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국제 정세의 변화
3. 백제의 멸망
4. 백제의 부흥운동
(1)부흥군의 거병과 부흥 백제국의 성립
(2)부흥 백제국의 대외관계
(3)나당 점령군과의 전쟁
(4)부흥운동의 실패
5. 고구려의 멸망
6. 고구려의 부흥운동
(1)한성 중심의 부흥운동
(2)압록강 이북지역의 부흥운동
7. 맺음말
2. 국제 정세의 변화
3. 백제의 멸망
4. 백제의 부흥운동
(1)부흥군의 거병과 부흥 백제국의 성립
(2)부흥 백제국의 대외관계
(3)나당 점령군과의 전쟁
(4)부흥운동의 실패
5. 고구려의 멸망
6. 고구려의 부흥운동
(1)한성 중심의 부흥운동
(2)압록강 이북지역의 부흥운동
7. 맺음말
본문내용
왕은 국내 기반이 미약하고 또 옹립된 왕이었기 때문에 군사지휘권은 실제 복신과 도침이 장악하였다. 그렇지만 초기에는 부흥 백제국의 최고 지도부인 풍왕과 복신, 도침이 서로 협조하며 보조를 맞추어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661년 3월의 웅진강구 전투 및 두량윤성 전투 이후 점차 부흥백제군 지도부 사이에 내분이 일었다. 첫 번째 내분은 복신이 동지였던 도침을 제거한 사건이다. 복신이 도침을 살해한 원인에 대해서 현재의 자료에는 아무런 기사가 없다. 그렇지만 그 원인의 하나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도침의 위세가 컸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도침이 거느린 부흥군은 웅진강구 전투에서 대패한 반면에 복신의 군대는 두량윤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대패와 대승이라는 전투의 결과는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갈등을 일으킨 것 같다. 이에 더하여 도침은 부흥 백제국의 최고 사령관처럼 행세하였다. 도침의 독단적인 행동은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고 나아가 권력을 둘러싼 암투가 촉발된 것 같다. 그 결과 복신은 동지인 도침을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도침을 죽인 후 복신은 도침의 군대까지 수중에 넣어 군사지휘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렇게 되자 복신과 도침의 세력균형 휘에서 자신의 위상을 유지했던 풍왕의 위치도 흔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왕은 복신과 호흡을 맞추면서 부흥 백제국을 운영해 나가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에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662년 12월에 이루어진 피성으로의 천도이다. 피성은 오늘날 김제시 지역이다. 풍왕이 피성 천도를 주장한 가장 큰 이유는 주류성은 농사와 양잠을 할 땅이 아니어서 장기적으로 버틸 수 없었으므로 경제적 이점을 가진 피성으로 천도하려고 하였다. 또한 자신의 주도하에 천도를 단행함으로써 자기의 세력기반을 확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피성으로의 천도하였지만 방어에 불리하였고 피성과 거리가 얼마 되지 않은 덕안성이 신라에 의해 함락됨으로써 피성 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이렇게 되자 풍왕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복신은 군사적 실권뿐만 아니라 정치적 실권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복신은 모반심을 품게 된다. 복신은 거짓으로 병든 체하고 풍왕이 문병 오는 것을 기회로 풍왕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복신의 음모를 사전에 눈치챈 풍왕은 복신의 계교를 역으로 이용하여 도리어 심복을 거느리고 가서 급습하여 그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복신은 죽게 된다.
풍왕은 복신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지만 초기부터 부흥군을 일으키고 이끌어온 복신의 피살은 군사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반면 부흥 백제국 내의 이러한 정변은 나당 점령군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에 신라는 곧바로 주류성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부흥 백제국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위해 유인궤는 본국에 병력 증원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나당 점령군의 움직임에 대해 풍왕은 한편으로는 동요하는 군심을 안정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고구려와 왜에 구원병을 파견해 줄 것을 긴급히 요청하였다. 고구려는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지만 왜는 이에 응하여 2만 7천의 군대를 보냈다.
나당점령군은 부흥군의 거점인 주류성을 먼저 공격하고 외곽에 위치한 견고한 성인 가림성은 나중에 함락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부흥군은 이러한 작전을 간파하지 못하고 일부의 군사만 주류성에 남기고 가림성에 대한 방비를 든든히 한 후 자신은 왜군을 맞이하러 백강으로 갔다.
웅진강을 출발한 당의 수군은 백강에 도착하여 왜 수군과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 전투에서 당의 수군이 승리하게 된다. 수군이 왜의 수군과 백강 입구에서 전투를 벌이는 동안 육군은 곧장 주류성으로 진격하였다. 이 주류성을 공격한 육군도 나당 연합군이었다.
이 시기 주류성에는 부흥 백제군과 왜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나당 육군이 진격해오자 부흥 백제군은 주류성을 나와 진을 치고 싸웠다. 그리하여 4-5일간에 걸쳐 양군 사이에는 몇 차례의 공방이 있었다. 그러나 부흥 백제군은 승기를 잡지 못하고 패하여 다시 주류성으로 들어가 농성하였다. 이에 신라군은 주류성을 포위하였다. 이 때 백강 전투에서 제왜 연합군이대패하였다는 것과 풍왕이 고구려로 피신하였다는 소식이 부흥백제군에게 전해진 것 같다. 이러한 소식은 부흥 백제군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이었고 더 이상 항거할 기력이 사라지게 했다. 그리하여 왕자 충승 등은 왜군과 함께 신라군에 항복하였고 주류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주류성이 함락되자 두량윤성을 비롯한 주변의 여러 성들도 항복하였다.
그렇지만 여전히 항복을 거부한 채 나당점령군에 대항한 성도 있다. 그 대표적인 곳이 임존성이다. 이 임존성을 지킨 장수는 지수신이다. 주류성을 함락한 나당 점령군은 아직 항복하지 않은 웅진 이남의 성들을 공략한 후 방향을 돌려 북쪽의 성들에 대한 공격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두량윤성을 비롯한 나머지 성들을 함락시키고 마지막으로 임존성을 공격했던 것이다. 신라군의 임존성 공격에는 문무왕도 참여하였지만 결국에는 실패한다.
이에 신라군이 회군한 뒤에 임존성 공격은 당군이 맡게 되었다. 당군은 신라군이 공격하였다가 실패한 것을 보고는 다른 방법으로 임존성을 함락시키기로 하였다. 그것은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를 이용하여 그들을 공격하게 하는 것이다.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는 주류성이 함락되는 시기를 전후하여 당군에 항복하였다. 한 때 행동을 같이 하였던 흑치상지 등이 당군의 선봉이 되어 공격해 왔고 그 뒤로는 당나라 군사가 진격해 오자 임존성의 군사들은 크게 동요하였으며 성의 저항은 급격히 무너져버린 것 같다. 이러한 국면을 도저히 전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이로써 부흥 백제국은 마침내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
5. 고구려의 멸망
백제를 멸망시킨 후 신라와 당은 곧바로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서둘렀다. 당은 백제를 멸망시킨 이듬해 소정방, 계필하력 등으로 수륙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케 하였고, 신라는 이들에게 군사와 군량을 보급하였다. 이 때 당의 수군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포위하고 6~7개월동안 공격하였으나 연개소문의 강력한 반항에 부
그런데 661년 3월의 웅진강구 전투 및 두량윤성 전투 이후 점차 부흥백제군 지도부 사이에 내분이 일었다. 첫 번째 내분은 복신이 동지였던 도침을 제거한 사건이다. 복신이 도침을 살해한 원인에 대해서 현재의 자료에는 아무런 기사가 없다. 그렇지만 그 원인의 하나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도침의 위세가 컸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도침이 거느린 부흥군은 웅진강구 전투에서 대패한 반면에 복신의 군대는 두량윤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대패와 대승이라는 전투의 결과는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갈등을 일으킨 것 같다. 이에 더하여 도침은 부흥 백제국의 최고 사령관처럼 행세하였다. 도침의 독단적인 행동은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고 나아가 권력을 둘러싼 암투가 촉발된 것 같다. 그 결과 복신은 동지인 도침을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도침을 죽인 후 복신은 도침의 군대까지 수중에 넣어 군사지휘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렇게 되자 복신과 도침의 세력균형 휘에서 자신의 위상을 유지했던 풍왕의 위치도 흔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왕은 복신과 호흡을 맞추면서 부흥 백제국을 운영해 나가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에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662년 12월에 이루어진 피성으로의 천도이다. 피성은 오늘날 김제시 지역이다. 풍왕이 피성 천도를 주장한 가장 큰 이유는 주류성은 농사와 양잠을 할 땅이 아니어서 장기적으로 버틸 수 없었으므로 경제적 이점을 가진 피성으로 천도하려고 하였다. 또한 자신의 주도하에 천도를 단행함으로써 자기의 세력기반을 확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피성으로의 천도하였지만 방어에 불리하였고 피성과 거리가 얼마 되지 않은 덕안성이 신라에 의해 함락됨으로써 피성 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이렇게 되자 풍왕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복신은 군사적 실권뿐만 아니라 정치적 실권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복신은 모반심을 품게 된다. 복신은 거짓으로 병든 체하고 풍왕이 문병 오는 것을 기회로 풍왕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복신의 음모를 사전에 눈치챈 풍왕은 복신의 계교를 역으로 이용하여 도리어 심복을 거느리고 가서 급습하여 그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복신은 죽게 된다.
풍왕은 복신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지만 초기부터 부흥군을 일으키고 이끌어온 복신의 피살은 군사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반면 부흥 백제국 내의 이러한 정변은 나당 점령군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에 신라는 곧바로 주류성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부흥 백제국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위해 유인궤는 본국에 병력 증원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나당 점령군의 움직임에 대해 풍왕은 한편으로는 동요하는 군심을 안정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고구려와 왜에 구원병을 파견해 줄 것을 긴급히 요청하였다. 고구려는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지만 왜는 이에 응하여 2만 7천의 군대를 보냈다.
나당점령군은 부흥군의 거점인 주류성을 먼저 공격하고 외곽에 위치한 견고한 성인 가림성은 나중에 함락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부흥군은 이러한 작전을 간파하지 못하고 일부의 군사만 주류성에 남기고 가림성에 대한 방비를 든든히 한 후 자신은 왜군을 맞이하러 백강으로 갔다.
웅진강을 출발한 당의 수군은 백강에 도착하여 왜 수군과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 전투에서 당의 수군이 승리하게 된다. 수군이 왜의 수군과 백강 입구에서 전투를 벌이는 동안 육군은 곧장 주류성으로 진격하였다. 이 주류성을 공격한 육군도 나당 연합군이었다.
이 시기 주류성에는 부흥 백제군과 왜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나당 육군이 진격해오자 부흥 백제군은 주류성을 나와 진을 치고 싸웠다. 그리하여 4-5일간에 걸쳐 양군 사이에는 몇 차례의 공방이 있었다. 그러나 부흥 백제군은 승기를 잡지 못하고 패하여 다시 주류성으로 들어가 농성하였다. 이에 신라군은 주류성을 포위하였다. 이 때 백강 전투에서 제왜 연합군이대패하였다는 것과 풍왕이 고구려로 피신하였다는 소식이 부흥백제군에게 전해진 것 같다. 이러한 소식은 부흥 백제군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이었고 더 이상 항거할 기력이 사라지게 했다. 그리하여 왕자 충승 등은 왜군과 함께 신라군에 항복하였고 주류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주류성이 함락되자 두량윤성을 비롯한 주변의 여러 성들도 항복하였다.
그렇지만 여전히 항복을 거부한 채 나당점령군에 대항한 성도 있다. 그 대표적인 곳이 임존성이다. 이 임존성을 지킨 장수는 지수신이다. 주류성을 함락한 나당 점령군은 아직 항복하지 않은 웅진 이남의 성들을 공략한 후 방향을 돌려 북쪽의 성들에 대한 공격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두량윤성을 비롯한 나머지 성들을 함락시키고 마지막으로 임존성을 공격했던 것이다. 신라군의 임존성 공격에는 문무왕도 참여하였지만 결국에는 실패한다.
이에 신라군이 회군한 뒤에 임존성 공격은 당군이 맡게 되었다. 당군은 신라군이 공격하였다가 실패한 것을 보고는 다른 방법으로 임존성을 함락시키기로 하였다. 그것은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를 이용하여 그들을 공격하게 하는 것이다.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는 주류성이 함락되는 시기를 전후하여 당군에 항복하였다. 한 때 행동을 같이 하였던 흑치상지 등이 당군의 선봉이 되어 공격해 왔고 그 뒤로는 당나라 군사가 진격해 오자 임존성의 군사들은 크게 동요하였으며 성의 저항은 급격히 무너져버린 것 같다. 이러한 국면을 도저히 전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이로써 부흥 백제국은 마침내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
5. 고구려의 멸망
백제를 멸망시킨 후 신라와 당은 곧바로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서둘렀다. 당은 백제를 멸망시킨 이듬해 소정방, 계필하력 등으로 수륙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케 하였고, 신라는 이들에게 군사와 군량을 보급하였다. 이 때 당의 수군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포위하고 6~7개월동안 공격하였으나 연개소문의 강력한 반항에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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