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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9주차 1교시. 사림세력의 등장과 민족의 시련
9주차 2교시. 사림세력의 등장과 민족의 시련
10주차 1교시. 조선 사회의 문화
10주차 2교시. 조선 사회의 문화
11주차 1교시.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상
11주차 2교시.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상
12주차 1교시. 개화세력의 성장
12주차 2교시. 개화세력의 성장
13주차 1교시. 대한제국과 민족의 수난
13주차 2교시. 대한제국과 민족의 수난
14주차 1교시. 독립운동과 민족문화의 수호
14주차 2교시. 독립운동과 민족문화의 수호
15주차 1교시. 대한민국의 수립과 민주주의의 성장
15주차 2교시. 대한민국의 수립과 민주주의의 성장
9주차 2교시. 사림세력의 등장과 민족의 시련
10주차 1교시. 조선 사회의 문화
10주차 2교시. 조선 사회의 문화
11주차 1교시.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상
11주차 2교시.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상
12주차 1교시. 개화세력의 성장
12주차 2교시. 개화세력의 성장
13주차 1교시. 대한제국과 민족의 수난
13주차 2교시. 대한제국과 민족의 수난
14주차 1교시. 독립운동과 민족문화의 수호
14주차 2교시. 독립운동과 민족문화의 수호
15주차 1교시. 대한민국의 수립과 민주주의의 성장
15주차 2교시. 대한민국의 수립과 민주주의의 성장
본문내용
5군영 체제 완비
백두산 정계비 세움(1712)
일본에 통신사 파견(1682, 1711): 왜인의 울릉도 출입금지, 울릉도 귀속처리함
『대전속록/신증동국여지승람/선원계보/북관지/신전자초방』간행
영조의 완론 탕평정치
즉위 초 탕평교서 발표
즉위직후 탕평교서를 발표하여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자신이 노론과 소론을 번갈아 등용하여 오히려 정국을 더욱 어지럽게 함으로써 실패
영조의 정통성 논란
소론과 남인의 일부 강경파가 영조의 정통을 부정하고 노론정권에 반대하여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붕당 간의 관계를 다시 조정하여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확립할 필요가 있음을 절갑
Tip. 영조의 어진
Tip. 이인좌의 난(영조 4년, 1728)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계되었다고 하면서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하여 일으킨 반란.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무장 봉기, 중소상인과 누비를 규합하여 청주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한성으로 북진하다가 안성과 죽산전투에서 병조판서 오명환이 자휘하는 관군에 패함
탕평파 육성
붕당을 없앨 것은 내세우며 왕이 내세우는 논리에 동의하는 노,소의 온건론자를 등용하여 ‘탕평파(완론탕평)’을 육성하고, 국방 중심의 탕평정치를 통해 정국 운영
붕당의 기반 약화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
-이조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후임자를 천거하는 낭천권과, 3사의 관리를 천거할 수 있는 권한을 없앰
-일반인의 여론을 직접 정치에 반영하기 위해 신문고를 부활하고, 궁 밖에 자주 나가서 직접 민의를 수렴함
영조 탕평정치의 한계
강력한 왕권에 의해 일시적으로 당쟁이 억제됨
소론강경파에 의한 나주괘서사건과 사도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영조를 지지한 노론이 절대적으로 우세해지고 소론의 정치적 입장이 약화되어 불균형을 이룸
Tip. 영조의 개혁정책
균역법 시행(1750): 균역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균역법을 시행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세 군영이 도성을 나누어 방위하는 체제를 갖춤
형벌제도의 정비: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엄격하게 시행
『속대전/속오례의』『무원록:법의학서』편찬
Tip. 나주괘서사건(영조31년, 1755)
소론의 윤지는 숙종 때 과거를 통해 관직에 올랐으나 영조 즉위년에 노론의 공격에 휘말려 나주로 유배되었다.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나주목사 이하징 등과 모의한 후 민심을 동요시킬 목적으로 나라를 비방하는글을 대자보에 써서 나주객사에 붙였다가 전라감사 조운규에게 발각되어 처형을 당하였다.
정조의 준론 탕평정치
배경
사도세자의 죽음과 이를 둘러싼 시파와 벽파 간의 갈등을 경험함으로써 영조때보다 더욱 강력한 탕평책을 추진
정조는 즉위 후 노론 벽파를 물리치고 남인 시파를 관직에 고루 기용하면서 왕권의 강화를 시도
Tip. 시파와 벽파
시파(남인+소론+노론 일부)는 사도세자의 잘못은 인정하면서도 죽음 자체는 지나치다는 입장이고, 벽파(노론 중 강경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은 당연하고 영조의 처분은 정당하다고 하였다
준론탕평
당파의 시시비비를 명백히 가리는 준론탕평을 시행하여 영조 때에 세력을 키워 온 척신, 환관 등을 제거
노론과 소론의 일부와 그동안 정치 집단에서 배제되었던 남인 계열의 시파를 중용
Tip. 정조의 왕권강화책
능력중시 등용(서얼출신 등용, 규장각의 검서관)
규장각 설치: 왕실도서관, 박제가, 유득공, 정약용 등이 검서관으로 정치에 참여
초계문신제의 시행: 신하를 재교육함
장용영 설치: 친위부대
수원화성 건설: 정치적, 군사적 기능 도시로 육성
수령의 권한 강화: 지방 사족의 향촌 지배력을 억제, 국가의 통치력을 강화
『대전통편:법전/동문휘고:외교문서집/탁지지:경제서/추관지:형율법령집』
『규장전운:음운정리』『홍재전서:정조의 개인문집』『무예도통지:병법서』등을 편찬
탕평론 한계
문물을 정비하면서 절대왕정을 과시한 정조였지만 붕당 사이의 융화나 붕당자체의 해체에는 성공하지 못함
탕평론 자체는 전제적 통치체제를 유지,강화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당쟁의 모순을 시정할 수 없었음
Tip. 수원화성
정약용이 설계하였으며 화포를 배치하여 적을 공격할 수 있고, 전통적인 성곽 영식 위에 서양식 건축 기술을 도입하여 축조하였으며 공학 측면에서 견고하다. 화성은 자급 도시, 상업 도시, 농업 도시, 군사 도시로서 육성되었다. 수원 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이야기 한국사
김홍도의 규장각도
정조는 뛰어난 젊은 문신들을 선발하여 이 곳에서 연구에 전념케 함으로써 규장각을 중추적인 학술기관으로 성장시켰다.
창덕궁 주합루
정조의 정책개발과 개혁정치, 조선 중기 문예부흥의 산실로서 정약용과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다양한 인재들이 활동하던 중요한 공간이며, 정조가 지은 어제와 어필, 어진, 인장 등을 보관하였던 장소로 그 원형이 잘 남아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9주차. 사림세력의 등장과 민족의 시련(2교시)
1.임진왜란
1)왜란 전의 정세
-조선의 정세
잦은 왜변의 발생
중종 5년)1510)에 일어난 삼포왜란이후에도 왜인들의 소요는 계속됨
중종 39년(1544)에 사량진왜변, 명종 10년(1555)에 을묘왜변을 일으킴
→정부에서는 군국기무를 맡아보는 새로운 기관으로 비변사를 상설화
국방문제에 소홀
일부 사람은 국방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으나 지배층을 당쟁으로 분열되어 국방문제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음
당시 조선 사회는 아직 병농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여서, 농민들은 포를 바치고 병역을 면제 받고, 대신 정부가 용병을 사용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정예군을 유지할 수 없었음
아이는 임진왜란 10년 전에 국방을 위하여 십만양병을 주장하였지만, 안일한 생활과 고식적인 대책에 만족하고 있던 당시의 지배층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
국론의 분열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가 대마도주를 시켜 수교를 교섭 →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을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
-그곳의 실정과 토요토미의 저의를 정탐케 함
서인 정사 황윤길 “정차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
동인 부사 김성일은 반대되는 의견을 내어 논의가 분분함
결국 김성일의 의견을
백두산 정계비 세움(1712)
일본에 통신사 파견(1682, 1711): 왜인의 울릉도 출입금지, 울릉도 귀속처리함
『대전속록/신증동국여지승람/선원계보/북관지/신전자초방』간행
영조의 완론 탕평정치
즉위 초 탕평교서 발표
즉위직후 탕평교서를 발표하여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자신이 노론과 소론을 번갈아 등용하여 오히려 정국을 더욱 어지럽게 함으로써 실패
영조의 정통성 논란
소론과 남인의 일부 강경파가 영조의 정통을 부정하고 노론정권에 반대하여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붕당 간의 관계를 다시 조정하여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확립할 필요가 있음을 절갑
Tip. 영조의 어진
Tip. 이인좌의 난(영조 4년, 1728)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계되었다고 하면서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하여 일으킨 반란.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무장 봉기, 중소상인과 누비를 규합하여 청주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한성으로 북진하다가 안성과 죽산전투에서 병조판서 오명환이 자휘하는 관군에 패함
탕평파 육성
붕당을 없앨 것은 내세우며 왕이 내세우는 논리에 동의하는 노,소의 온건론자를 등용하여 ‘탕평파(완론탕평)’을 육성하고, 국방 중심의 탕평정치를 통해 정국 운영
붕당의 기반 약화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
-이조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후임자를 천거하는 낭천권과, 3사의 관리를 천거할 수 있는 권한을 없앰
-일반인의 여론을 직접 정치에 반영하기 위해 신문고를 부활하고, 궁 밖에 자주 나가서 직접 민의를 수렴함
영조 탕평정치의 한계
강력한 왕권에 의해 일시적으로 당쟁이 억제됨
소론강경파에 의한 나주괘서사건과 사도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영조를 지지한 노론이 절대적으로 우세해지고 소론의 정치적 입장이 약화되어 불균형을 이룸
Tip. 영조의 개혁정책
균역법 시행(1750): 균역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균역법을 시행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세 군영이 도성을 나누어 방위하는 체제를 갖춤
형벌제도의 정비: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엄격하게 시행
『속대전/속오례의』『무원록:법의학서』편찬
Tip. 나주괘서사건(영조31년, 1755)
소론의 윤지는 숙종 때 과거를 통해 관직에 올랐으나 영조 즉위년에 노론의 공격에 휘말려 나주로 유배되었다.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나주목사 이하징 등과 모의한 후 민심을 동요시킬 목적으로 나라를 비방하는글을 대자보에 써서 나주객사에 붙였다가 전라감사 조운규에게 발각되어 처형을 당하였다.
정조의 준론 탕평정치
배경
사도세자의 죽음과 이를 둘러싼 시파와 벽파 간의 갈등을 경험함으로써 영조때보다 더욱 강력한 탕평책을 추진
정조는 즉위 후 노론 벽파를 물리치고 남인 시파를 관직에 고루 기용하면서 왕권의 강화를 시도
Tip. 시파와 벽파
시파(남인+소론+노론 일부)는 사도세자의 잘못은 인정하면서도 죽음 자체는 지나치다는 입장이고, 벽파(노론 중 강경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은 당연하고 영조의 처분은 정당하다고 하였다
준론탕평
당파의 시시비비를 명백히 가리는 준론탕평을 시행하여 영조 때에 세력을 키워 온 척신, 환관 등을 제거
노론과 소론의 일부와 그동안 정치 집단에서 배제되었던 남인 계열의 시파를 중용
Tip. 정조의 왕권강화책
능력중시 등용(서얼출신 등용, 규장각의 검서관)
규장각 설치: 왕실도서관, 박제가, 유득공, 정약용 등이 검서관으로 정치에 참여
초계문신제의 시행: 신하를 재교육함
장용영 설치: 친위부대
수원화성 건설: 정치적, 군사적 기능 도시로 육성
수령의 권한 강화: 지방 사족의 향촌 지배력을 억제, 국가의 통치력을 강화
『대전통편:법전/동문휘고:외교문서집/탁지지:경제서/추관지:형율법령집』
『규장전운:음운정리』『홍재전서:정조의 개인문집』『무예도통지:병법서』등을 편찬
탕평론 한계
문물을 정비하면서 절대왕정을 과시한 정조였지만 붕당 사이의 융화나 붕당자체의 해체에는 성공하지 못함
탕평론 자체는 전제적 통치체제를 유지,강화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당쟁의 모순을 시정할 수 없었음
Tip. 수원화성
정약용이 설계하였으며 화포를 배치하여 적을 공격할 수 있고, 전통적인 성곽 영식 위에 서양식 건축 기술을 도입하여 축조하였으며 공학 측면에서 견고하다. 화성은 자급 도시, 상업 도시, 농업 도시, 군사 도시로서 육성되었다. 수원 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이야기 한국사
김홍도의 규장각도
정조는 뛰어난 젊은 문신들을 선발하여 이 곳에서 연구에 전념케 함으로써 규장각을 중추적인 학술기관으로 성장시켰다.
창덕궁 주합루
정조의 정책개발과 개혁정치, 조선 중기 문예부흥의 산실로서 정약용과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다양한 인재들이 활동하던 중요한 공간이며, 정조가 지은 어제와 어필, 어진, 인장 등을 보관하였던 장소로 그 원형이 잘 남아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9주차. 사림세력의 등장과 민족의 시련(2교시)
1.임진왜란
1)왜란 전의 정세
-조선의 정세
잦은 왜변의 발생
중종 5년)1510)에 일어난 삼포왜란이후에도 왜인들의 소요는 계속됨
중종 39년(1544)에 사량진왜변, 명종 10년(1555)에 을묘왜변을 일으킴
→정부에서는 군국기무를 맡아보는 새로운 기관으로 비변사를 상설화
국방문제에 소홀
일부 사람은 국방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으나 지배층을 당쟁으로 분열되어 국방문제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음
당시 조선 사회는 아직 병농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여서, 농민들은 포를 바치고 병역을 면제 받고, 대신 정부가 용병을 사용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정예군을 유지할 수 없었음
아이는 임진왜란 10년 전에 국방을 위하여 십만양병을 주장하였지만, 안일한 생활과 고식적인 대책에 만족하고 있던 당시의 지배층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
국론의 분열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가 대마도주를 시켜 수교를 교섭 →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을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
-그곳의 실정과 토요토미의 저의를 정탐케 함
서인 정사 황윤길 “정차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
동인 부사 김성일은 반대되는 의견을 내어 논의가 분분함
결국 김성일의 의견을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