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301, 302 영화 평론
본문내용
) 끊임없이 갖다 준다."
(ㅁ) "302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단식가다."
(ㅂ) "그녀는 방금 301호가 건네준 음식을 비닐봉지에 싸서 버리거나 냉장고 속에서 딱딱하게 굳도록 버려둔다."
(ㅅ) "그녀는 외롭고, 숨이 끊어질 듯한 허기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약간 상쇄시켜 주는 것 같다."
(ㅇ) "외로움에 대하여 쓰기를 즐긴다. 흔히 그녀는 단식과 저술을 한꺼번에 하며, 한 번도 채택되지 않을 원고들을 끊임없이 문예지와 신문에 투고한다."
(ㅈ) "어느날, 세상 요리를 모두 맛본 301호의 외로움은 인육에까지 미친다. 그래서 바싹 마른 302호를 잡아 스플레를 해 먹는다. 물론 외로움에 지친 302호는 쾌히 301호의 재료가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의 외로움이 모두 끝난 것일까?"(밑줄:인용자)
위에서 이미 언급된 영화의 서사구조와 장정일의 시 「요리사와 단식가」의 중심 내용을 통해 이들 영화와 시를 비교 검토해보면, 우선 영화의 상황 설정이 시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과 (3)의 내용을 보면, '301'호의 여자는 요리사이고, '302'호의 여자는 단식가로 설정되어 있다. 이것은 시의 내용 (ㄱ)과 (ㅁ)의 상황과 동일하다. 특히 '302'호의 여자에 관한 설정 또한 (5)에서 밑줄 처리된 부분과 (ㅇ)의 시적 진술을 비교해보면, 동일하게 처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영화에서는 각 인물의 심리적 동인을, (3), (4), (5)에서처럼, '금방한 따뜻한 음식에 사랑을 결부시키는 이혼녀'라는 점과 '의붓아버지의 성폭행과 죽은 시체를 난도질한 행위에서 유발된 신경성 식욕부진증'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 등으로 심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시의 내용과는 별도로 추리기법을 표면 형식으로 취하고 있다. (2)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2)에서처럼 사용된 추리기법은 영화 전개 과정에서 유기적으로 기능하지 못한 채 단순히 극 상황을 전달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어 아쉽게 여겨진다.
'301', '302'의 만남의 계기는 영화 (6)과 시 (ㄹ), (ㅂ)을 비교해 보면 동일하다는 점을 또한 알 수 있다. (7)에서처럼 이들은 서로의 외로움을 공유하는데 이점은 시에서 (ㄴ), (ㄷ), (ㅅ) 등에서 반복, 강조되고 있다. 사실 영화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 주제가 '인간의 외로움이 어떻게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가'와 관계가 깊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시의 주제와 영화의 주제가 동일하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바로 이점은 장정일의 앞의 시가 영화의 원작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핵심적으로 증명한다. 더욱이 영화의 종결 부분인 (8)은 시의 (ㅈ)과, '302'호의 여자가 자발적으로 '301'의 여자에게 요리 재료가 될 것을 제안한다는 점에서, 유사할 뿐 아니라, 특히 (ㅈ)에서 밑줄 처리된 부분은 영화에서는 원문 그대로 자막 처리되고 있기까지 한다.
이상과 같이, 영화 『301·302』와 장정일의 시 「요리사와 단식가」와의 상관 관계는 각기 주어진 상황 설정, 주제 등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영화보다 앞서 발표된 장정일의 시가 영화의 원작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영화에서는 그 원작 표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이점에 대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겠다. 첫째 의도적으로 이 사실을 은폐하려 했을 가능성, 둘째 사전에 이미 원작자에게 양해를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부득이 명시하지 않았을 가능성, 셋째 장정일의 시는 이 영화의 원작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가능성 등이 그것이다.(셋째의 경우에 대해서는 좀더 설명이 요구된다. 시는 흔히 운문문학으로, 고백문학으로, 서정문학으로 인식되므로 극 상황에서 요구되는 서사성이 배제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러한 측면에서 셋째 경우를 상정해 보았다. 그러나 시의 모티프가 영화의 모티프와 동일하다면 이 둘은 서로 유사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 아닌가. 이는 예술 장르에 대한 기존 선입견을 버린다면 쉽게 알 수 있는 사항일 것이다.) 이 세 가지 중 그 어떠한 경우도 관객의 알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심각한 문제성을 드러내고 있음에 틀림없지만, 만약 셋째의 경우처럼, 장정일의 시는 영화의 원작이 될 수 없다는 인식 아래 영화를 제작했다면 이는 극히 이해할 수 없는 예술성의 침해로 받아들여도 될 것이다. 영화 『301·302』가 장정일의 시 「요리사와 단식가」를 원작으로 하고 있음이 명시되지 않은 이유로 특히 첫째와 셋째의 경우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ㅁ) "302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단식가다."
(ㅂ) "그녀는 방금 301호가 건네준 음식을 비닐봉지에 싸서 버리거나 냉장고 속에서 딱딱하게 굳도록 버려둔다."
(ㅅ) "그녀는 외롭고, 숨이 끊어질 듯한 허기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약간 상쇄시켜 주는 것 같다."
(ㅇ) "외로움에 대하여 쓰기를 즐긴다. 흔히 그녀는 단식과 저술을 한꺼번에 하며, 한 번도 채택되지 않을 원고들을 끊임없이 문예지와 신문에 투고한다."
(ㅈ) "어느날, 세상 요리를 모두 맛본 301호의 외로움은 인육에까지 미친다. 그래서 바싹 마른 302호를 잡아 스플레를 해 먹는다. 물론 외로움에 지친 302호는 쾌히 301호의 재료가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의 외로움이 모두 끝난 것일까?"(밑줄:인용자)
위에서 이미 언급된 영화의 서사구조와 장정일의 시 「요리사와 단식가」의 중심 내용을 통해 이들 영화와 시를 비교 검토해보면, 우선 영화의 상황 설정이 시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과 (3)의 내용을 보면, '301'호의 여자는 요리사이고, '302'호의 여자는 단식가로 설정되어 있다. 이것은 시의 내용 (ㄱ)과 (ㅁ)의 상황과 동일하다. 특히 '302'호의 여자에 관한 설정 또한 (5)에서 밑줄 처리된 부분과 (ㅇ)의 시적 진술을 비교해보면, 동일하게 처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영화에서는 각 인물의 심리적 동인을, (3), (4), (5)에서처럼, '금방한 따뜻한 음식에 사랑을 결부시키는 이혼녀'라는 점과 '의붓아버지의 성폭행과 죽은 시체를 난도질한 행위에서 유발된 신경성 식욕부진증'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 등으로 심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시의 내용과는 별도로 추리기법을 표면 형식으로 취하고 있다. (2)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2)에서처럼 사용된 추리기법은 영화 전개 과정에서 유기적으로 기능하지 못한 채 단순히 극 상황을 전달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어 아쉽게 여겨진다.
'301', '302'의 만남의 계기는 영화 (6)과 시 (ㄹ), (ㅂ)을 비교해 보면 동일하다는 점을 또한 알 수 있다. (7)에서처럼 이들은 서로의 외로움을 공유하는데 이점은 시에서 (ㄴ), (ㄷ), (ㅅ) 등에서 반복, 강조되고 있다. 사실 영화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 주제가 '인간의 외로움이 어떻게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가'와 관계가 깊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시의 주제와 영화의 주제가 동일하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바로 이점은 장정일의 앞의 시가 영화의 원작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핵심적으로 증명한다. 더욱이 영화의 종결 부분인 (8)은 시의 (ㅈ)과, '302'호의 여자가 자발적으로 '301'의 여자에게 요리 재료가 될 것을 제안한다는 점에서, 유사할 뿐 아니라, 특히 (ㅈ)에서 밑줄 처리된 부분은 영화에서는 원문 그대로 자막 처리되고 있기까지 한다.
이상과 같이, 영화 『301·302』와 장정일의 시 「요리사와 단식가」와의 상관 관계는 각기 주어진 상황 설정, 주제 등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영화보다 앞서 발표된 장정일의 시가 영화의 원작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영화에서는 그 원작 표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이점에 대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겠다. 첫째 의도적으로 이 사실을 은폐하려 했을 가능성, 둘째 사전에 이미 원작자에게 양해를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부득이 명시하지 않았을 가능성, 셋째 장정일의 시는 이 영화의 원작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가능성 등이 그것이다.(셋째의 경우에 대해서는 좀더 설명이 요구된다. 시는 흔히 운문문학으로, 고백문학으로, 서정문학으로 인식되므로 극 상황에서 요구되는 서사성이 배제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러한 측면에서 셋째 경우를 상정해 보았다. 그러나 시의 모티프가 영화의 모티프와 동일하다면 이 둘은 서로 유사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 아닌가. 이는 예술 장르에 대한 기존 선입견을 버린다면 쉽게 알 수 있는 사항일 것이다.) 이 세 가지 중 그 어떠한 경우도 관객의 알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심각한 문제성을 드러내고 있음에 틀림없지만, 만약 셋째의 경우처럼, 장정일의 시는 영화의 원작이 될 수 없다는 인식 아래 영화를 제작했다면 이는 극히 이해할 수 없는 예술성의 침해로 받아들여도 될 것이다. 영화 『301·302』가 장정일의 시 「요리사와 단식가」를 원작으로 하고 있음이 명시되지 않은 이유로 특히 첫째와 셋째의 경우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