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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문제의 제기
2. 고려말 성리학 수용기의 국가중흥론
3. 조선초기 왕정론의 전개와 주체의식의 구현
4. 초기 士林派의 진출과 독자성의 구현
5. 16세기 사림의 道統의식과 자아의식
6. 사림정치 시기의 人極論과 왕정론
7. 17세기 조선 성리학의 敎條主義化
8. 맺음 말
2. 고려말 성리학 수용기의 국가중흥론
3. 조선초기 왕정론의 전개와 주체의식의 구현
4. 초기 士林派의 진출과 독자성의 구현
5. 16세기 사림의 道統의식과 자아의식
6. 사림정치 시기의 人極論과 왕정론
7. 17세기 조선 성리학의 敎條主義化
8. 맺음 말
본문내용
코 용납하지 않는 폐쇄적인 학문 사상풍토에서는 조선 성리학 자체의 존재 의의가 사실상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 實學은 그래서 새로운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서 탄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7세기 조선 성리학은 禮學의 시대를 만개시켜, 인간의 儀禮가 소위 '天理의 節文'을 어떻게 체현해야 옳은 것인가를 과제로 삼아 처절한 논쟁을 벌이고 나섰다. 나아가서는 人性과 物性의 異 同 문제를 두고서도 치열한 논전을 전개하였다. 모두 성리설의 극치를 연출해 내기에 이르렀으나, 이미 그 의미는 적어져가는 새로운 역사의 시대가 현실로 닥아들고 있었다.
8. 맺음 말
고려 말의 성리학은 국내외의 극단한 衰亂을 극복할 새로운 교학이며 경세론으로 수용되었다. 성리학의 국가적 흥기를 통하여 고려는 오래 된 자국을 중흥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러한 시도는 조선왕조로 접속되었다. 더구나 조선 건국의 주역들이 대개 성리학을 통해서 치세를 이룩해 보려는 개혁파 사류였다. 그들은 특히 성균관에서의 강학을 통해서 성리학을 널리 보급하고 인재를 육성코자 제도화 해 나갔다. 고려시기의 오랜 전통으로 지켜온 進士試를 폐지하고 經學만으로 선발하는 生員試만을 실시하며, 문과의 初試에서도 반드시 경학을 시험보도록 제도화 하였다. 세종대 후기에는 국가 용도에 따라 진사시도 다시 시행하게 되었으나, 문과 초시의 講經은 길이 제도로 운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성리학을 이수한 인재가 다수 배출되어 세종대부터는 성리학 왕정론의 구현에 크게 이바지할 수가 있었다. 성리학적 교화정책이 다각도로 펼쳐지게 되었다. 그 가운데의 대표 사례로서는 곧 훈민정음의 창제를 들 수 있다. 자기 백성의 일상의 생활에 가장 필요한 문자의 제정이야말로 가장 주체적이며 독자적인 왕정의 구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가르쳐 깨우치고 이끌어 가면서 다스린다는 교화정책은 독자적 농서의 보급과 권농책으로도 널리 구현되었다.
그런데 조선 성리학은 세조의 패권적 전제정치와 이후의 훈척정치를 맞으면서 점차 주자학에 더욱 의지하고 주자를 더욱 원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더구나 왕권과 비리로 결탁한 훈척의 전횡으로 일어나는 사화의 시대를 맞으면서, 거기 항거하기 위해서도 조선 성리학은 더욱 주자를 이끌어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으며, 주자학을 따라 국왕의 一心을 깨우치기에 치중하는 心學化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전대부터 오래 쌓여진 사회적 비리와 정치적 인습의 개혁에 조선 성리학 왕정론은 크게 기여하였지만, 16세기 사화의 시대를 맞아 처절한 희생을 당하게도 되었다.
그리고 16세기 후기의 사림정치기를 맞아 조선 성리학은 전성을 구가하게 되었다. 퇴계의 理發說과 율곡의 氣發一途說은 모두 주자가 미쳐 명백히 정리해두지 못한 理氣 心性論을 조선 성리학이 각기 독자적으로 구분하여 이론화 한 것이었다. 16세기의 조선 성리학은 곧 心學 위주의 道學으로서, 자기 一心의 '主一'的 함양을 극진한 경지까지 추구함으로써 이제 上帝 및 太極과 상대하는 '人極'의 확고한 정립을 바라보는 위상에 이를 수 있었다. 이제 官邊과는 먼 林下에 正坐하고서도 온 세상의 중심되는 위상을 간직할 수 있는 도학의 세계가 따로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야말로 조선 성리학의 독자적 경계가 전개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 성리학은 중국의 경우보다 훨씬 외곬으로 朱子學을 신봉하고 있었다. 가령 조선 성리학이 양명학을 배격하여 일체 행세치 못하게 하고, 단일한 국가 교학으로서의 독점적 지위를 주자 계열 성리학에만 허용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매우 큰 특징의 하나였다.
나아가 鄕約의 경우도 비슷한 사례였다. 향약은 원래 성리학을 운용하는 宋나라 사류층의 일부가 그 德目에 따른 생활질서를 향촌사회에다 실현코자 하는 자치규약으로 고안한 것이었다. 그것이 성리학과 함께 수용되고, 이윽고 士林세력이 많이 정계로 진출하게 된 16세기 조선에서는 그것을 국가적으로 시행한다는 논의를 조정에서 계속하고, 드디어 거국적으로 시행한다는 결정을 내리게도 되었다. 물론 뒤이어 士禍가 일어난다든가 혹은 국력이 피폐하다는 등의 사유 때문에 향약은 당분간 널리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명망 있는 사류들이 주도하면서 점차 각 군현 단위로 운용되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결국은 대체로 전국적 시행을 보이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 향약의 특징은, 그것이 다만 사족층의 자치규약으로서가 아니라, 대체로 각 군현마다 鄕所가 주체가 되고 사족층이 주도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그래서 특히 良人 賤民에 이르기까지 당해 지역의 모든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강제적 규약으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각 지역 사족층에 의한 교화기구로 강제되고 있었다. 즉 향약은 사족층이 주도하는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국왕이 주도하는 국가체제에다 근접시키고 합치시킴으로써, 당해 지역의 모든 주민에 대하여 교화와 규제를 동시에 가하는 기구로 활용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더구나 16세기 말부터 조선 성리학은 왜란 호란의 참상과 치욕을 겪음과 동시에 격렬한 당쟁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당쟁에서 살아남고 이기기 위해서는, 옛날 주자의 경우를 원용하여, 더 뚜렷한 명분론과 義理論을 이론적 무기로 내세우는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조선 성리학은 이제 더더욱 주자 숭봉의 외길을 걷게 되고, 마침내 집권당은 주자 교조주의의 길로 빠져들게 되었다.
조선 성리학은 오랜 시도에도 불구하고 결코 王政을 실현해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오랜 비리와 인습에 대한 개혁의 시도가 누누히 전개되었다. 그리고 일정하게는 성과를 거두게도 되었다. 국가교학으로서의 조선 성리학의 주체성은 그런 면에서 발현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 성리학은 또한 국가교학으로서의 성격을 결코 지양하지 못하고 대체로는 지배층 위주의 학술이론으로 일관하였다. 넓은 의미의 정치교학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시종하였기로, 학문 자체에 고유한 순수 이론을 개발해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정치와 깊이 결탁할수록, 이상정치인 왕정을 실현하고자 하는 그 본연의 성격 또한 퇴색함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조선 후기의 實學이 새로운 역사적 의미를 지니면서 탄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7세기 조선 성리학은 禮學의 시대를 만개시켜, 인간의 儀禮가 소위 '天理의 節文'을 어떻게 체현해야 옳은 것인가를 과제로 삼아 처절한 논쟁을 벌이고 나섰다. 나아가서는 人性과 物性의 異 同 문제를 두고서도 치열한 논전을 전개하였다. 모두 성리설의 극치를 연출해 내기에 이르렀으나, 이미 그 의미는 적어져가는 새로운 역사의 시대가 현실로 닥아들고 있었다.
8. 맺음 말
고려 말의 성리학은 국내외의 극단한 衰亂을 극복할 새로운 교학이며 경세론으로 수용되었다. 성리학의 국가적 흥기를 통하여 고려는 오래 된 자국을 중흥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러한 시도는 조선왕조로 접속되었다. 더구나 조선 건국의 주역들이 대개 성리학을 통해서 치세를 이룩해 보려는 개혁파 사류였다. 그들은 특히 성균관에서의 강학을 통해서 성리학을 널리 보급하고 인재를 육성코자 제도화 해 나갔다. 고려시기의 오랜 전통으로 지켜온 進士試를 폐지하고 經學만으로 선발하는 生員試만을 실시하며, 문과의 初試에서도 반드시 경학을 시험보도록 제도화 하였다. 세종대 후기에는 국가 용도에 따라 진사시도 다시 시행하게 되었으나, 문과 초시의 講經은 길이 제도로 운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성리학을 이수한 인재가 다수 배출되어 세종대부터는 성리학 왕정론의 구현에 크게 이바지할 수가 있었다. 성리학적 교화정책이 다각도로 펼쳐지게 되었다. 그 가운데의 대표 사례로서는 곧 훈민정음의 창제를 들 수 있다. 자기 백성의 일상의 생활에 가장 필요한 문자의 제정이야말로 가장 주체적이며 독자적인 왕정의 구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가르쳐 깨우치고 이끌어 가면서 다스린다는 교화정책은 독자적 농서의 보급과 권농책으로도 널리 구현되었다.
그런데 조선 성리학은 세조의 패권적 전제정치와 이후의 훈척정치를 맞으면서 점차 주자학에 더욱 의지하고 주자를 더욱 원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더구나 왕권과 비리로 결탁한 훈척의 전횡으로 일어나는 사화의 시대를 맞으면서, 거기 항거하기 위해서도 조선 성리학은 더욱 주자를 이끌어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으며, 주자학을 따라 국왕의 一心을 깨우치기에 치중하는 心學化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전대부터 오래 쌓여진 사회적 비리와 정치적 인습의 개혁에 조선 성리학 왕정론은 크게 기여하였지만, 16세기 사화의 시대를 맞아 처절한 희생을 당하게도 되었다.
그리고 16세기 후기의 사림정치기를 맞아 조선 성리학은 전성을 구가하게 되었다. 퇴계의 理發說과 율곡의 氣發一途說은 모두 주자가 미쳐 명백히 정리해두지 못한 理氣 心性論을 조선 성리학이 각기 독자적으로 구분하여 이론화 한 것이었다. 16세기의 조선 성리학은 곧 心學 위주의 道學으로서, 자기 一心의 '主一'的 함양을 극진한 경지까지 추구함으로써 이제 上帝 및 太極과 상대하는 '人極'의 확고한 정립을 바라보는 위상에 이를 수 있었다. 이제 官邊과는 먼 林下에 正坐하고서도 온 세상의 중심되는 위상을 간직할 수 있는 도학의 세계가 따로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야말로 조선 성리학의 독자적 경계가 전개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 성리학은 중국의 경우보다 훨씬 외곬으로 朱子學을 신봉하고 있었다. 가령 조선 성리학이 양명학을 배격하여 일체 행세치 못하게 하고, 단일한 국가 교학으로서의 독점적 지위를 주자 계열 성리학에만 허용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매우 큰 특징의 하나였다.
나아가 鄕約의 경우도 비슷한 사례였다. 향약은 원래 성리학을 운용하는 宋나라 사류층의 일부가 그 德目에 따른 생활질서를 향촌사회에다 실현코자 하는 자치규약으로 고안한 것이었다. 그것이 성리학과 함께 수용되고, 이윽고 士林세력이 많이 정계로 진출하게 된 16세기 조선에서는 그것을 국가적으로 시행한다는 논의를 조정에서 계속하고, 드디어 거국적으로 시행한다는 결정을 내리게도 되었다. 물론 뒤이어 士禍가 일어난다든가 혹은 국력이 피폐하다는 등의 사유 때문에 향약은 당분간 널리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명망 있는 사류들이 주도하면서 점차 각 군현 단위로 운용되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결국은 대체로 전국적 시행을 보이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 향약의 특징은, 그것이 다만 사족층의 자치규약으로서가 아니라, 대체로 각 군현마다 鄕所가 주체가 되고 사족층이 주도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그래서 특히 良人 賤民에 이르기까지 당해 지역의 모든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강제적 규약으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각 지역 사족층에 의한 교화기구로 강제되고 있었다. 즉 향약은 사족층이 주도하는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국왕이 주도하는 국가체제에다 근접시키고 합치시킴으로써, 당해 지역의 모든 주민에 대하여 교화와 규제를 동시에 가하는 기구로 활용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더구나 16세기 말부터 조선 성리학은 왜란 호란의 참상과 치욕을 겪음과 동시에 격렬한 당쟁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당쟁에서 살아남고 이기기 위해서는, 옛날 주자의 경우를 원용하여, 더 뚜렷한 명분론과 義理論을 이론적 무기로 내세우는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조선 성리학은 이제 더더욱 주자 숭봉의 외길을 걷게 되고, 마침내 집권당은 주자 교조주의의 길로 빠져들게 되었다.
조선 성리학은 오랜 시도에도 불구하고 결코 王政을 실현해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오랜 비리와 인습에 대한 개혁의 시도가 누누히 전개되었다. 그리고 일정하게는 성과를 거두게도 되었다. 국가교학으로서의 조선 성리학의 주체성은 그런 면에서 발현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 성리학은 또한 국가교학으로서의 성격을 결코 지양하지 못하고 대체로는 지배층 위주의 학술이론으로 일관하였다. 넓은 의미의 정치교학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시종하였기로, 학문 자체에 고유한 순수 이론을 개발해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정치와 깊이 결탁할수록, 이상정치인 왕정을 실현하고자 하는 그 본연의 성격 또한 퇴색함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조선 후기의 實學이 새로운 역사적 의미를 지니면서 탄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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