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조선 향토색론의 대두
3. 향토문예
4. 조선 향토색 논의
1) 조선향토색의 전개
2) 조선 향토색 논란
5. 아카데미즘으로서의 조선 향토색- 조선미전을 중심으로
1) 조선미술전람회의 성향
2) 조선미전에 나타난 조선 향토색
6. 맺음말
2. 조선 향토색론의 대두
3. 향토문예
4. 조선 향토색 논의
1) 조선향토색의 전개
2) 조선 향토색 논란
5. 아카데미즘으로서의 조선 향토색- 조선미전을 중심으로
1) 조선미술전람회의 성향
2) 조선미전에 나타난 조선 향토색
6. 맺음말
본문내용
진실로 향토적 정서를 노래하고 그 율조를 찾는 데 있을 것이다. 윤희순. ‘제11회 조선미전의 제현상’. 매일신보. 1932.6.1~8
창립, 1930년 대구출신의 서동진, 최화수, 박명조, 이인성 등이 동인이 된 향토회(鄕土會) 대구지역의 그룹으로서 6회의 연레전(1930~35)을 개최했다. 서동진, 박명조, 최화수, 김성함, 배명학, 서병기 등이 회워이었다.
윤범모 저《한국근대미술 -시대정신과 정체성의 탐구》 p122 한길아트. 1998.5. 서울
창립, 1930년 구본웅, 이마동, 김응진 등 동인에 의한 백만회(白蠻會)의 창립, 1932년 재동경미술학우회인 백우회(白牛會)의 창립, 1934년 이종우, 이병규, 공진형, 구본웅, 길진섭, 홍득순, 임용연, 백남순, 신홍휴, 손병돈, 황술조, 이마동, 장발, 김용준 등이 동인이 된 목일회(牧日會)의 창립 등이 이 무렵의 그룹을 중심으로 한 화단 활동의 일면이다.
이 그룹 활동이 어떤 이념에 의해 추진되는 일종의 조형운동이라고 한다면,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에 걸쳐 잇따른 그룹의 창립과 그 전시 활동도 다양한 이념의 분파작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일본 화단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왜냐하면 일본의 서양화단이 그룹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광수 저《한국현대미술사 -1900년대 도입과 정착에서 1990년대 오늘의 상황까지》 p64. 열화당. 2000.6. 서울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같은 그룹 안에서도 미술 이념상 선후배간의 갈등이 노정되었다는 점이다.
즉, 향토적 정서에 입각한 순수미술을 지향하는 김용준과 식민지 현실을 감안한 프로페타리아 미술론을 지향하는 홍득순의 대립양상이 그것이다.
김용준은 향토적 정서를 중시했다. 이는 1930년대의 중요 논쟁이었던 조선향토색론과고 관련이 있는 발언이다. 다만 방법상 그는 민족주의 입장을 취했음직한데 오히려 민족주의를 배척했음이 특기할 만하다. 그는 서구 예술의 연구를 강조하면서 순수미술만을 지향했다. 김용준은 원래 프로레타리아 미술론을 주장했던 경력의 소유자였다.
입장을 달리한 홍득순은 동미전평은 비감했다. 우선 홍득순은 동미전이 ‘어떤 계급의 향락주의에서 탄생되지 않은’ 점을 주지시켰다. 그러면서 상아탑 속에 자신을 감추고 예술지상주의를 꿈꾸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통박했다. 윤범모 저《한국근대미술 -시대정신과 정체성의 탐구》 pp118~119. 한길아트. 1998.5. 서울
‘조선 향토색’ 논의에서도 이 논의에 앞장섰던 동미회(東美會)는 동경미술대학교 동문들의 모임이었으며, 녹향회(綠鄕會)의 김주경 심영섭 오지호 모두 일본 유학생들로, 이들이 1930년을 전후하여 동경에서 귀국하자마자 곧, ‘조선 향토색’에 대하여 주창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은 ‘조선 향토색’과 일본미술계와의 관련성에 주목하게 한다. 박계리 <일제시대 ‘조선 향토색’>《한국근대미술사학 제4집》 pp173. 청년사. 1996.12. 서울
향토색의 유행은 1930년대 일본은 맹목적인 서양추종과 답습에서 벗어나 일본적 정감과 풍토를 표현하자는 의식이 만연해지며 이러한 경향은 당시의 국수주의적인 사회분위기와도 관련지어 볼 수 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제국주의적 침략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일본은 이에 따라 1930년대 미술도 군국주의적 색채가 점차 강화되어 가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일본에서의 흐름이 당시 동경에 유학 가 있던 학생들에게 자극을 주어 이들이 귀국 후 ‘조선 향토색’을 주창하게 하는 데 주요한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당시 일제 식민지 하에 있었던 조국, 한반도에는 농업과 농촌을 찬미하여야 한다는 중농주의가 일제에 의해 식민지정책으로 파급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 농촌진흥운동은 타락적인 도시 혹은 상공업과 대비하여 순박하고 강건한 농촌의 생활이 극단적으로 찬미되었다. 이는 농촌의 모순 된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무디게 하기 위해서 농본주의가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변에는 동양사상을 자신들 가치체계의 중심으로 세우고 여기에 서양의 물질문명을 흡수할 수 있었던 일본인 자신들이 이제 서구를 제패하러 나간다는 정책적인 이념이 깔려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문학은 기존의 농민문학이 체제문학으로 변질되어갔다. 이러한 시기에 조선 향토색은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인 조선미전을 통하여 아카데미즘 화 되어갔던 것이다. 박계리 <일제시대 ‘조선 향토색’>《한국근대미술사학 제4집》 pp175~176. 청년사. 1996.12. 서울
2) 조선 향토색 논란
1930년대 후반으로 치달으면서 조선미전을 통해 급격히 대두한 향토색이 내용 면에서 건강한 향토적 정서를 반영하기보다 퇴폐적 색채를 띠어 감으로써 부정적으로 비판되는 국면이 되었다.
당시 조선미전의 심사원들이 요구하는 조선적인 것이 단순히 이국적 취향을 자극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이에 부응하는 조선적 향토색이 결과적으로 지배자의 연민의 감정을 자극하는 내용물로 전략한 것이다.
참다운 조선의 정서가 반영되지 못한 한갓 외피적인 것에 머물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윤희순은 “ 그 테마를 어떻게 보았느냐의 정조가 중요한 것이고 어떻게 보았느냐보다도 어떻게 표현하였느냐가 긴중한 문제이고 어떻게 발표되었느냐 보다도 그 작품이 인생, 사회 내지 문화에 즉 조선에 어떠한 가치를 던져 주느냐가 결정적 계기임을 의식하지 못한 까닭에 클래식급 자연주의를 용인한다 하더라도 조선의 독특한 하늘, 짙푸른 깨끗한 하늘의 정경 하나 그려 놓은 작품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윤희순 <제11회 조선미전의 제현상> 매일신보. 1932.6.1~8
그는 이국 취향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수준이어서는 안 되고 참다운 조선 정서의 구현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김용준도 윤희순과 같이 조선 향토색이 단순한 조선 재료- 조선정조- 로 떨어지는 것을 경계하면서 참다운 조선 향토색이란 우리 문화를 보다 깊이 천착하고 체험하는 데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결정체가 아니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뜰앞에 일수화를 조용히 심는 듯한 한적한 작품들이 우리의 귀중한 예술일 것이다. 이러한 한아한 맛은 가장 정신적인 요소이기
창립, 1930년 대구출신의 서동진, 최화수, 박명조, 이인성 등이 동인이 된 향토회(鄕土會) 대구지역의 그룹으로서 6회의 연레전(1930~35)을 개최했다. 서동진, 박명조, 최화수, 김성함, 배명학, 서병기 등이 회워이었다.
윤범모 저《한국근대미술 -시대정신과 정체성의 탐구》 p122 한길아트. 1998.5. 서울
창립, 1930년 구본웅, 이마동, 김응진 등 동인에 의한 백만회(白蠻會)의 창립, 1932년 재동경미술학우회인 백우회(白牛會)의 창립, 1934년 이종우, 이병규, 공진형, 구본웅, 길진섭, 홍득순, 임용연, 백남순, 신홍휴, 손병돈, 황술조, 이마동, 장발, 김용준 등이 동인이 된 목일회(牧日會)의 창립 등이 이 무렵의 그룹을 중심으로 한 화단 활동의 일면이다.
이 그룹 활동이 어떤 이념에 의해 추진되는 일종의 조형운동이라고 한다면,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에 걸쳐 잇따른 그룹의 창립과 그 전시 활동도 다양한 이념의 분파작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일본 화단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왜냐하면 일본의 서양화단이 그룹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광수 저《한국현대미술사 -1900년대 도입과 정착에서 1990년대 오늘의 상황까지》 p64. 열화당. 2000.6. 서울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같은 그룹 안에서도 미술 이념상 선후배간의 갈등이 노정되었다는 점이다.
즉, 향토적 정서에 입각한 순수미술을 지향하는 김용준과 식민지 현실을 감안한 프로페타리아 미술론을 지향하는 홍득순의 대립양상이 그것이다.
김용준은 향토적 정서를 중시했다. 이는 1930년대의 중요 논쟁이었던 조선향토색론과고 관련이 있는 발언이다. 다만 방법상 그는 민족주의 입장을 취했음직한데 오히려 민족주의를 배척했음이 특기할 만하다. 그는 서구 예술의 연구를 강조하면서 순수미술만을 지향했다. 김용준은 원래 프로레타리아 미술론을 주장했던 경력의 소유자였다.
입장을 달리한 홍득순은 동미전평은 비감했다. 우선 홍득순은 동미전이 ‘어떤 계급의 향락주의에서 탄생되지 않은’ 점을 주지시켰다. 그러면서 상아탑 속에 자신을 감추고 예술지상주의를 꿈꾸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통박했다. 윤범모 저《한국근대미술 -시대정신과 정체성의 탐구》 pp118~119. 한길아트. 1998.5. 서울
‘조선 향토색’ 논의에서도 이 논의에 앞장섰던 동미회(東美會)는 동경미술대학교 동문들의 모임이었으며, 녹향회(綠鄕會)의 김주경 심영섭 오지호 모두 일본 유학생들로, 이들이 1930년을 전후하여 동경에서 귀국하자마자 곧, ‘조선 향토색’에 대하여 주창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은 ‘조선 향토색’과 일본미술계와의 관련성에 주목하게 한다. 박계리 <일제시대 ‘조선 향토색’>《한국근대미술사학 제4집》 pp173. 청년사. 1996.12. 서울
향토색의 유행은 1930년대 일본은 맹목적인 서양추종과 답습에서 벗어나 일본적 정감과 풍토를 표현하자는 의식이 만연해지며 이러한 경향은 당시의 국수주의적인 사회분위기와도 관련지어 볼 수 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제국주의적 침략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일본은 이에 따라 1930년대 미술도 군국주의적 색채가 점차 강화되어 가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일본에서의 흐름이 당시 동경에 유학 가 있던 학생들에게 자극을 주어 이들이 귀국 후 ‘조선 향토색’을 주창하게 하는 데 주요한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당시 일제 식민지 하에 있었던 조국, 한반도에는 농업과 농촌을 찬미하여야 한다는 중농주의가 일제에 의해 식민지정책으로 파급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 농촌진흥운동은 타락적인 도시 혹은 상공업과 대비하여 순박하고 강건한 농촌의 생활이 극단적으로 찬미되었다. 이는 농촌의 모순 된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무디게 하기 위해서 농본주의가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변에는 동양사상을 자신들 가치체계의 중심으로 세우고 여기에 서양의 물질문명을 흡수할 수 있었던 일본인 자신들이 이제 서구를 제패하러 나간다는 정책적인 이념이 깔려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문학은 기존의 농민문학이 체제문학으로 변질되어갔다. 이러한 시기에 조선 향토색은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인 조선미전을 통하여 아카데미즘 화 되어갔던 것이다. 박계리 <일제시대 ‘조선 향토색’>《한국근대미술사학 제4집》 pp175~176. 청년사. 1996.12. 서울
2) 조선 향토색 논란
1930년대 후반으로 치달으면서 조선미전을 통해 급격히 대두한 향토색이 내용 면에서 건강한 향토적 정서를 반영하기보다 퇴폐적 색채를 띠어 감으로써 부정적으로 비판되는 국면이 되었다.
당시 조선미전의 심사원들이 요구하는 조선적인 것이 단순히 이국적 취향을 자극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이에 부응하는 조선적 향토색이 결과적으로 지배자의 연민의 감정을 자극하는 내용물로 전략한 것이다.
참다운 조선의 정서가 반영되지 못한 한갓 외피적인 것에 머물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윤희순은 “ 그 테마를 어떻게 보았느냐의 정조가 중요한 것이고 어떻게 보았느냐보다도 어떻게 표현하였느냐가 긴중한 문제이고 어떻게 발표되었느냐 보다도 그 작품이 인생, 사회 내지 문화에 즉 조선에 어떠한 가치를 던져 주느냐가 결정적 계기임을 의식하지 못한 까닭에 클래식급 자연주의를 용인한다 하더라도 조선의 독특한 하늘, 짙푸른 깨끗한 하늘의 정경 하나 그려 놓은 작품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윤희순 <제11회 조선미전의 제현상> 매일신보. 1932.6.1~8
그는 이국 취향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수준이어서는 안 되고 참다운 조선 정서의 구현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김용준도 윤희순과 같이 조선 향토색이 단순한 조선 재료- 조선정조- 로 떨어지는 것을 경계하면서 참다운 조선 향토색이란 우리 문화를 보다 깊이 천착하고 체험하는 데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결정체가 아니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뜰앞에 일수화를 조용히 심는 듯한 한적한 작품들이 우리의 귀중한 예술일 것이다. 이러한 한아한 맛은 가장 정신적인 요소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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