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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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대원군의 개혁정치

2.메이지유신(明治維新)

3.대원군의 개혁과 명치유신 비교

본문내용

립하여 안정된 조세수입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지조는 종래의 세입액을 줄이지 않은 채 결정되었기 때문에 농민의 부담은 이전과 변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지조경감을 요구하는 농민의 저항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1876년에는 이바라키현과 미에현에서 지조개정에 반대하는 대규모의 농민 소요가 일어나고 이것이 전국적으로 퍼져갔다. 여기에 불평사족의 반정부운동도 높아져 갔기 때문에 1877년(명치 10)에 정부는 지조를 2.5%로 인하하였다.
그 외의 개혁조치 - 부국강병, 식산흥업, 근대교육제도 등
신정부는 부국강병을 이룩하기 위하여 산업의 철저한 보호·장려책을 실시하였고 식산흥업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로 인해 군사공업과 철도, 해운업 등이 발달했고, 근대산업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 화폐제도의 개혁과 금융제도의 정비도 추진하였다.
또한, 이러한 신정부의 근대화 정책이 전개됨에 따라 문화와 국민생활 전반에 걸쳐 서양의 근대사상과 문명·생활양식이 유입되어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풍조를 당시에 문명개화라 불렀다.
이로 인해 사람들의 복식이 양복으로 바뀌는 등 의식주의 생활양식이 점차 근대화 되었다. 한편으론 부국강병과 식산흥업정책의 추진을 위해 교육제도의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전문교육으로 1877년 도쿄(東京)대학이 설립되었고, 1868년 후쿠자와 유키치의 게이오의숙(慶應義塾)이 설립되는 등 근대적 학교가 속속 들어서게 된다.
2) 개혁의 평가
메이지유신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인 면이 많다. 특히 메이지 정부의 개혁은 일본이 20세기 들어 아시아국가로는 유일하게 제국주의 열강에 낄 수 있는 국력을 가지는 원동력이 되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이 구미의 근대문명과 기계제 공업의 도입 등의 식산흥업 정책에 적극적이었고, 문명 개화론을 바탕으로 근대적인 교육제도 확립을 통한 실력 양성을 적극 지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메이지 정부는 구미의 근대문명과 기계제 공업의 도입에 적극적이었지만, 이에 비해 민중의 생활개선과 민주주의적인 제도의 실현에는 소극적이었다는 단점을 가진다. 또 폐번치현(廢藩置縣)을 실현시켜 부국강병과 식산산업은 추진되지만, 지조(地租)는 무거웠고 의회제도는 억제되었다. 그 사이 동아시아 국제관계 속에서 일본의 입장은 변화하여 구미에 대해서는 추종적·타협적이었고 주변제국에 대해서는 강압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러한 메이지 정부의 자세에 대해 일본국민은 구미에 대한 타협적인 조약개정교섭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경제의 자유로운 발전을 구하는 자유주의, 국민의 참정권을 구하는 민주주의 등 자유민권운동이 광범위하게 국민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이 운동에 직면하여 한편으로는 그 방침을 수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운동을 분열시키려 하였다. 이리하여 유신 이래의 천황을 중심으로 한 통일국가는 그 실체로 남기면서도 새로운 형태를 갖게 되었다.
3.대원군의 개혁과 명치유신 비교
먼저 두 개혁의 공통점은 그 시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원군의 개혁이나 명치유신은 둘 다 19세기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이 동아시아에까지 미쳤을 때 실시한 시기적인 공통점을 가진 개혁이었다. 또한 양국 다 근대화로의 이행이 필요한 시기에 실시된 개혁이라는 점에서도 그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명치유신이 자강을 위한 개혁과 동시에 서구의 문물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에 비해, 조선에서의 대원군의 개혁은 같은 자강의 노력이 있었지만, 외부와의 교류가 굳게 닫혀진 상태에서의 개혁이었기 때문에 근대화로의 이행에는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다.
다음으로 그 개혁의 내용을 들 수 있는데 두 개혁 다 타도해야할 대상이 분명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타도하는데 일본의 명치유신은 타도 대상인 막부를 완벽히 타도한데 반해, 조선의 대원군의 개혁은 타도 대상인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를 비록 그가 정권을 잡고 있던 시기에는 타도했지만, 실각한 뒤 다시 세도정치의 싹(명성황후의 외척세력)이 자라난 것으로 봐서 이 부분에서의 대원군의 개혁은 실패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두 개혁 모두 토지와 조세에 관한 개혁을 실시하였는데, 그것은 일반 민중들을 위한 개혁이기보다는 왕실과 정부의 재정을 충족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후에 민중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했던데 비해 조선에서는 오히려 왕실의 권위를 위한 공사인 경복궁 중건을 강행해 민중들의 요구가 거의 묵살되고 부담을 오히려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에 반해 두 개혁이 가지는 차이점을 우리는 교육과 서구 문물에 대한 인식차이에서 오는 도입여부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은 대원군이 집정하면서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청을 제외한 일체의 외래문물 도입을 막게 된다. 특히 척화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잦은 이양선의 출현과 병인양요, 신미양요와 같은 전란을 겪으면서 이 정책을 더욱 굳건히 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에 비해 일본은 일찍이 개항하여 적극적으로 서구 문명에 대한 유입을 시도함으로써 부국강병과 식산흥업을 이루었고, 이를 위해 필요한 인재를 기르기 위해 근대적인 교육제도를 마련하는 등 근대화를 향한 수순을 차근차근 밟아나가고 있었다.
아마도 서구 문물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인해 오는 개방의 유무가 대원군의 개혁과 명치유신 성패의 명암을 가르는 주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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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1.07
  • 저작시기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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