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서론
2.통불교라는 성격론의 발단과 전개
3.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
4.회통성의 본질
5.맺는 말
2.통불교라는 성격론의 발단과 전개
3.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
4.회통성의 본질
5.맺는 말
본문내용
도에 대한 치유책으로서 차별성의 근저에 있는 동질성을 드러내려는 시도였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가 불교사상 유일하게 화쟁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방대한 불교전적이 제각기 상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논증하고, 모순된 듯이 보이는 교리간의 대립을 화해시키는 것을 주요 과업으로 여긴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없다. 필자는 오래 전에 발표한 글이 주로 비판에 기울어 있었던 것을 보완하고 균형을 잡는다는 의미에서 본고에서는 긍정적인 면을 다소 부각시켰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현대 한국불교의 장래에 대한 발전적인 논의를 위해 통불교와 연관된 쓴 소리 몇 마디를 보태고자 한다.
통불교라는 말 자체가 어떤 역사학자의 민족주의적 발상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이름에 비해 알맹이는 대단한 것이 없다는 것은 앞에서 충분히 얘기된 바 있다. 문제는 예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육당의 뒤를 이은 학자들의 무비판적인 수용이었다. 그들은 회통불교론이 원효의 《십문화쟁론》을 유일한 교증으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 전체, 더 나아가 한국사상 자체에 회통성을 부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단편만 남아 있는 이 논문에서 확인되는 원효 자신의 화쟁사상 역시 혜안과 독창성을 부정할 수 없지만 내용적으로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는 것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
삼국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13개 종파가 역사적 우여곡절을 거치며 현재의 대한불교 조계종으로 일원화되다시피 했지만 이러한 의사 단일 종파로 통합된 것이 역사의 우연일지언정 원효의 회통사상 덕분으로 돌린 것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선교 양종의 분리와 통합의 역사에 대해서도 한국의 독창적 화쟁 전통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은 견강부회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 의천과 지눌의 시대에 표면화된 선교 양종의 조화와 통일에 대한 관심은 이론과 실천을 양 날개로 삼고 있는 불교철학의 본질적인 관심사인 것이다. 게다가 선교 화해의 사상은 규봉종밀에게서 이미 선보인 바가 있는 것이다.외양상으로 볼 때, 현대 한국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이란 명칭은 혜능이 주석한 산의 이름을 따서 지은 만큼 중국 남종선의 맥을 계승하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선종에서 전승되는 수행법이나 이외의 모든 종파적 수행과 경론의 학습을 모두 허용하고 있으며, 실제로 다양한 의례를 행하고 있다. 이는 역대 선사들의 서릿발같은 개성에 비추어 매우 관용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선종 계열인 조계종으로 거의 일원화되어 있으면서 다양한 경론과 종파적 행법이 허용되고 있는 한국불교의 모습에서 화해의 정신과 회통성을 엿볼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견강부회에 불과하다. 한국의 불교가 조계종으로 ‘통일’된 적도 없거니와 모든 교설과 종파적 관점이 ‘화해’해서 공존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선교 양종이 ‘표면적으로’ 선종인 조계종으로 통합된 것은 역사의 우연이다.
그리고 이 ‘통일’은 다양성의 상실이라는 면이 강하기 때문에 우연이라고 하더라도 불행한 우연이다. 그리고 다양성을 보여준다는 여러 가지 교리, 행법, 의례의 공존도 알고 보면 아무 원칙도 질서도 없다. 마치 중앙 권력이 무력할 때 지방 세력들이 난립하고 있는 형국과 비슷하다.
이렇게 한국의 통불교론은 그 시발에서 전개, 그리고 현재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자못 기형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통불교론의 긍정적인 면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 다양한 교리와 서로 다른 종파적 입장은 상대적 가치를 가지며, 그렇기 때문에 서로 화해되고 회통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상식과 원칙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가 불교사상 유일하게 화쟁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방대한 불교전적이 제각기 상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논증하고, 모순된 듯이 보이는 교리간의 대립을 화해시키는 것을 주요 과업으로 여긴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없다. 필자는 오래 전에 발표한 글이 주로 비판에 기울어 있었던 것을 보완하고 균형을 잡는다는 의미에서 본고에서는 긍정적인 면을 다소 부각시켰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현대 한국불교의 장래에 대한 발전적인 논의를 위해 통불교와 연관된 쓴 소리 몇 마디를 보태고자 한다.
통불교라는 말 자체가 어떤 역사학자의 민족주의적 발상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이름에 비해 알맹이는 대단한 것이 없다는 것은 앞에서 충분히 얘기된 바 있다. 문제는 예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육당의 뒤를 이은 학자들의 무비판적인 수용이었다. 그들은 회통불교론이 원효의 《십문화쟁론》을 유일한 교증으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 전체, 더 나아가 한국사상 자체에 회통성을 부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단편만 남아 있는 이 논문에서 확인되는 원효 자신의 화쟁사상 역시 혜안과 독창성을 부정할 수 없지만 내용적으로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는 것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
삼국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13개 종파가 역사적 우여곡절을 거치며 현재의 대한불교 조계종으로 일원화되다시피 했지만 이러한 의사 단일 종파로 통합된 것이 역사의 우연일지언정 원효의 회통사상 덕분으로 돌린 것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선교 양종의 분리와 통합의 역사에 대해서도 한국의 독창적 화쟁 전통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은 견강부회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 의천과 지눌의 시대에 표면화된 선교 양종의 조화와 통일에 대한 관심은 이론과 실천을 양 날개로 삼고 있는 불교철학의 본질적인 관심사인 것이다. 게다가 선교 화해의 사상은 규봉종밀에게서 이미 선보인 바가 있는 것이다.외양상으로 볼 때, 현대 한국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이란 명칭은 혜능이 주석한 산의 이름을 따서 지은 만큼 중국 남종선의 맥을 계승하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선종에서 전승되는 수행법이나 이외의 모든 종파적 수행과 경론의 학습을 모두 허용하고 있으며, 실제로 다양한 의례를 행하고 있다. 이는 역대 선사들의 서릿발같은 개성에 비추어 매우 관용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선종 계열인 조계종으로 거의 일원화되어 있으면서 다양한 경론과 종파적 행법이 허용되고 있는 한국불교의 모습에서 화해의 정신과 회통성을 엿볼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견강부회에 불과하다. 한국의 불교가 조계종으로 ‘통일’된 적도 없거니와 모든 교설과 종파적 관점이 ‘화해’해서 공존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선교 양종이 ‘표면적으로’ 선종인 조계종으로 통합된 것은 역사의 우연이다.
그리고 이 ‘통일’은 다양성의 상실이라는 면이 강하기 때문에 우연이라고 하더라도 불행한 우연이다. 그리고 다양성을 보여준다는 여러 가지 교리, 행법, 의례의 공존도 알고 보면 아무 원칙도 질서도 없다. 마치 중앙 권력이 무력할 때 지방 세력들이 난립하고 있는 형국과 비슷하다.
이렇게 한국의 통불교론은 그 시발에서 전개, 그리고 현재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자못 기형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통불교론의 긍정적인 면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 다양한 교리와 서로 다른 종파적 입장은 상대적 가치를 가지며, 그렇기 때문에 서로 화해되고 회통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상식과 원칙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