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수 있었다.
3) 서방과 그리스·로마문화의 연결, 중세 기독교 문화 창출
(1) 서방과 그리스-로마문화의 연결
- 수도원은 유럽의 대학을 탄생시키게 한 기반이자 모태였다. 즉 현재 유럽의 대학들의 전신이 수도원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중점인 학문은 신학이 지배적이었지만, 그만큼 학문영역에서의 수도원이 가진 영향력은 고대 그리스-로마 이후 유럽학문의 뿌리를 공고히 했다는 점에서 매우 크다.
- 여러 철학과 종교에 관한 다국어 문헌들을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전문적으로 각 지역의 말(현재의 프랑스어, 독일어 등의 게르만-로망스계열의 언어)번역을 담당하였다. 특히 그리스-로마 신화와 철학 등을 연구하기 위해 그리스어, 라틴어뿐만 아니라 아랍어 등의 번역을 하였고 이 당시의 번역물들은 이렇게 여러 차례 중역(重譯)을 거쳤다. 이는 번역학이라는 학문분야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수도원은 바로 이런 양질의 번역물들을 양산하는 본거지였다.
- 번역과 동시에 고문서들을 공동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필사본작업도 이루어졌다. 이는 후에 성경을 배포하기 위해 (금속)활자에 대한 필요성이 나타났고 결국 15세기 무렵에 구텐베르크 성경 위키백과,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http://ko.wikipedia.org/wiki/%EC%9A%94%ED%95%98%EB%84%A4%EC%8A%A4_%EA%B5%AC%ED%85%90%EB%B2%A0%EB%A5%B4%ED%81%AC
이 탄생한다. 수도원이 직접적인 공을 들인 건 아니지만 배경에 대한 조건을 제공하였다.
- 필사작업으로 자료가 매우 풍성해진 수도원의 도서관은 학교와 연계해 학문 발달에 기여했고, 12세기 초중반까지 생겨난 많은 조형예술 학교들 중 수도원에 근거를 둔 학교들이 가장 세련되고 독자적인 양식을 창조했다.
-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기독교 논리와 현 교리들은 수도원에서 외부로부터의 보호를 통해 연구되고 꾸준히 후학이 양성되어왔다는 점에서 수도원은 거대한 연구소이자 학교였다. 수도원은 중세가 끝난 이후 대학이 태동하는 데에 일정정도 기여하였던 선례라고 할 수 있다.
(2) 12세기 르네상스와 수도원
- 중세를 “신이 인간을 지배한 시대”라고 말할 정도로 인간의 가치가 그토록 상당히 배제된 때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론 바로 그 신학연구를 위해 과거 ‘인간’이라는 코드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로마 신화와 고대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르네상스 시대에 ‘인간가치(Humanism)’라는 사상을 제공해준 실마리 역할을 하였다.
- 12~13세기에 걸쳐 일어난 ‘수도원 부흥운동’은 전사회적인 영역에서의 발전과 더불어 일어난다. 수도원의 역할과 기능은 이때를 최고조로 정점에 찍는다. 이 당시는 유럽의 왕권들도 강화되고 상호 경쟁함에 따라 문화 및 예술적인 분야의 우위를 위해 수도원들을 더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 또한 과거 게르만-노르만족의 대이동 같은 인구적인 면에서의 엄청난 변화보다 안정적인 증가도 수도원의 기능이 강화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이다. 이는 곧 초기 수도원이 가진 폐쇄성도 점차적으로 약해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 13세기 말과 14세기 초 무렵, 수도원이 로마 교황의 권위실추와 영주의 몰락과 더불어 더 폐쇄적이고 교회와 더불어 시민들을 착취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많은 수도원들이 초기 때와는 달리 학자와 기술자등의 사람들을 외부로 방출하게 되는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이는 곧 수도원의 몰락이 중세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르네상스 시대를 탄생시키게 하는 마지막 마무리 단계가 된다. 즉 수도원은 중세의 시작과 끝인 동시에, 르네상스의 시작과도 같다.
- 수도원의 영적 열정은 건축에 대한 열정으로 드러났고, 건축은 수도사들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많은 수도사들은 공예예술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고, 전기와 역사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12세기와 13세기 종교적 감정의 중심에 인간 그리스도와 동정녀 마리아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그것과 결부된 인간적인 가치들을 인정하는 경향이 일어났다. 이러한 종교관은 지금 우리가 인식하는 휴머니즘의 원류에 해당한다.
Ⅴ. 맺음말
중세수도원의 경우, 일반인들이 기존에 알고 있는 폐쇄적인 이미지와 고루한 특성과는 달리, 중세를 뛰어넘어 우리가 문화부흥과 인간 중심의 시기라는 르네상스 시기가 탄생할 수 있는 실제적인 토양을 제공한 주요 정신적-문화적인 거점이었다. 그 만큼 수도원이라는 공간은 역동적이고 또한 중세 유럽을 호령할 정도로 교세가 엄청난 만큼이나 다양한 계파도 많았다. 즉 다양성과 개방성이라는 기존 이미지와는 배치되는 특성을 가진 것이 수도원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특히 수도원은 서로마 멸망 이후 중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중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상징으로, 수도원의 세력과 영향력 확장 그리고 수축 등은 중세의 역사적인 맥락과 함께 하고 그 흐름에 정확히 일치한다. 수도원에서 이룬 여러 가지 학문적, 종교적인 의미는 비단 그러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12세기 이후 발현하는 르네상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중세의 끝을 맺은 수도원은 그렇다고 모두 사라지거나 갑작스레 그 영향력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교세와 한 시대를 주름잡던 중심축에서 멀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현재까지도 유럽인들의 정신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기독교 그리고 그것을 지탱하는 한 기둥인 수도원은 그 역사와 전통을 그대로 유지한 채 기독교문화와 중세유럽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살아있는 화석이자 여전히 진행 중인 역사체(歷史體)라 할 수 있다.
Ⅵ. 참고문헌
브라이언 타이어니, 이연규 옮김, 『서양 중세사』, 집문당, 2010.
앨리스터 맥그래스, 소기천外 옮김, 『신학의 역사』, 지와 사랑, 2001.
조셉 린치, 심창섭·채천석 옮김, 『중세 교회사』, 솔로몬, 2010.
G. R. 에반스, 이종인 옮김, 『중세의 그리스도교』, 예경, 2006.
최형걸, 『수도원의 역사』, 살림, 2004
크리스토퍼 브룩, 이한우 옮김, 『수도원의 탄생』, 청년사, 2005
프레데릭 아르츠, 홍성표 옮김,『중세 유럽의 문화 유산』, 1993
3) 서방과 그리스·로마문화의 연결, 중세 기독교 문화 창출
(1) 서방과 그리스-로마문화의 연결
- 수도원은 유럽의 대학을 탄생시키게 한 기반이자 모태였다. 즉 현재 유럽의 대학들의 전신이 수도원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중점인 학문은 신학이 지배적이었지만, 그만큼 학문영역에서의 수도원이 가진 영향력은 고대 그리스-로마 이후 유럽학문의 뿌리를 공고히 했다는 점에서 매우 크다.
- 여러 철학과 종교에 관한 다국어 문헌들을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전문적으로 각 지역의 말(현재의 프랑스어, 독일어 등의 게르만-로망스계열의 언어)번역을 담당하였다. 특히 그리스-로마 신화와 철학 등을 연구하기 위해 그리스어, 라틴어뿐만 아니라 아랍어 등의 번역을 하였고 이 당시의 번역물들은 이렇게 여러 차례 중역(重譯)을 거쳤다. 이는 번역학이라는 학문분야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수도원은 바로 이런 양질의 번역물들을 양산하는 본거지였다.
- 번역과 동시에 고문서들을 공동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필사본작업도 이루어졌다. 이는 후에 성경을 배포하기 위해 (금속)활자에 대한 필요성이 나타났고 결국 15세기 무렵에 구텐베르크 성경 위키백과,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http://ko.wikipedia.org/wiki/%EC%9A%94%ED%95%98%EB%84%A4%EC%8A%A4_%EA%B5%AC%ED%85%90%EB%B2%A0%EB%A5%B4%ED%81%AC
이 탄생한다. 수도원이 직접적인 공을 들인 건 아니지만 배경에 대한 조건을 제공하였다.
- 필사작업으로 자료가 매우 풍성해진 수도원의 도서관은 학교와 연계해 학문 발달에 기여했고, 12세기 초중반까지 생겨난 많은 조형예술 학교들 중 수도원에 근거를 둔 학교들이 가장 세련되고 독자적인 양식을 창조했다.
-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기독교 논리와 현 교리들은 수도원에서 외부로부터의 보호를 통해 연구되고 꾸준히 후학이 양성되어왔다는 점에서 수도원은 거대한 연구소이자 학교였다. 수도원은 중세가 끝난 이후 대학이 태동하는 데에 일정정도 기여하였던 선례라고 할 수 있다.
(2) 12세기 르네상스와 수도원
- 중세를 “신이 인간을 지배한 시대”라고 말할 정도로 인간의 가치가 그토록 상당히 배제된 때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론 바로 그 신학연구를 위해 과거 ‘인간’이라는 코드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로마 신화와 고대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르네상스 시대에 ‘인간가치(Humanism)’라는 사상을 제공해준 실마리 역할을 하였다.
- 12~13세기에 걸쳐 일어난 ‘수도원 부흥운동’은 전사회적인 영역에서의 발전과 더불어 일어난다. 수도원의 역할과 기능은 이때를 최고조로 정점에 찍는다. 이 당시는 유럽의 왕권들도 강화되고 상호 경쟁함에 따라 문화 및 예술적인 분야의 우위를 위해 수도원들을 더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 또한 과거 게르만-노르만족의 대이동 같은 인구적인 면에서의 엄청난 변화보다 안정적인 증가도 수도원의 기능이 강화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이다. 이는 곧 초기 수도원이 가진 폐쇄성도 점차적으로 약해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 13세기 말과 14세기 초 무렵, 수도원이 로마 교황의 권위실추와 영주의 몰락과 더불어 더 폐쇄적이고 교회와 더불어 시민들을 착취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많은 수도원들이 초기 때와는 달리 학자와 기술자등의 사람들을 외부로 방출하게 되는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이는 곧 수도원의 몰락이 중세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르네상스 시대를 탄생시키게 하는 마지막 마무리 단계가 된다. 즉 수도원은 중세의 시작과 끝인 동시에, 르네상스의 시작과도 같다.
- 수도원의 영적 열정은 건축에 대한 열정으로 드러났고, 건축은 수도사들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많은 수도사들은 공예예술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고, 전기와 역사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12세기와 13세기 종교적 감정의 중심에 인간 그리스도와 동정녀 마리아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그것과 결부된 인간적인 가치들을 인정하는 경향이 일어났다. 이러한 종교관은 지금 우리가 인식하는 휴머니즘의 원류에 해당한다.
Ⅴ. 맺음말
중세수도원의 경우, 일반인들이 기존에 알고 있는 폐쇄적인 이미지와 고루한 특성과는 달리, 중세를 뛰어넘어 우리가 문화부흥과 인간 중심의 시기라는 르네상스 시기가 탄생할 수 있는 실제적인 토양을 제공한 주요 정신적-문화적인 거점이었다. 그 만큼 수도원이라는 공간은 역동적이고 또한 중세 유럽을 호령할 정도로 교세가 엄청난 만큼이나 다양한 계파도 많았다. 즉 다양성과 개방성이라는 기존 이미지와는 배치되는 특성을 가진 것이 수도원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특히 수도원은 서로마 멸망 이후 중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중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상징으로, 수도원의 세력과 영향력 확장 그리고 수축 등은 중세의 역사적인 맥락과 함께 하고 그 흐름에 정확히 일치한다. 수도원에서 이룬 여러 가지 학문적, 종교적인 의미는 비단 그러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12세기 이후 발현하는 르네상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중세의 끝을 맺은 수도원은 그렇다고 모두 사라지거나 갑작스레 그 영향력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교세와 한 시대를 주름잡던 중심축에서 멀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현재까지도 유럽인들의 정신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기독교 그리고 그것을 지탱하는 한 기둥인 수도원은 그 역사와 전통을 그대로 유지한 채 기독교문화와 중세유럽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살아있는 화석이자 여전히 진행 중인 역사체(歷史體)라 할 수 있다.
Ⅵ. 참고문헌
브라이언 타이어니, 이연규 옮김, 『서양 중세사』, 집문당, 2010.
앨리스터 맥그래스, 소기천外 옮김, 『신학의 역사』, 지와 사랑, 2001.
조셉 린치, 심창섭·채천석 옮김, 『중세 교회사』, 솔로몬, 2010.
G. R. 에반스, 이종인 옮김, 『중세의 그리스도교』, 예경, 2006.
최형걸, 『수도원의 역사』, 살림, 2004
크리스토퍼 브룩, 이한우 옮김, 『수도원의 탄생』, 청년사, 2005
프레데릭 아르츠, 홍성표 옮김,『중세 유럽의 문화 유산』,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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