형은 연꽃이 물위에 떠 있는 모습이며, 마을을 감아도는 낙동강과 산줄기가 태극무늬를 이루고 있는 형국이라 한다. 동쪽으로 화산이 있고 서남북쪽으로는 낙동강이 굽이돌아 마을을 감싸고 있어 외부와 쉽게 통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이러한 지리적인 조건은 외부로부터 격리되어 있으며 고립되어 있어서 여러 차례에 걸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마을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원인이 되었다. 하회마을이 지닌 훌륭한 자연환경은 이 마을 사람들에게 유달리 풍성한 감성을 지니게 하였으며 하회별신굿탈놀이라는 불후의 걸작품을 잉태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탈춤은 서낭제탈놀이와 산대도감 계통의 탈놀이로 대별한다고 할 때 하회 별신굿 탈놀이는 서낭제탈놀이에 속하는 것으로써 별신굿이라는 종합적인 마을굿에 포함되면서도 연극적인 독립성을 뚜렷이 가진 놀이이다. 하회마을은 매년 정월 보름과 4월 초파일(8일)의 이틀에 걸쳐서 동제가 지내졌다. 이 마을의 성황신은 여성신으로서 무진생 성황님으로 불리나 이 성황신에게 매년 제사를 지내는 것을 동제(당제)라 하고 별신굿은 3년, 5년, 또는 10년에 한번씩 마을에 우환이 있거나 돌림병 등이 발생할 경우에 신탁(신내림)에 의해서 거행되었는데 이 때에는 탈놀이가 당제와 함께 행해진다. 별신굿은 강신-영신-오신-송신의 구조로 진행되며 탈놀이는 그 중 오신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신을 즐겁게 해드림으로써 마을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받으려고 했던 것이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1928년 무진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가 1973년 하회가면극 연구회에서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탈놀이는 1980년 11월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임재해, 하회탈 하회탈춤, 지식산업사, 2000., 안동문화연구소, 하회탈과 하회탈춤의 美學, 사계절출판사, 1999, 하회동탈박물관 http://www.maskmuseum.com등을 참고하였다.
3.2 강릉관노가면극
관노가면극은 단오제기간 중 5월 1일 본제 때부터 놀기 시작한다. 1928년 여름 아키바 다카시의 조사에 의하면 5월 1일
또한 강릉관노가면극의 기원은 대체로 3가지 기원설로 집약되는데, 김이사부 정복연회설, 부락제 연관설, 부락신화 연관설이다. 김이사부 정복연회설은 우산국 정복과 관련하여 연회를 기원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우산국은 지금의 을릉도로 이사부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정복한 이후 승전의 여흥으로 탈놀이를 했다는 것이다. 서낭제에서 연희되므로 토속적인 농경의례와 무속 서낭제와 긴밀하다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당초은 인간과 자연의 갈등을 주술적으로 해결하려는 굿이었으나 점차 인간과 인간들의 갈등을 예술적으로 전환하면서 탈놀이가 성립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강릉관노가면극에 대한 자료는 고려사(918~1392)에 고려 태조 왕건(918~943)때 강릉 사람 왕순식이 대관령에서 제사하였다는 기록에서 시원를 찾을 수 있으며,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추강(秋江) 남효온(1454~1493)의「추강냉화」에도 영동지역 사람들은 음력 4월~5월에 택일하여 산신제(山神祭)를 지내고 사흘동안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했다. 그리고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의 문집에도 대관령산신찬병서라는 글이 있는데 계묘년(1603) 5월에 잡희를 베풀어 신(神)을 즐겁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인 부락신화설은 강릉지방의 마을신화와 연관시켜 보는 것이다. 관노가면극의 등장인물인 양반, 광대, 소매각시, 시시딱딱이, 장자마리로 고중되어 이를 신화에 대입시켜보면 범일국사가 창건한 명주군 구정면 학산리의 굴산사 창설과 종주의 탄생설화, 대관령국사선낭신과 혼배한 여서낭신의 설화의 연희화로 양반과 소매각시로 분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설화는 하회별신굿탈놀이에서도 나타난다. 안동의 현지에도 서낭의 설화가 있는데, 하회의 서낭신은 의성 김씨 무진생 여신으로 열다섯에 남편과 사별하고 청상과부가 된 각시신이다. 각시신이 주신이 되기 이전에는 그녀의 시모가 되는 할미신이 맡았는데, 할미신의 신력이 떨어지자, 젊은 각시신을 주신으로 모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남편과 사별한 각시신을 달래기 위해 탈놀이에서 소의 고환을 잘라 바치거나 등장인물과 이성적 갈등과 성행위를 연출한다. 그리고 연희적 기원을 보면 그 채록본은 임동권 강릉단오제(1966. 8), 최상수산대, 성황신체가면극 연구(1942, 1958), 최철 영동민속지(1972), 장정룡 강릉관노가면극 연구(1989)이 있다. 추엽 융의 당시에 전승이 끊긴 탈놀이를 산대희라고 하며 일본 민속학지에 발표하였고, 강릉 가면극은 연희자들이 관노라는 것이 공개되자 전승상 큰 애로를 겪었다. 개화이후 관노가 없어진지 수십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관노가면극이라고 호칭함으로써 연희를 기피하는 것이다. 이전에 허균이 성소부부고에서 이에 대해 잡희라고 말하고, 강릉 향토지의 증수 임영지(1933)에서도 창우희 잡희라는 문구가 보인다. 즉 강릉가면극은 허균의 잡희에서 창우배로 다시 가면극으로 어휘가 바뀌면서 정립되었다. 허균이 본 잡희가 강릉가면극이 같은 것인지는 알수 없으나 그 역사는 단오제에 전승되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문화콘텐츠 닷컴과 서연호, 서낭굿 탈놀이, 장정룡 강릉관노가면극 연구, 장정룡, 강릉단오제 현장론 탐구, 장정룡, 강릉단오제 관노가면극 역사적 검토,를 서로 참고, 편집하였다.
3. 연희시기와 장소
3.1 하회가면극
하회마을의 지형은 연꽃이 물위에 떠 있는 모습이며, 마을을 감아도는 낙동강과 산줄기가 태극무늬를 이루고 있는 형국이라 한다. 동쪽으로 화산이 있고 서남북쪽으로는 낙동강이 굽이돌아 마을을 감싸고 있어 외부와 쉽게 통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이러한 지리적인 조건은 외부로부터 격리되어 있으며 고립되어 있어서 여러 차례에 걸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마을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원인이 되었다. 하회마을이 지닌 훌륭한 자연환경은 이 마을 사람들에게 유달리 풍성한 감성을 지니게 하였으며 하회별신굿탈놀이라는 불후의 걸작품을 잉태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탈춤은 서낭제탈놀이와 산대도감 계통의 탈놀이로 대별한다고 할 때 하회 별신굿 탈놀이는 서낭제탈놀이에 속하는 것으로써 별신굿이라는 종합적인 마을굿에 포함되면서도 연극적인 독립성을 뚜렷이 가진 놀이이다. 하회마을은 매년 정월 보름과 4월 초파일(8일)의 이틀에 걸쳐서 동제가 지내졌다. 이 마을의 성황신은 여성신으로서 무진생 성황님으로 불리나 이 성황신에게 매년 제사를 지내는 것을 동제(당제)라 하고 별신굿은 3년, 5년, 또는 10년에 한번씩 마을에 우환이 있거나 돌림병 등이 발생할 경우에 신탁(신내림)에 의해서 거행되었는데 이 때에는 탈놀이가 당제와 함께 행해진다. 별신굿은 강신-영신-오신-송신의 구조로 진행되며 탈놀이는 그 중 오신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신을 즐겁게 해드림으로써 마을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받으려고 했던 것이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1928년 무진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가 1973년 하회가면극 연구회에서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탈놀이는 1980년 11월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임재해, 하회탈 하회탈춤, 지식산업사, 2000., 안동문화연구소, 하회탈과 하회탈춤의 美學, 사계절출판사, 1999, 하회동탈박물관 http://www.maskmuseum.com등을 참고하였다.
3.2 강릉관노가면극
관노가면극은 단오제기간 중 5월 1일 본제 때부터 놀기 시작한다. 1928년 여름 아키바 다카시의 조사에 의하면 5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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