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유랑예인집단의 정의
Ⅱ. 유랑예인집단의 유래 및 흐름
Ⅲ. 유랑예인집단의 발달사
Ⅳ. 유랑예인집단의 종류
1 사당패
2 초라니패
3 솟대쟁이패
4 광대패
5 중매구패
6 광대패
7 대광대패
8 무동패
9 얘기장사
10 풍각장이패
11 남사당패
12 굿중패
Ⅴ. 풍속도로 본 유랑예인집단
1 사당연희
2 굿중패모양
3 박첨지 놀음하는 모양
4 죽방울 받는 모양
5 부벽유연
6 삼일유가
Ⅵ. 유랑예인집단의 역할 및 의의
◈ 참고문헌 ◈
Ⅱ. 유랑예인집단의 유래 및 흐름
Ⅲ. 유랑예인집단의 발달사
Ⅳ. 유랑예인집단의 종류
1 사당패
2 초라니패
3 솟대쟁이패
4 광대패
5 중매구패
6 광대패
7 대광대패
8 무동패
9 얘기장사
10 풍각장이패
11 남사당패
12 굿중패
Ⅴ. 풍속도로 본 유랑예인집단
1 사당연희
2 굿중패모양
3 박첨지 놀음하는 모양
4 죽방울 받는 모양
5 부벽유연
6 삼일유가
Ⅵ. 유랑예인집단의 역할 및 의의
◈ 참고문헌 ◈
본문내용
맨 마지막에 행해지는 종목이었다고 한다.
박첨지놀음에 동원되는 악기는 풍물에서 쓰이는 꽹과리, 징, 북, 장고 등의 사물과 태평소 또는 피리다. 그림에서는 소고만 쓰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오늘날 전승되는 박첨지놀음과는 맞지 않는다. 소고는 남사당패의 전신인 사당패에서 흔히 사용했던 악기로 남사당패에서도 사용되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박첨지놀음에서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는 사물과 태평소(또는 피리)중 어느 것도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은 그림을 그런 화가가 상황을 너무 단순화시켜 묘사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인형을 이용한 연극은 중국에도 오랜 전통예술로 이어내려 왔고, 우리나라 문헌에도 꼭두각시 놀음을 지칭하여 ‘괴리희’라고 설명한 문헌이 더러 보인다. 이미 삼국시대에 있었다는 것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고, 고려에 이르면 서역과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의하면 이와 같은 인형극은 고려시대 때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꼭두각시놀음이 농경의식의 하나인 농악에서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외래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형성되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즉, 삼국시대 때 중국에서 수입되어 토착화되었다가 일본으로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가장 타당하다. 현재 남아 있는 꼭두각시놀음은 내용으로 보아 조선후기에야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4 죽방울 받는 모양
죽방울 노는 것은 공으로 재주를 부리는 것을 뜻하며 다른 말로 금환이라고도 한다. 금환은 신라시대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에도 등장하여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 곡예의 일종이다. 「향악잡영오수」에 등장하는 금환은 여러 개의 공을 양손으로 던지고 받는 도칠환이라는 공놀이로 중국의 한나라 때부터 전래된 것으로 전해지며 백제와 고구려에서도 연행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 이후에는 창우희 일종으로 땅재주, 줄타기등과 함께 금환을 했다. 조선 중후기에 이르면 창우희가 축소되고 창우집단도 점차 분화되어 금환과 같은 곡예는 재인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조선 말기에는 금환을 비롯한 땅재주, 줄타기, 곡예가 당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유랑예인집단의 주요 레파토리로 자리 잡았다.
그림에 나타난 죽방울은 「향악잡영오수」에 나타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즉, 여러 개의 공을 던지고 받는 형태가 아니라 가운데가 오목한 모양의 공을 공중에 띄워 가는 줄로 쳐 올리는 방식의 곡예인 것이다. 이 점으로 미루어 ‘죽방울’또는 금환이라 불려지는 곡예는 한 가지 곡예 형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공 또는 공 모양의 물체를 이용해 재주를 부리는 것을 통칭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근대에 죽방울 받기를 공연했던 대표적인 예인집단으로는 초라니패를 꼽을 수 있다. 초라니패의 ‘초라니’는 ‘초란’에서 유래한 것으로 요사스런 탈을 말한다. 이들은 주로 가면극인 탈놀이를 했지만 풍물과 죽방울 받기를 행했다고 전한다. 17부터 19세기에 널리 알려져 활동했으며 관노나 군인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5 부벽유연
부벽루에서 잔치를 베푸는 장면이다. 부벽루는 난간 그림자가 강심에 비치고 대동강능라도에 달이 비친 경치는 천하의 장관을 이룬다 했다. 잔치에는 술과 기녀가 있게 마련이고 노래와 춤이 따르게 된다. 「부벽루연회도」에 그려진 공연은 두 가지로 부벽루에서 평양감사를 위한 궁중연회 방식의 공연과 야외에 운집한 관중들을 위해 벌어지는 탈춤과 줄타기 공연이다. 부벽루 왼편에는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탈춤공연이 벌어졌다. 초록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고 팔을 벌려 춤을 추고 있는 여인은 소무이며, 오른쪽으로 흰 도포를 입고 망건을 쓰고 담뱃대를 들고 구부정하게 서 이 있는 남자가 샌님이다. 흰 장삼과 하늘색 장삼을 입고 흰 고깔을 쓰고 춤을 추고 있는 남자들은 상좌춤을 추고 있다. 이들의 춤을 반주하고 있는 남자들은 상좌춤을 추고 있다.
악사들의 왼편으로 군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하늘색으로 된 크고 긴 천이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커다란 천에 할미탈을 붙이고 소매와 한삼자락을 달아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도록 만들어서 세워져있는데, 이는 탈춤을 추고 있는 탈춤패의 공연을 알리는 선전적인 효과를 내는 설치물로 보인다. 공연을 위한 또 하나의 설치물로서, 춤을 추고 있는 탈춤패 아래쪽으로 줄을 세워놓고 줄타기를 하고 있는 줄광대 옆에 세워져 있는 탑도 보이다. 그 아래쪽으로 다른 공연들이 펼쳐지는 모습도 있었을 텐데, 훼손되어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6 삼일유가 (삼일유가, 19c, 8폭 병풍, 국립중앙박물관)
삼현육각과 부채를 든 무동 광대 등의 행렬이 어사화를 꼽은 과거급제자 모당을 앞서간다. 악대 중 북은 2명이 메고 한 연주자가 친다.
Ⅵ. 유랑예인집단의 역할 및 의의
조선 후기 음악사회를 민악화 하였다고 할 수 있는 예인집단은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우선 지배체계가 성리학적 예학의 미학관으로 정치화를 끊임없이 기도한 시대 속에서도 조선의 음악 감수성은 역사적으로 민악이라는 점을 볼 때, 유랑예인집단의 역할은 대단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즉, 이들이 기층민중 출신이었기 때문에 인간화를 추구하는 기층 민중들을 하나의 음악예술로 묶을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기층 민중들은 물론 왕권을 수행하는 모든 계층들의 음악 예술적 요구에 이들이 부단한 창조적 중개로 음악의 대중성과 음악 예술성을 다양하게 성숙, 발전시켰던 것이다. 유랑예인집단으로 인해 외세의 침략에 따라 국가가 위기에 처해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한민족 공통의 민족음악으로 대응하거나 세계화 시킬 수 있었다.
◈ 참고문헌 ◈
노동은, 『한국근대음악사』,(서울: 한길사), 1976.
심우성, 『남사당패 연구』(서울: 동문선), 1989.
심우성, 『남사당놀이』(서울: 화산문화), 2000.
윤미용, 『한국음악자료총서 권37 -조선시대음악풍속도1』(서울: 민속원), 2002.
-----, 『한국음악자료총서 권38 -조선시대음악풍속도2』(서울: 민속원), 2002.
이보형, 『풍물굿』(서울: 평민사), 1986.
정수진, 『조선시대 유랑예인집단에 관한 담론분석』(서강대학교 대학원), 1995.
박첨지놀음에 동원되는 악기는 풍물에서 쓰이는 꽹과리, 징, 북, 장고 등의 사물과 태평소 또는 피리다. 그림에서는 소고만 쓰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오늘날 전승되는 박첨지놀음과는 맞지 않는다. 소고는 남사당패의 전신인 사당패에서 흔히 사용했던 악기로 남사당패에서도 사용되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박첨지놀음에서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는 사물과 태평소(또는 피리)중 어느 것도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은 그림을 그런 화가가 상황을 너무 단순화시켜 묘사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인형을 이용한 연극은 중국에도 오랜 전통예술로 이어내려 왔고, 우리나라 문헌에도 꼭두각시 놀음을 지칭하여 ‘괴리희’라고 설명한 문헌이 더러 보인다. 이미 삼국시대에 있었다는 것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고, 고려에 이르면 서역과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의하면 이와 같은 인형극은 고려시대 때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꼭두각시놀음이 농경의식의 하나인 농악에서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외래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형성되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즉, 삼국시대 때 중국에서 수입되어 토착화되었다가 일본으로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가장 타당하다. 현재 남아 있는 꼭두각시놀음은 내용으로 보아 조선후기에야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4 죽방울 받는 모양
죽방울 노는 것은 공으로 재주를 부리는 것을 뜻하며 다른 말로 금환이라고도 한다. 금환은 신라시대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에도 등장하여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 곡예의 일종이다. 「향악잡영오수」에 등장하는 금환은 여러 개의 공을 양손으로 던지고 받는 도칠환이라는 공놀이로 중국의 한나라 때부터 전래된 것으로 전해지며 백제와 고구려에서도 연행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 이후에는 창우희 일종으로 땅재주, 줄타기등과 함께 금환을 했다. 조선 중후기에 이르면 창우희가 축소되고 창우집단도 점차 분화되어 금환과 같은 곡예는 재인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조선 말기에는 금환을 비롯한 땅재주, 줄타기, 곡예가 당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유랑예인집단의 주요 레파토리로 자리 잡았다.
그림에 나타난 죽방울은 「향악잡영오수」에 나타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즉, 여러 개의 공을 던지고 받는 형태가 아니라 가운데가 오목한 모양의 공을 공중에 띄워 가는 줄로 쳐 올리는 방식의 곡예인 것이다. 이 점으로 미루어 ‘죽방울’또는 금환이라 불려지는 곡예는 한 가지 곡예 형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공 또는 공 모양의 물체를 이용해 재주를 부리는 것을 통칭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근대에 죽방울 받기를 공연했던 대표적인 예인집단으로는 초라니패를 꼽을 수 있다. 초라니패의 ‘초라니’는 ‘초란’에서 유래한 것으로 요사스런 탈을 말한다. 이들은 주로 가면극인 탈놀이를 했지만 풍물과 죽방울 받기를 행했다고 전한다. 17부터 19세기에 널리 알려져 활동했으며 관노나 군인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5 부벽유연
부벽루에서 잔치를 베푸는 장면이다. 부벽루는 난간 그림자가 강심에 비치고 대동강능라도에 달이 비친 경치는 천하의 장관을 이룬다 했다. 잔치에는 술과 기녀가 있게 마련이고 노래와 춤이 따르게 된다. 「부벽루연회도」에 그려진 공연은 두 가지로 부벽루에서 평양감사를 위한 궁중연회 방식의 공연과 야외에 운집한 관중들을 위해 벌어지는 탈춤과 줄타기 공연이다. 부벽루 왼편에는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탈춤공연이 벌어졌다. 초록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고 팔을 벌려 춤을 추고 있는 여인은 소무이며, 오른쪽으로 흰 도포를 입고 망건을 쓰고 담뱃대를 들고 구부정하게 서 이 있는 남자가 샌님이다. 흰 장삼과 하늘색 장삼을 입고 흰 고깔을 쓰고 춤을 추고 있는 남자들은 상좌춤을 추고 있다. 이들의 춤을 반주하고 있는 남자들은 상좌춤을 추고 있다.
악사들의 왼편으로 군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하늘색으로 된 크고 긴 천이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커다란 천에 할미탈을 붙이고 소매와 한삼자락을 달아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도록 만들어서 세워져있는데, 이는 탈춤을 추고 있는 탈춤패의 공연을 알리는 선전적인 효과를 내는 설치물로 보인다. 공연을 위한 또 하나의 설치물로서, 춤을 추고 있는 탈춤패 아래쪽으로 줄을 세워놓고 줄타기를 하고 있는 줄광대 옆에 세워져 있는 탑도 보이다. 그 아래쪽으로 다른 공연들이 펼쳐지는 모습도 있었을 텐데, 훼손되어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6 삼일유가 (삼일유가, 19c, 8폭 병풍, 국립중앙박물관)
삼현육각과 부채를 든 무동 광대 등의 행렬이 어사화를 꼽은 과거급제자 모당을 앞서간다. 악대 중 북은 2명이 메고 한 연주자가 친다.
Ⅵ. 유랑예인집단의 역할 및 의의
조선 후기 음악사회를 민악화 하였다고 할 수 있는 예인집단은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우선 지배체계가 성리학적 예학의 미학관으로 정치화를 끊임없이 기도한 시대 속에서도 조선의 음악 감수성은 역사적으로 민악이라는 점을 볼 때, 유랑예인집단의 역할은 대단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즉, 이들이 기층민중 출신이었기 때문에 인간화를 추구하는 기층 민중들을 하나의 음악예술로 묶을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기층 민중들은 물론 왕권을 수행하는 모든 계층들의 음악 예술적 요구에 이들이 부단한 창조적 중개로 음악의 대중성과 음악 예술성을 다양하게 성숙, 발전시켰던 것이다. 유랑예인집단으로 인해 외세의 침략에 따라 국가가 위기에 처해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한민족 공통의 민족음악으로 대응하거나 세계화 시킬 수 있었다.
◈ 참고문헌 ◈
노동은, 『한국근대음악사』,(서울: 한길사), 1976.
심우성, 『남사당패 연구』(서울: 동문선), 1989.
심우성, 『남사당놀이』(서울: 화산문화), 2000.
윤미용, 『한국음악자료총서 권37 -조선시대음악풍속도1』(서울: 민속원), 2002.
-----, 『한국음악자료총서 권38 -조선시대음악풍속도2』(서울: 민속원), 2002.
이보형, 『풍물굿』(서울: 평민사), 1986.
정수진, 『조선시대 유랑예인집단에 관한 담론분석』(서강대학교 대학원),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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