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서론
1. 연구목적
Ⅱ. 고려속요의 특징 및 조선시대 악장가사에 실린 고려가요
1. 고려속요의 특징
2. 조선시대 악장가사에 실린 고려속요
Ⅲ. <쌍화점>의 고려, 조선, 현대 시대상을 반영한 작품 해석
1. 고려의 시대상을 반영한 작품해석
Ⅳ. 결론
Ⅴ. 참고문헌
1. 연구목적
Ⅱ. 고려속요의 특징 및 조선시대 악장가사에 실린 고려가요
1. 고려속요의 특징
2. 조선시대 악장가사에 실린 고려속요
Ⅲ. <쌍화점>의 고려, 조선, 현대 시대상을 반영한 작품 해석
1. 고려의 시대상을 반영한 작품해석
Ⅳ. 결론
Ⅴ. 참고문헌
본문내용
을 파견하고 만호부를 설치에 군사조직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원의 간섭기 동안 새로운 권력 지배층이 등장하는데 바로 권문세족이다. 음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고, 대토지의 농장 경영으로 일반 백성들이 노비로 전락하게 된다. 이에 따라 왕권은 날로 약화되었다. 한편 고려의 여성들을 원으로 끌고 가는 공녀제도로 인해 고려후기에는 남녀사이나 가족간의 헤어짐은 물론 사회 전체에 불가항력적인 이별이 많았다. 이러한 역사적 정황으로 보아 <쌍화점>, <서경별곡>, <만전춘별사>와 같이 실연이나 사랑과 이별의 정서의 애정가요가 탄생한 것이다.
고려의 귀족문화
고려 초기 태조 왕건은 민심 수습을 위한 수단으로 불교를 지원하는데 훈요10조 고려 태조가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해 942년(태조 25)에 몸소 지은 열 가지 유훈(遺訓).
훈요1조: 국가의 대업은 여러 부처의 호위를 받아야 하므로 선(禪)·교(敎) 사원을 개창한 것이니, 후세의 간신(姦臣)이 정권을 잡고 승려들의 간청에 따라 각기 사원을 경영, 쟁탈하지 못하게 하라.
훈요2조: 신설한 사원은 (신라 말의) 도선(道詵)이 산수의 순(順)과 역(逆)을 점쳐놓은 데 따라 세운 것이다(즉『도선비기(道詵秘記)』에 점쳐놓은 산수순역에 의하여 세운 것이라는 뜻). 그의 말에, “정해놓은 이외의 땅에 함부로 절을 세우면 지덕(지력)을 손상하고 왕업이 깊지 못하리라” 하였다. 후세의 국왕·공후(公侯)·후비(后妃)·조신 들이 각기 원당(願堂)을 세운다면 큰 걱정이다. 신라 말에 사탑을 다투어 세워 지덕을 손상하여 나라가 망한 것이니, 어찌 경계하지 아니하랴.
훈요6조: 나의 소원은 연등〔燃燈會〕과 팔관〔八關會〕에 있는 바, 연등은 부처를 제사하고, 팔관은 하늘과 5악(岳)·명산·대천·용신(龍神) 등을 봉사하는 것이니, 후세의 간신이 신위(神位)와 의식절차의 가감(加減)을 건의하지 못하게 하라. 나도 마음속에 행여 회일(會日)이 국기(國忌: 황실의 祭日)와 서로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니, 군신이 동락하면서 제사를 경건히 행하라
훈요십조 [Hunyosipjo, 訓要十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
에 잘 나타나 있다. 불교는 광종 때 승과제도를 통해 승려의 지위를 보장하는가하면 국교(國敎)로서 크게 발전한다. 사원에 토지를 하사하고 세금을 걷지 않자 훗날 사원의 부패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된다. 고려사회는 이면으로는 불교를 지도 이념으로 삼지만 표면적으로는 유교적 전통이 보존되었다. 또한 당시 중국에서 성행했던 도교적 문화가 그대로 도입되어 사상이 다양해졌다. 승려들의 타락은 날이갈수록 심해졌다. 승려 중에는 사찰에 공을 빌러 간 규수나 부녀자들과 음란한 행동을 벌여 비난을 받은 자가 많았다. 이미 고려사회에는 상층의 지배계급으로부터 시작하여 하층 민중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향락적, 퇴폐적 행태를 즐기는 등 불교가 종교적인 사상으로서의 제 역할을 더 이상 하지 못했다. 이러한 불교에 대해 점차 기대를 할 수 없었던 고려인들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승려들의 음란행위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노래가 성행하게 되었는데 <쌍화점> 제2연에 잘 표현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불교와 유교가 공존하는 것이 고려시대의 특징이다. 최승로는 정치 이념으로 유교를 주장하였고 성종 때 이를 받아들여 고려는 중앙에 국립학교인 국자감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향교를 설치한다. 불교가 퇴폐적으로 변모하는 동안 유교 또한 과거제도로 귀족층의 전유물이 되었을 뿐 고려인들에게 활력을 불어 넣지는 못했다.
작품해석
쌍화점(雙花店)
雙花店에 雙花사라 가고신
回回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이 말미 이 店 밧긔 나명들명
죠고맛감 삿기광대 네 마리라 호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자리예 나도 자라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잔 티 거츠니 업다
三藏寺애 블 혀라 가고신
그뎔 社主ㅣ 내 손모글 주여이다
이 말미 이 뎔 밧긔 나명들명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간 삿기上座ㅣ 네 마리라 호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자리예 나도 자라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잔 티 거츠니 업다
드레우므레 므를 길라 가고신
우믓龍이 내 손모글 주여이다
이 말미 이 우믈 밧긔 나명들명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간 드레바가 네 마리라 호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자리예 나도 자라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잔티 거츠니 업다
술지
고려의 귀족문화
고려 초기 태조 왕건은 민심 수습을 위한 수단으로 불교를 지원하는데 훈요10조 고려 태조가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해 942년(태조 25)에 몸소 지은 열 가지 유훈(遺訓).
훈요1조: 국가의 대업은 여러 부처의 호위를 받아야 하므로 선(禪)·교(敎) 사원을 개창한 것이니, 후세의 간신(姦臣)이 정권을 잡고 승려들의 간청에 따라 각기 사원을 경영, 쟁탈하지 못하게 하라.
훈요2조: 신설한 사원은 (신라 말의) 도선(道詵)이 산수의 순(順)과 역(逆)을 점쳐놓은 데 따라 세운 것이다(즉『도선비기(道詵秘記)』에 점쳐놓은 산수순역에 의하여 세운 것이라는 뜻). 그의 말에, “정해놓은 이외의 땅에 함부로 절을 세우면 지덕(지력)을 손상하고 왕업이 깊지 못하리라” 하였다. 후세의 국왕·공후(公侯)·후비(后妃)·조신 들이 각기 원당(願堂)을 세운다면 큰 걱정이다. 신라 말에 사탑을 다투어 세워 지덕을 손상하여 나라가 망한 것이니, 어찌 경계하지 아니하랴.
훈요6조: 나의 소원은 연등〔燃燈會〕과 팔관〔八關會〕에 있는 바, 연등은 부처를 제사하고, 팔관은 하늘과 5악(岳)·명산·대천·용신(龍神) 등을 봉사하는 것이니, 후세의 간신이 신위(神位)와 의식절차의 가감(加減)을 건의하지 못하게 하라. 나도 마음속에 행여 회일(會日)이 국기(國忌: 황실의 祭日)와 서로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니, 군신이 동락하면서 제사를 경건히 행하라
훈요십조 [Hunyosipjo, 訓要十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
에 잘 나타나 있다. 불교는 광종 때 승과제도를 통해 승려의 지위를 보장하는가하면 국교(國敎)로서 크게 발전한다. 사원에 토지를 하사하고 세금을 걷지 않자 훗날 사원의 부패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된다. 고려사회는 이면으로는 불교를 지도 이념으로 삼지만 표면적으로는 유교적 전통이 보존되었다. 또한 당시 중국에서 성행했던 도교적 문화가 그대로 도입되어 사상이 다양해졌다. 승려들의 타락은 날이갈수록 심해졌다. 승려 중에는 사찰에 공을 빌러 간 규수나 부녀자들과 음란한 행동을 벌여 비난을 받은 자가 많았다. 이미 고려사회에는 상층의 지배계급으로부터 시작하여 하층 민중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향락적, 퇴폐적 행태를 즐기는 등 불교가 종교적인 사상으로서의 제 역할을 더 이상 하지 못했다. 이러한 불교에 대해 점차 기대를 할 수 없었던 고려인들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승려들의 음란행위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노래가 성행하게 되었는데 <쌍화점> 제2연에 잘 표현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불교와 유교가 공존하는 것이 고려시대의 특징이다. 최승로는 정치 이념으로 유교를 주장하였고 성종 때 이를 받아들여 고려는 중앙에 국립학교인 국자감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향교를 설치한다. 불교가 퇴폐적으로 변모하는 동안 유교 또한 과거제도로 귀족층의 전유물이 되었을 뿐 고려인들에게 활력을 불어 넣지는 못했다.
작품해석
쌍화점(雙花店)
雙花店에 雙花사라 가고신
回回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이 말미 이 店 밧긔 나명들명
죠고맛감 삿기광대 네 마리라 호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자리예 나도 자라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잔 티 거츠니 업다
三藏寺애 블 혀라 가고신
그뎔 社主ㅣ 내 손모글 주여이다
이 말미 이 뎔 밧긔 나명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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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고맛간 삿기上座ㅣ 네 마리라 호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자리예 나도 자라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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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우므레 므를 길라 가고신
우믓龍이 내 손모글 주여이다
이 말미 이 우믈 밧긔 나명들명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간 드레바가 네 마리라 호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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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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