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6세기 호남 성리학
16세기 황룡강 유역의 조선 선비들
16세기 황룡강 유역의 조선 선비들
본문내용
으로 알려져 있다. 어렸을 때부터 용감했을 뿐 아니라 학문도 깊어 주변의 부러움을 샀으며 문무를 두루 갖춰 권율과 인연으로 의병에 투신했던 의로운 선비였다.
당시 광주목사로 부임했던 권율은 그의 명성을 듣고 만나기를 청해 그의 역량이 소문과 같은 것을 확인한 후 지근거리에 두고 친교를 나눴다. 학문을 논했을 뿐 아니라 무예 겨루기를 즐겼다. 의기를 갖춘 권율이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자 그는 권율의 막하에 들어가 앞장서서 왜군과 싸웠다. 권율이 피로써 맹세하고 있는 힘을 다해 왜군을 함께 무찌르자고 호소하자 1천 5백여 명의 의병이 모였다. 광주 관내 5백명, 전라도 인근 1천 명이었다. 광주공원에서 광주향교 가는 길 오른편 기슭 철제계단을 올라가면 비석 20여기가 있다. 이 중 맨 앞줄 은행나무 바로 앞에 광주목사 권율과 관련된 비가 하나 있다. 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都元帥忠莊權公倡義碑이다. 이 비의 옆면 두 곳에 권율과 같이 전투에 참여한 인사의 명단이 적혀 있다. 김극추의 이름이 올려있는 것은 당연하다.
『호남절의록』에는 1592년 7월 전북 금산 근처의 이치梨峙 전투에 참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 훈상으로 훈련원주부에 임명되었다고 했다. 『충의사록』에서는 자세하게 이치전투에서 고을 장정들을 인솔하여 영정곡永貞谷에 복병하였다가 큰 전과를 올려 훈련원 주부에 임명된 뒤 행주전투에 참전하여 끝까지 싸워 큰 공을 세웠다고 기록했다. 그 뒤에 한성참군이 되었다가 정우위별무사로 선별되었다. 권율 막하에 다시 들어가 활약할 때 정충신, 이충립, 고성후, 이완근, 이세환, 박대수, 김치원 등과 광주 8장사의 한사람으로 꼽혔다.
그는 행주전투 이후 특진하여 내직으로 병조좌랑, 군기첨정을 지냈고 외직으로 경성판관, 해미현감을 거쳐 영천군수로 있을 때 그를 시기하는 자들의 모함으로 파면을 당했다. 그를 따르던 군민들의 탄원으로 다시 군자감정이 되었다. 1605년에 선무후종3등공신에 책록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입은 상처가 회복되지 않아 1610년 1월 9일에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후에 좌승지로 증직되고 정려를 명하여 광산구 우산동에 있는 삼강정려에 모셔졌으나 주택단지에 편입됨에 따라 현재는 이설되었다. 충남 금산 금곡사에 배향되었다.
22. 양산룡(1552∼1597)
본관은 제주. 자는 우상宇翔이다. 부친은 송천 양응정이며 어머니는 죽산박씨로 판관 박중윤의 딸 사이에 차남으로 1552년 박뫼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5∼16세부터 문장이 뛰어났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41세에 임진왜란을 맞게 되자 김천일 휘하에 들어가서 아우인 산숙을 부장으로 산룡을 운량장運糧將, 그의 아들 상건을 종사관으로 임명하였다. 얼마 후 아우인 양산숙梁山璹이 진주 남강에 몸을 던져 절사하였다는 비보를 듣고 달려가 시신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초혼장招魂葬으로 아버지 양응정의 묘 아래에 장사하고 모친의 슬픔을 달래는데 온갖 효성을 다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군의 횡포가 극심하자 피난을 위해 일가족을 배에싣고 무안의 삼향포(三鄕浦. 지금의 몽탄강)에 다다랐을 때 적선이 들이닥쳐 화를 당하게 되자 적을 크게 꾸짖고는 대성통곡을 하면서 어머니 죽산박씨를 모시고 바다에 뛰어들어 절사하였다. 1635년 나라에서는 양산룡에 대하여 효자 정려를 내렸다.
23. 류휘진(1556∼1593)
조선 중기 무신. 본관은 서산瑞山이고 유곡동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거의하여 초토사 고경명 막하에 들어가 병량막취의병장兵糧幕聚義兵將으로 활약하였으며 그 후 강화도에서의 전공으로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 벼슬이 제수되었다. 1593년 6월에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진주성을 침공할 때 김천일과 같이 순절하니 호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충의忠毅 시호가 내려졌다.
24. 노재 배승무(1559∼1593)
본관은 달성이며 호는 노재이다. 조선 1559(명종14년)년 동곡 수성동에서 태어났다. 율곡 이이의 문하생으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승문원 정자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 장군과 함께 의거하여 영호남 각지에서 격전을 벌였으며 1593년 광주지역에서 복수장 고종후와 함께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진주성에 들어가 김천일과 함께 7일간 혈전을 치르다가 진주성이 함락되자 진주 남강에서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사후에는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전라남도 기념물 제57호로 지정된 나주 무열사에 배현경裵玄慶을 주벽으로 배정지裵廷芝·배극렴裵克濂이 제향되어 있었는데 1868(고종5년)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려 그 자리에 유허비가 세워져 있었으나 1882(고종19년)년에 다시 복건하여 배운룡裵雲龍·배공서裵工瑞· 배공보裵工甫· 배승무裵承武· 배세조裵世祚 등 5위를 추배하였다
25. 죽림 박경(1559∼1616)
본관 죽산, 호는 죽림竹林이다. 박경朴璟은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53대손이며 동방 18현 중의 한 사람으로 평하고 있는 스승 사계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 때 임곡 광곡마을의 칠송정 주인 기대승의 장자 함재 기효증의 종사관이 되어 의곡義穀을 모아 운반하였으며 병자호란 때도 동생과 함께 의병을 창의하는 등 천성적으로 의리에 강한 인물이었다.
임진왜란 때 백의종군 벼슬도 없이 선조임금을 모시고 피난 북행하는 공훈을 세운 죽산박씨의 증시조인 박경은 선조임금이 그 공을 인정하여 벼슬길에 나서기를 소명했다.
그러나 그가 했던 일은 마음에서 우러난 충심에서 비롯됐기에 이를 사양하고 여생을 초야에 묻혀 충성할 것을 아뢰니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죽림천사의 시호와 궤장을 내리고 1601년 가을 이곳에 국비로 용진산 북쪽 산허리 협곡이 이루어 물이있는 호적한 곳에 가학정駕鶴亭을 건립하게 하였다. 이후에도 영상 박홍구朴弘耉 1552∼1624, 광해군에게 의리를 지킨 정승 좌의정 기자헌奇自獻 1562∼1624 등이 그에게 벼슬을 권했으나 그는 \"번거로움을 싫어하고 고요함을 좋아함이 나의 본뜻이다. 쓸데없는 허명에 노예가 되어 나의 즐거움 바를 버릴 수 없다\"라며 극구 사양했다.
정도전이 나주에 3년간 유배하며
당시 광주목사로 부임했던 권율은 그의 명성을 듣고 만나기를 청해 그의 역량이 소문과 같은 것을 확인한 후 지근거리에 두고 친교를 나눴다. 학문을 논했을 뿐 아니라 무예 겨루기를 즐겼다. 의기를 갖춘 권율이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자 그는 권율의 막하에 들어가 앞장서서 왜군과 싸웠다. 권율이 피로써 맹세하고 있는 힘을 다해 왜군을 함께 무찌르자고 호소하자 1천 5백여 명의 의병이 모였다. 광주 관내 5백명, 전라도 인근 1천 명이었다. 광주공원에서 광주향교 가는 길 오른편 기슭 철제계단을 올라가면 비석 20여기가 있다. 이 중 맨 앞줄 은행나무 바로 앞에 광주목사 권율과 관련된 비가 하나 있다. 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都元帥忠莊權公倡義碑이다. 이 비의 옆면 두 곳에 권율과 같이 전투에 참여한 인사의 명단이 적혀 있다. 김극추의 이름이 올려있는 것은 당연하다.
『호남절의록』에는 1592년 7월 전북 금산 근처의 이치梨峙 전투에 참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 훈상으로 훈련원주부에 임명되었다고 했다. 『충의사록』에서는 자세하게 이치전투에서 고을 장정들을 인솔하여 영정곡永貞谷에 복병하였다가 큰 전과를 올려 훈련원 주부에 임명된 뒤 행주전투에 참전하여 끝까지 싸워 큰 공을 세웠다고 기록했다. 그 뒤에 한성참군이 되었다가 정우위별무사로 선별되었다. 권율 막하에 다시 들어가 활약할 때 정충신, 이충립, 고성후, 이완근, 이세환, 박대수, 김치원 등과 광주 8장사의 한사람으로 꼽혔다.
그는 행주전투 이후 특진하여 내직으로 병조좌랑, 군기첨정을 지냈고 외직으로 경성판관, 해미현감을 거쳐 영천군수로 있을 때 그를 시기하는 자들의 모함으로 파면을 당했다. 그를 따르던 군민들의 탄원으로 다시 군자감정이 되었다. 1605년에 선무후종3등공신에 책록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입은 상처가 회복되지 않아 1610년 1월 9일에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후에 좌승지로 증직되고 정려를 명하여 광산구 우산동에 있는 삼강정려에 모셔졌으나 주택단지에 편입됨에 따라 현재는 이설되었다. 충남 금산 금곡사에 배향되었다.
22. 양산룡(1552∼1597)
본관은 제주. 자는 우상宇翔이다. 부친은 송천 양응정이며 어머니는 죽산박씨로 판관 박중윤의 딸 사이에 차남으로 1552년 박뫼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5∼16세부터 문장이 뛰어났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41세에 임진왜란을 맞게 되자 김천일 휘하에 들어가서 아우인 산숙을 부장으로 산룡을 운량장運糧將, 그의 아들 상건을 종사관으로 임명하였다. 얼마 후 아우인 양산숙梁山璹이 진주 남강에 몸을 던져 절사하였다는 비보를 듣고 달려가 시신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초혼장招魂葬으로 아버지 양응정의 묘 아래에 장사하고 모친의 슬픔을 달래는데 온갖 효성을 다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군의 횡포가 극심하자 피난을 위해 일가족을 배에싣고 무안의 삼향포(三鄕浦. 지금의 몽탄강)에 다다랐을 때 적선이 들이닥쳐 화를 당하게 되자 적을 크게 꾸짖고는 대성통곡을 하면서 어머니 죽산박씨를 모시고 바다에 뛰어들어 절사하였다. 1635년 나라에서는 양산룡에 대하여 효자 정려를 내렸다.
23. 류휘진(1556∼1593)
조선 중기 무신. 본관은 서산瑞山이고 유곡동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거의하여 초토사 고경명 막하에 들어가 병량막취의병장兵糧幕聚義兵將으로 활약하였으며 그 후 강화도에서의 전공으로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 벼슬이 제수되었다. 1593년 6월에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진주성을 침공할 때 김천일과 같이 순절하니 호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충의忠毅 시호가 내려졌다.
24. 노재 배승무(1559∼1593)
본관은 달성이며 호는 노재이다. 조선 1559(명종14년)년 동곡 수성동에서 태어났다. 율곡 이이의 문하생으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승문원 정자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 장군과 함께 의거하여 영호남 각지에서 격전을 벌였으며 1593년 광주지역에서 복수장 고종후와 함께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진주성에 들어가 김천일과 함께 7일간 혈전을 치르다가 진주성이 함락되자 진주 남강에서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사후에는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전라남도 기념물 제57호로 지정된 나주 무열사에 배현경裵玄慶을 주벽으로 배정지裵廷芝·배극렴裵克濂이 제향되어 있었는데 1868(고종5년)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려 그 자리에 유허비가 세워져 있었으나 1882(고종19년)년에 다시 복건하여 배운룡裵雲龍·배공서裵工瑞· 배공보裵工甫· 배승무裵承武· 배세조裵世祚 등 5위를 추배하였다
25. 죽림 박경(1559∼1616)
본관 죽산, 호는 죽림竹林이다. 박경朴璟은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53대손이며 동방 18현 중의 한 사람으로 평하고 있는 스승 사계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 때 임곡 광곡마을의 칠송정 주인 기대승의 장자 함재 기효증의 종사관이 되어 의곡義穀을 모아 운반하였으며 병자호란 때도 동생과 함께 의병을 창의하는 등 천성적으로 의리에 강한 인물이었다.
임진왜란 때 백의종군 벼슬도 없이 선조임금을 모시고 피난 북행하는 공훈을 세운 죽산박씨의 증시조인 박경은 선조임금이 그 공을 인정하여 벼슬길에 나서기를 소명했다.
그러나 그가 했던 일은 마음에서 우러난 충심에서 비롯됐기에 이를 사양하고 여생을 초야에 묻혀 충성할 것을 아뢰니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죽림천사의 시호와 궤장을 내리고 1601년 가을 이곳에 국비로 용진산 북쪽 산허리 협곡이 이루어 물이있는 호적한 곳에 가학정駕鶴亭을 건립하게 하였다. 이후에도 영상 박홍구朴弘耉 1552∼1624, 광해군에게 의리를 지킨 정승 좌의정 기자헌奇自獻 1562∼1624 등이 그에게 벼슬을 권했으나 그는 \"번거로움을 싫어하고 고요함을 좋아함이 나의 본뜻이다. 쓸데없는 허명에 노예가 되어 나의 즐거움 바를 버릴 수 없다\"라며 극구 사양했다.
정도전이 나주에 3년간 유배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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