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양세력의 진출과 제1.2차 중영전쟁
태평천국과 중국근대의 민중운동
국가부강운동:양무(洋務)와 변법(變法)
청조의 신정과 입헌운동
공화정부의 출발과 군벌정치로의 전환
태평천국과 중국근대의 민중운동
국가부강운동:양무(洋務)와 변법(變法)
청조의 신정과 입헌운동
공화정부의 출발과 군벌정치로의 전환
본문내용
기 위해 산 업이 장려되었다. 1901년부터 청조는 독판정무처(督辦政務處)를 신설 하여 신정을 실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서양학문을 익힌 새로 운 지식인들이 출현하였으며, 청조의 군대를 대신한 신군이 성장하였 다. 신사층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입헌기관으로서, 중앙의 자정원 (資政院)과 지방의 자의국(諮議局)도 개설되었다. 입헌운동에 참여하 였던 대부분의 신사층은 열강의 손에 들어간 이권을 회수하는 운동에 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정부와 입헌기관 사이에는 긴장이 싹트고 있 었다. 열강의 압력을 받은 청정부가 이권회수운동을 방해하였기 때문 에, 중앙정부와 지방이익도 이를 중심으로 대립하게 되었으며, 이 때 문에 입헌기관도 전제군주제를 단순하게 뒷받침하는 정도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신정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핵심은 여전히 만주족이 독점하였고, 신정을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하였으나, 그 몫도 담세자에게 과도하게 부과되었다. 신정의 실시 기간은 다른 한편으로 중국을 구하는 것은 오히려 청의 타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 한인들에 의한 혁명이 점차 열기를 더해가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혁명을 주장한 사람 중 대표적인 인물인 광동 출신의 손문은 청일전쟁에서 청조가 패배하자, 그 이전에 제출하 였던 개혁안을 철회하고 1895년에 흥중회(興中會)라는 비밀결사를 조 직하면서 혁명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의 혁명활동이란 매우 미약한 세력에 의해 중국의 변방에서 시작되었을 뿐이다. 하지 만, 손문은 대략 이 시기에 혁명이념의 골격을 마련하였다. 만주인을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며, 합중정부를 건설한다는 것이 그것으로서, 여기에서 그가 분명히 청조의 타도와 한인에 의한 공화정부의 성립을 목표로 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의화단 운동의 실패는 혁명의 논리가 신지식인들에게 더 확장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특히 국내 뿐 만 아니라,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지식인 중, 적지 않은 숫자가 성 중 심의 혁명단체들을 조직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이들 단체는 1905 년에 통합의 필요성을 느껴 중국혁명동맹회를 동경에서 창립하는데까 지 발전하였다. 동맹회는 민족, 민생, 민권을 기본 이념으로 하는 삼민주의 이념을 공식적으로 채택하면서, 기관지인 {民報}를 통해 이를 널리 알리는 한 편, 국내에서는 무장봉기를 일으켜 혁명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무장 봉기는 산만한 조직에 의해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주로 중국내에 있는 비밀결사인 화남의 천지회나 양자강 유역에 있는 가로회와의 연 합에 의존하였으며, 동맹회 이전의 무장 봉기까지 포함하면 전후 10여 차례에 달하였다. 비밀결사와 연합한 무장봉기가 계속 실패로 돌아간 뒤, 동맹회는 무력의 기반을 신군에서 찾았다. 그리하여 1911년 4월에 는 광동신군의 봉기가 있었다. 사실 이러한 무장 봉기는 군사력에 치 중하였다기 보다는 정치적인 성격이 강한 것들이었다. 중국혁명동맹회의 활동만이 청조를 무너뜨린 동력은 아니었다. 중국 의 경제적 조건이 악화된 것도 그 중의 하나였다. 청조가 신정비용과 배상금 마련을 위해 과도하게 세금을 부과하자, 담세자들은 항세운동 을 전개하였고, 일부 지역에서는 쌀값 폭등에 따라 민중들이 관의 조 정을 기대하며 청원하였으나 오히려 탄압을 받자, 쌀가게를 공격하여 쌀폭동을 야기하였다. 청조는 스스로 경제적인 상황을 악화시키므로 써, 자신의 갑작스런 몰락에 기여하였던 것이다. 이권회수운동 과정에 서 정부가 철도를 국유화한 조치도 청조의 붕괴를 촉진한 요인으로 작 용하였다. 성을 중심으로 추진된 이권회수 운동 중에서, 외국인이 소 유한 철로를 회수하는 일은 중국인의 애국심과 지방의 이익을 동시에 만족시켜 줄 수 있었으나, 정부는 이를 국유화하여 지배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실천에 옮겼다. 철로를 외국에 팔아 넘길 것이라 생각한 호남과 호북, 양광, 사천 성의 애국주의자들이 철로를 지키자는 보로 운동(保路運動)을 전개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 운동의 시위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혁명파의 공작을 받은 호북성의 신군은 이 를 진압하지 않고 오히려 반만 반란으로 선회하였다(1911.10.10. 신해 혁명). 혁명은 전국에 확산되었고, 북경 지역의 군사실력자인 원세개 가 이에 동조하므로서, 청왕조는 사실상 끝이 났다. 1912년 1월 1일은 중국의 역사에서 전제체제가 종결되고 공화제가 출범한 날로 기념되지만, 손문은 약 한달 정도만 남경에서 대총통의 직위에 있었을 뿐, 곧이어 원세개가 자신의 근거지인 북경에서 공화 정부의 대총통이 되었다. 혁명파는 내부적으로 조직력과 군사력 및 재정 능력 면에서 약점을 드러냈고, 이런 점들로 인해 그들은 집권하 지 못하였던 것이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에는 군사력과 재정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입증해 준 셈이었다. 군주제에서 공화제로의 전환은 정치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갖지만, 이 전환 과정도 용이하지는 않았다. 공화제는 명목일 뿐, 원세개는 곧 전통시대의 황제제도를 부활하려고 시도하였다. 후대 의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고, 또 당시에도 적지 않은 반대 속에 진행된 이 시도는, 원세개에게 새로운 정치이념이 결여되었음을 보여 주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야망과 더불어 가속화되는 중앙정부의 통제 력 약화를 보완하여 강국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 보였던 것이다. 북경 세력의 핵심인 원세개가 죽자(1916), 그의 지휘하에 있던 군사 력이 몇몇 부하들에 의해 분할되면서, 군인들이 정부와 지방요직을 차 지하는 군벌시대가 개막되었다. 이것은 18세기 말부터 진전되어온 지 방의 군사화와 태평천국 이후 진행된 지방주의의 성장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원세개의 부하들은 주로 화북과 화중을 세력권으 로 하였고, 화남은 서남 군벌이 지배하였다. 외국과의 관계에서도 어 떤 군벌은 영국을, 또 어떤 군벌은 일본을 가까이 하였고, 자신의 존 립과 팽창을 위해서는 상호간의 대립과 전쟁도 불사하였다. 말하자면 신해혁명은 구제도를 붕괴시키면서 새로운 사회로 갈 수 있는 길을 열 어 주었지만, 그것의 실현은 장래에나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