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선비와 선비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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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의 선비와 선비정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선비의 가치관

2. 선비정신

3. 역사의식과 선비정신

4. 조선조의 대표적 선비들

5. 조선조의 선비와 현대 한국의 지식사회

본문내용

풍류(風流)라고 짚은 것이다.
조선조 시대의 대표적 선비로서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면 그 대다수가 청빈하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독 화담의 청빈을 부각시킨 것은 그의 가난함이 다른 선비들의 가난함보다도 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화담은 본래 매우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다. 지방에서 양반 행세를 하는 가문이었으나 남의 토지를 빌려서 소작농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토관직(土官職)에 해당하는 하위의 공직을 맡은 적이 있으나, 봉록은 거의 없는 말단직이었다. 소년시설의 경덕이 변변한 스승의 지도도 받지 못하고 거의 독학으로 사물의 이치를 깨달으려고 애쓴 정황을 상상할 수 있다.
극빈의 처지에 놓이면 호구지책을 위해서도 벼슬길을 엿보는 것이 양반의 일반적 심리라 하겠으나, 화담은 끝내 관직을 외면하였다. 그의 학덕(學德)이 알려져서 31세 되던 해에 조광조에 의하여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된 적도 있다. 120명 추천된 젊은이들 가운데 수석(首席)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하니, 화담이 마음만 먹으면 벼슬도 하고 가난도 면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그러나 그는 하려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다른 선비들의 청빈은 청백리(淸白吏)로서의 청빈이었으나, 화담의 경우는 백수(白首)로서의 가난이었던 것이다.
화담은 천성이 자연을 사랑하는 자유인이었다. 그에게는 \'청빈\'이라는 말보다도 \'안빈난도\'(安貧樂道)가 더욱 어울린다. 그는 아름다운 산수를 만나면 곧 그곳에 동화하여 속세의 시름을 잊었다. 남과 다투어야 하는 부귀의 길보다는 아무도 가로막는 이 없는 산수와 달과 바람을 벗삼아 가며 시정(詩情)속에 잠기는 편이 그로서는 훨씬 멋있고 뜻있는 삶이었다. 대부분의 조선조 선비들이 풍류를 즐긴 가운데서도 특히 화담의 풍류를 대서(大書)로 특필한 최근덕의 뜻에 공감을 느끼는 까닭이다.
명기 황진이(黃眞伊)와의 연문에 관한 전설도 화담의 풍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돈도 지위도 없는 초라한 선비였을 화담에게 재색과 학예(學藝)를 겸비한 황진이가 그토록 강하게 끌렸다면, 필시 화담에게 그만한 매력이 있었을 것이다. 화담의 그 매력의 근원을 화담의 멋과 풍류 이외의 다른 곳에서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퇴계나 율곡과 같은 조선조의 전형적 선비들과 색채를 달리한 선비를 한 사람 더 거론하기로 한다면, 아마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연암이 특히 우리의 조목을 끄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가 서빈들의 계급적 기반인 양반(兩班)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적 태도를 보였으며, 비록 소설의 형식을 빌리기는 했으나 선비다운 선비가 지켜야 할 참모습에 대한 견해를 간접적으로나마 제시한 바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양반전}의 큰줄거리를 짧게 요약한다면, 양반 즉, 사족(士族)에 대한 대담한 \'비판과 공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양반들의 생활에 대한 부분적인 비판이라기보다도 그들이 금조옥과(金條玉科)처럼 신봉하고 있는 생활철학 전체에 대한 비판이다. 연암은 서민이나 천민 계급의 출신이 아니요, 서족 출신도 아니다. 비록 집안이 매우 가난하기는 했으나, 그의 가문에는 선대에 부마(駙馬)가 두 사람 있었고, 그의 조상들은 대를 이어서 벼슬길에 올랐다. 그의 집안에는 박세채(朴世彩)(1632∼1695)와 박필주(朴弼周, 1665∼1748) 등 저명한 유학자들이 있었고, 연암 자신도 어려서부터 유학 공부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반사회에 대하여 투철한 부정적 시각을 가졌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연암은 {양반전}에서 글잃기만 좋아하고 생활력이 전혀 없는 정선고을 어느 양반 한 사람의 모습을 희화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한 사람의 양반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양반\'으로 불리는 사람들 전체의 생활태도를 비난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연암은 허례와 허식에 사로잡혀 있는 양반들의 일상생활을 꼬집었으며, 생산적인 노동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글줄이나 읽은 것을 밑천으로 삼고 높은 지위를 누리며 백성들을 수탈하는 행패를 질타하였다.
양반에 대한 연암의 공격은 그의 2기 소설 {호질}(虎叱)에서도 계속된다. 연암은 이 소설에서 대왕(大王) 호랑이의 입을 빌어서 양반들의 이론적 기반인 유학(儒學) 사상을 은근히 비판하고 있다.
\"대체 음양(陰陽)이란 무엇인가. 낮과 밤을 말하는 것이고, 남자와 여자를 말하는 것인데, 그들은 이것을 가지고 천지의 원리를 깨달은 척한단 말이야.……오행(五行)이나 육기(六氣)라는 것은 입김과 같은 거야. 불면 꺼져 없어져 버려.…… 그들이 충효(忠孝)라고 해서 들이마시고 있는 물건은 무엇인가. 이것은 공자와 맹자가 만들어 놓은 실로 해괴하기 짝이없는 것인데, 애당초 공자나 맹자는 벼슬을 하지 못해서 불만이 대단했던 야심가야.…… 나중에 그들을 따르는 자들은 충효를 외치며 인류를 비굴한 노예로 묶어놓고, 거기에서 이득을 보고 자신들의 부귀와 영화를 보려 한 단 말이야.……\"
호랑이의 입을 빌어서 유학 사상을 비판한 것이므로 자연히 그 수준이 낮고 내용이 거칠 수밖에 없지만, 연암은 술주정을 빙자하여 바른말을 하는 수법으로 유학의 주요 개념을 꼬집고 있다. 요컨대, 연암은 유학자들이 만고의 진리를 간직한 보고처럼 숭상하는 성리학 내지 유교의 가르침의 취약한 측면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비판의 근저에는 그렇듯한 언어의 성찬(盛饌)으로 세월을 보내는 것보다는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생산적인 학문이 더 중요하다는 실학자(實學者)로서의 시각이 깔려 있음을 본다.
{호질}에 등장하는 북곽(北郭) 선생은 학문이 깊고 덕이 높은 학자로서 온 고장의 존경을 받을 뿐 아니라, \"그의 이름은 전국에 뻗혀 공맹의 제자간에 날리고 유림에 빛나는\" 인물이었다. {호질}에 등장하는 또 한 사람의 주인공은 \'동리자\'(東里子)라는 과부다. 동리자는 재색을 겸비한 매력적인 여자였을 분 아니라, 뭇 남자들의 유혹과 청혼의 손길을 단호하게 물리친 열녀로서 칭송이 자자한 요조숙녀였다. 동리자는 북곽선생과 함께 고장의 태양이요 자랑거리였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 왔다.
다만 겉으로 보기에 학덕이 높은 군자요 절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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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1.20
  • 저작시기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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