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강제병합과 시기별 점령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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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제의 강제병합과 시기별 점령정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과 소작쟁의
2. 일제의 공업수탈과 노동쟁의
3. 일제의 병참기지화와 민족말살 정책

본문내용

다 거절당하자 용지(用紙) 통제권을 발동, 양사에 대한 신문용지의 배급량을 줄이는 등 갖은 압력을 가했다. 결국 1940년 8월 10일 폐간계를 내도록 강요하여 양 신문을 폐간시켰다.
일제는 한민족의 민족 정신을 근본에서부터 파괴하기 위해 일본인과 조선인은 하나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웠다. 이를 위한 논리로 한국인이 일본인과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거짓으로 꾸미기도 하였다. 또 서울의 남산을 비롯 전국 각지의 학교와 면마다 신사(神社)를 세우고 일본의 국가 종교인 신도(神道)를 강요해, 만일 신사 참배를 거부할 경우는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다.
일제는 이처럼 한민족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본격화하는 한편으로 엄청난 자원을 약탈하고, 한국인을 침략 전쟁에 강제 동원하여 착취·수탈했다. 전쟁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중요산업 통제의 통제에 관한 법률] [국가총동원법] 등과 같은 악법을 만들어 놋그릇이나 솔방울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각종 자원을 빼앗아 갔다.
일제의 수탈이 극도에 달하면서 우리 민족은 매우 고달픈 처지에서 목숨을 연명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일제의 만행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저항도 거세게 일어났다. 이 때문에 감옥은 죄없는 죄수들로 넘쳐 흘렀다.
일제는 '근로동원'이라 하여 어린 학생들을 군사 시설을 위한 공사장에 보내고, 여성들도 '근로보국대'라 하여 토목 공사에 내보냈다. 나아가 한국의 청년과 장년층을 끌고가 침략 전쟁의 총알받이로 이용했다. 1938년부터 군대 보충을 위해 '지원병제도'를 실시했으며, 1943년에는 '징병제도'와 '학도지원병제도'를 시행하여 20만여 명의 청년들과 4,500여 명의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또 1939년부터 '모집', '알선', '징용' 등으로 형식을 바꾸어가면서 1백만 명 이상의 청장년들을 탄광·비행장·군수 공장·철도 등의 공사장에 강제로 끌고가 군대식으로 편성하여 강제 수용하고 노예처럼 혹사시켰다.
나아가 일제는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자 1944년 9월 '여자정신대근무령'을 만들어 12세에서 40세까지의 배우자가 없는 여성들 20만여 명을 강제로 끌고 갔다. 이들은 일본과 한국 내의 군수 공장에서 일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 상당수가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전쟁터로 끌려가 종군위안부로 일본군을 위한 성적 노리개감으로 희생당했다.
참고문헌: 강좌 한국근현대사 -역사연구소, 풀빛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솔,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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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7.06
  • 저작시기2004.0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9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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