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화에 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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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 사화에 관해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조선왕실 연대표
2. 조선시대의 사화 - 요약
3. 조선의 4대 사화

Ⅲ. 결 론

본문내용

이원, 이주, 김굉필,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이계명, 강혼 등은 모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이루어 국정을 비방하고「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목으로 곤장을 때려 귀양을 보내 관청의 봉수대를 짓게 하였다.
한편,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순, 김전 등은 수사관(修史官, 실록자료인사초를 관장하는 관리)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신진 사림이 죽거나 이극돈까지 파면되었지만, 유자광만은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조정의 대세를 장악했다. 이에 따라 정국은 노사신 등의 훈척 계역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초의 원인이 되어 무오년에 사림들이 대대적인 화를 입은 사건이라고 해서 이를 무오사화라고 한다.
3)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연산군10년)에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성종의 비)의 복위문제로 연산군이 일으킨 사건이다.
무오사화로 언론 기관의 기능이 완전히 상실된 상황에서 연산군의 국정 운영이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이제 사림이 완전히 제거된 마당이라 그에게 학문을 권하는 이도 없었고, 간언을 하는 이도 없었다. 더군다나 대신들은 한결같이 연산의 비위에 맞는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조정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연산군은 향락과 패륜 행위를 일삼았다. 매일같이 궁궐에서는 연회가 벌어졌으며, 전국 각지에서 뽑아올린 수백명의 기생들이 동원되었다. 게다가 자신의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겁탈하는 등 종친간의 상간을 범하기도 했고, 여염집 아낙을 궐내로 불러들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이 심해지자 점차 국가 재정이 거덜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그의 행동을 비판하지 못했다. 오히려 연산군의 폭정에 권신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국고가 빈 것을 알고 이를 메우기 위해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요구하고, 노비까지 몰수하려 하자 대신들의 태도는 급변했다. 왕이 향락과 사치에 마음이 빼앗겨 급기야 자신들의 경제 기반까지 몰수하는 것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막상 왕의 요구가 자신들의 이해 관계와 맞물리자 왕의 처사가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그동안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왕의 지나친 향략을 자제해줄 것을 간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하들 모두가 연산군에게 반발했던 것은 아니었다. 무오사화 이후 조정은 다시 외척 중심의 궁중파와, 의정부 및 육조 중심의 부중파로 갈라져 있었다. 따라서 공신전을 소유하고 있던 부중파 관료들은 연산군의 공신전 몰수 의지에 반발하고 있었지만, 궁중파는 일단 왕의 의도에 부합하자는 논리를 펴고 있었다.
이런 대립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으려는 인물이 바로 임사홍이었다. 그는 일찍이 두 아들을 예종과 성종의 부마로 만든 척신 세력 중에 하나였다. 임사홍은 성조시대에 사림파 신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간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사림을 싫어한 그는 연산군과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해 훈구 세력과 잔여 사림 세력을 일시에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임사홍은 우선 연산군의 비 신씨의 오빠 신수근과 손을 잡고 음모를 꾸미던 끝에 성종의 두 번째 부인이자 연산군의 친모였던 윤씨의 페비사건을 들추어낸다. 페비 윤씨 사건은 성종이 차후에는 거론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긴 적이 있어 그때까지 아무도 그 사건을 입에 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임사홍은 이 사건의 내막을 연산군이 알게 될 경우 윤씨의 폐출을 주도했던 훈구세력과 사림 세력에게 동시에 화를 입힐 수 있다는 계산을 한다. 임사홍의 밀고로 윤씨의 폐출경위을 알게된 연산군은 엄청난 살인극을 자행한다.
연산군은 우선 윤씨 폐출에 간여한 성종의 두 후궁 엄귀인과 정귀인을 궁중뜰에서 직접 참하고 정씨의 소출인 안양군, 봉안군을 귀양보내 사사-죽일 죄인을 대우하여 사약을 내려 자결하게 함.
사사시켰다. 그리고 윤씨 폐출을 주도한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부상을 입혀 절명케 했으며,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고자 왕비로 추숭-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제외의 칭호를 올림.
추숭하고 성종묘에 배사하려 하였다.
이때 연산군의 행동을 감히 막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응교 권달수와 이행 두 사람만이 성종묘에 배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론을 펴다가 권달수는 죽임을 당하고 이행은 귀양길에 올랐다. 하지만 연산군의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막상 신하들이 자신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을 한 그는 윤시 폐위에 가담하거나 방관한 사람을 모두 찾아내어 죄를 묻기 시작했다.
이 결과 윤씨 페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윤필상, 이극균, 성준, 이세좌, 권주, 김굉필, 이주 등 10여명이 사형당하였고, 이미 죽은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심회, 이파, 정여창, 남효온 등을 부관참시에 처해졌다. 이밖에도 홍귀달, 주계군, 심원, 이유녕, 변형량, 이수공, 곽종번, 박한주, 강백진, 최부, 성중엄, 이원, 신징, 심순문, 강형, 김천령, 정인인, 조지서, 정성근, 성경온, 박은, 조의, 강겸, 홍식, 홍상, 김처선 등이 참혹한 화를 입었으며, 이들의 가족 자녀에 이르기까지 연좌시켜 죄를 적용하였다.
이처럼 1504년 3월부터 10월까지 7개월에 걸쳐 벌어진 이 갑자사화는 희생자의 규모뿐만 아니라 그 형벌의 잔인함이 무오사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호사화는 신진 사림과 훈구 세력간의 정치 투쟁이었지만, 갑자사화는 왕을 중심으로 한 궁중 세력과 훈구, 사림으로 이루어진 부중세력의 힘의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4)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중종14년)에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 등 훈구파의 재상들이 당시 새로운 혁신을 감행한 젊은 선비들에게 화를 입힌 사건이다.
당시 현량과를 통해 도학정치 구현의 터전을 마련한 조광조 일파는 마침내 본격적인 훈신 제거 작업에 돌입하게 된다. 이 때문에 훈구세력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고, 마침내 1519년 이른바 반정 공신 위훈-위대한 훈공.
위훈 삭제 사건을 계기로 그 반발이 폭발하고 말았다.
조광조는 반정공신에 올라있는 신하들 가운데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들의 공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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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7.15
  • 저작시기20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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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07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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