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신라의 고분
◎신라 왕릉의 종류
◎신라 왕릉의 종류
본문내용
경주시 동방동 산 660번지에 위치하는 신라 제 45대 신무왕의 능(陵). 사적 제185호. 면적 3만6625㎡. 무덤의 지름 15m, 높이 3.4m. 신무왕의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우징(祐徵)이다. 신라 43대 의강왕의 사촌동생이며 어머니는 진교부인(眞矯夫人), 왕비는 진종부인(眞從夫人)이다. 839년 4월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의 도움으로 경주로 쳐들어가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7월에 죽음으로써 재위 3개월의 단명 왕이 되었다. 죽은 뒤 제형산(弟兄山) 서북쪽에 장사하였다는 기록에 의해 이곳으로 비정하고 있다. 무덤의 외부 모습은 흙으로 덮은 둥근 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아무런 시설이 없는 일반민묘 형태로 단순하다. 그러나 이 능이 신무왕릉이 아니고 경주시 충효동 산 7-1에 위치하고 있는 사적 제21호 김유신묘(金庾信墓)가 양식·연대로 보아 오히려 신무왕릉에 해당한다는 주장도 있다.
·헌안왕릉(憲安王陵):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산 92-2번지에 있는 신라 제 47대 헌안왕의 능. 사적 제179호. 지정면적 5,878㎡. 무덤의 지름은 15.3m, 높이는 4.3m이다. 헌안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의정(誼靖) 또는 우정(祐靖)이며, 신라 제 45대 신무왕의 이복동생으로 어머니는 소명부인(昭明夫人)이다. 857년에 왕이 되어 861년에 죽었으며 4년간 왕으로 있으면서 제방을 수리하는 등 농사를 권장하였다. 공작지(孔雀址)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에 의하여 이곳으로 비정하고 있다. 무덤의 외부 모습은 둥근봉토분으로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사용하여 무덤 보호석렬(保護石列)과 봉토의 흙이 흘러내림을 방지하게 한 것 같으나 지금은 몇 개밖에 보이지 않고 있다. 가장 단순한 형태의 무덤 모습이다.
·헌강왕릉(憲康王陵):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 55번지에 위치한 신라 제 49대 헌강왕의 능. 사적 제187호. 지정면적 6만9627㎡. 무덤의 지름은 15.3m, 높이는 4.2m이다. 헌강왕이 성은 김씨, 이름은 정(晸)이며, 경문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문의왕후(문의왕후), 비는 의명부인(의명부인)이다. 875년에 즉위하여 886년까지 12년간 재위하면서 문치에 힘쓴 왕이다. 죽은 뒤 보리사(菩提寺)의 동남쪽에 장사하였는데 바로 이곳이 해당된다. 무덤의 외부모습은 흙으로 덮은 둥근봉토분으로서 밑둘레는 길이 60∼120cm, 너비 30cm 내외의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4단으로 쌓아올려 무덤의 보호석으로 하여 튼튼히 하였다. 이와같이, 무덤 보호석을 다듬은 돌을 사용하여 4단으로만 쌓아 올려 마련한 예는 신라왕릉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형식이다.
·정강왕릉(定康王陵):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 53번지에 위치하는 신라 제 50대 정강왕의 능. 사적 제186호. 지정면적 3만 5703㎡, 무덤의 지름은 15.7m, 높이는 4m이다. 정강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황(晃)이다. 경문왕의 둘째아들로 886년 7월에 왕이 되어 887년 7월에 죽었으므로 만 1년간 왕으로 있었다. 죽은 뒤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하였다는 기록에 따라 이곳으로 비정하고 있다. 무덤의 외부 모습은 둥글게 쌓아올린 봉토(封土) 밑부분을 3단으로 쌓아 무덤의 보호석으로 하였는데 모두 가공한 장대석(長臺石)으로 축조하였다. 하단의 지대석(地臺石)은 보다 넓게 하였고 그 위에 2단의 석축을 쌓았는데 최상면에 올려놓는 갑석(甲石)은 원래 없었다. 재위기간이 짧아 치적이 없으면서도 무덤의 외형이 선왕인 헌강왕릉과 같은 것은 형인 선왕의 무덤구역에 함께 축조하게 된 데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효공왕릉(孝恭王陵):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산 14번지에 위치하는 신라 제 52대 효공와의 능. 사적 제183호. 지정면적 3만 7993㎡. 무덤의 지름은 21.2m, 높이는 5m이다. 효공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요(嶢)이며, 신라 제 49대 헌강왕의 서자로 어머니는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이다. 897년에 왕이 되어 912년에 죽었으며, 15년간 왕으로 있으면서 기우는 국세를 바로잡지 못하고 후백제의 견훤, 후고구려의 궁예의 공략에 국토를 빼앗겼다. 죽은 뒤 사자사(獅子寺) 북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에 의하여 이곳으로 비정하고 있다. 무덤의 외부모습은 흙으로 덮은 둥근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밑둘레는 자연석을 사용한 3,4개의 호석(護石)이 보이고 있어 원래는 밑둘레를 따라 자체적으로 보호석렬(保護石列)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민묘보다 규모가 조금 크게 보이는 외에 아무런 장식물이 없는 매우 단순한 형태의 무덤이다.
·경순왕릉(敬順王陵):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랑포리에 있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능. 사적 제244호. 지정면적 3,969㎡. 무덤의 지름은 7m, 높이는 약 3m이다. 경순왕이 성은 김씨, 이름은 부(傅)이다. 신라 제 46대 문성왕의 6대손이며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이다. 927년에 왕이 되어 935년 왕건(王建)에게 나라를 물려줄 때까지 9년간 재위하였으며 978년(경종3)에 죽었다. 능은 오랫동안 잊혀져오다 조선시대에 찾게 되었다고 하며 신라의 왕릉 가운데 경주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이다.무덤의 외형은 둥근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밑둘레에는 판석(板石)을 이용하여 무덤보호를 위해 병풍처럼 둘렀고 능 주위로는 곡장(曲墻)이 돌려져 있다. 능 앞에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고 '新羅敬順王之陵'이라고 새긴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王新羅第五十六王陵唐天成二年戊子代景王而立淸姜二年末遜國于高麗宋太平興國戊寅麗景宗三年四月四日薨○敬順以王禮于長○古付南八理癸坐之原至純德英○○烈聖上二十三年丁印月日改立' 이라는 묘비의 내용에 의하여 경순왕의 무덤임이 확인되었고,1747년(영조 23)에 이 비를 세운 것을 알게 되었다. 능 앞에 있는 기타 석물로는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2개가 마련되어 있다. 신라왕릉의 경우 곡장이 마련된 것이 없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곡장을 마련하고 있어 묘비에서와 같이 경순왕이 죽자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참고자료-『민족문화대백과사전』 13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헌안왕릉(憲安王陵):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산 92-2번지에 있는 신라 제 47대 헌안왕의 능. 사적 제179호. 지정면적 5,878㎡. 무덤의 지름은 15.3m, 높이는 4.3m이다. 헌안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의정(誼靖) 또는 우정(祐靖)이며, 신라 제 45대 신무왕의 이복동생으로 어머니는 소명부인(昭明夫人)이다. 857년에 왕이 되어 861년에 죽었으며 4년간 왕으로 있으면서 제방을 수리하는 등 농사를 권장하였다. 공작지(孔雀址)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에 의하여 이곳으로 비정하고 있다. 무덤의 외부 모습은 둥근봉토분으로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사용하여 무덤 보호석렬(保護石列)과 봉토의 흙이 흘러내림을 방지하게 한 것 같으나 지금은 몇 개밖에 보이지 않고 있다. 가장 단순한 형태의 무덤 모습이다.
·헌강왕릉(憲康王陵):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 55번지에 위치한 신라 제 49대 헌강왕의 능. 사적 제187호. 지정면적 6만9627㎡. 무덤의 지름은 15.3m, 높이는 4.2m이다. 헌강왕이 성은 김씨, 이름은 정(晸)이며, 경문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문의왕후(문의왕후), 비는 의명부인(의명부인)이다. 875년에 즉위하여 886년까지 12년간 재위하면서 문치에 힘쓴 왕이다. 죽은 뒤 보리사(菩提寺)의 동남쪽에 장사하였는데 바로 이곳이 해당된다. 무덤의 외부모습은 흙으로 덮은 둥근봉토분으로서 밑둘레는 길이 60∼120cm, 너비 30cm 내외의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4단으로 쌓아올려 무덤의 보호석으로 하여 튼튼히 하였다. 이와같이, 무덤 보호석을 다듬은 돌을 사용하여 4단으로만 쌓아 올려 마련한 예는 신라왕릉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형식이다.
·정강왕릉(定康王陵):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 53번지에 위치하는 신라 제 50대 정강왕의 능. 사적 제186호. 지정면적 3만 5703㎡, 무덤의 지름은 15.7m, 높이는 4m이다. 정강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황(晃)이다. 경문왕의 둘째아들로 886년 7월에 왕이 되어 887년 7월에 죽었으므로 만 1년간 왕으로 있었다. 죽은 뒤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하였다는 기록에 따라 이곳으로 비정하고 있다. 무덤의 외부 모습은 둥글게 쌓아올린 봉토(封土) 밑부분을 3단으로 쌓아 무덤의 보호석으로 하였는데 모두 가공한 장대석(長臺石)으로 축조하였다. 하단의 지대석(地臺石)은 보다 넓게 하였고 그 위에 2단의 석축을 쌓았는데 최상면에 올려놓는 갑석(甲石)은 원래 없었다. 재위기간이 짧아 치적이 없으면서도 무덤의 외형이 선왕인 헌강왕릉과 같은 것은 형인 선왕의 무덤구역에 함께 축조하게 된 데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효공왕릉(孝恭王陵):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산 14번지에 위치하는 신라 제 52대 효공와의 능. 사적 제183호. 지정면적 3만 7993㎡. 무덤의 지름은 21.2m, 높이는 5m이다. 효공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요(嶢)이며, 신라 제 49대 헌강왕의 서자로 어머니는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이다. 897년에 왕이 되어 912년에 죽었으며, 15년간 왕으로 있으면서 기우는 국세를 바로잡지 못하고 후백제의 견훤, 후고구려의 궁예의 공략에 국토를 빼앗겼다. 죽은 뒤 사자사(獅子寺) 북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에 의하여 이곳으로 비정하고 있다. 무덤의 외부모습은 흙으로 덮은 둥근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밑둘레는 자연석을 사용한 3,4개의 호석(護石)이 보이고 있어 원래는 밑둘레를 따라 자체적으로 보호석렬(保護石列)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민묘보다 규모가 조금 크게 보이는 외에 아무런 장식물이 없는 매우 단순한 형태의 무덤이다.
·경순왕릉(敬順王陵):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랑포리에 있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능. 사적 제244호. 지정면적 3,969㎡. 무덤의 지름은 7m, 높이는 약 3m이다. 경순왕이 성은 김씨, 이름은 부(傅)이다. 신라 제 46대 문성왕의 6대손이며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이다. 927년에 왕이 되어 935년 왕건(王建)에게 나라를 물려줄 때까지 9년간 재위하였으며 978년(경종3)에 죽었다. 능은 오랫동안 잊혀져오다 조선시대에 찾게 되었다고 하며 신라의 왕릉 가운데 경주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이다.무덤의 외형은 둥근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밑둘레에는 판석(板石)을 이용하여 무덤보호를 위해 병풍처럼 둘렀고 능 주위로는 곡장(曲墻)이 돌려져 있다. 능 앞에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고 '新羅敬順王之陵'이라고 새긴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王新羅第五十六王陵唐天成二年戊子代景王而立淸姜二年末遜國于高麗宋太平興國戊寅麗景宗三年四月四日薨○敬順以王禮于長○古付南八理癸坐之原至純德英○○烈聖上二十三年丁印月日改立' 이라는 묘비의 내용에 의하여 경순왕의 무덤임이 확인되었고,1747년(영조 23)에 이 비를 세운 것을 알게 되었다. 능 앞에 있는 기타 석물로는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2개가 마련되어 있다. 신라왕릉의 경우 곡장이 마련된 것이 없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곡장을 마련하고 있어 묘비에서와 같이 경순왕이 죽자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참고자료-『민족문화대백과사전』 13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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