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고려, 조선전기의 과학기술 - 한국과학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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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삼국, 고려, 조선전기의 과학기술 - 한국과학기술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삼국, 고려, 조선전기의 과학기술
(1) 천문학의 발달
(2)천문관측 기구의 발달
(3)인쇄술의 발달

2.근대 과학(조선후기~

3.현대 과학 기술사
(1)해방전후 계속되는 시련으로 불안한 태동기
(2)이념 대립으로 잃은 우수 과학자
(3) 50년대말과 60년대
(4)70년대 과학 기술사

※ 참고문헌

본문내용

법의 종합적인 정비를 명한 이후 20여 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조선은 건국 후 역법을 고려에서 사용하던 대통력을 그대로 이어 받아서 써왔다. 대통력은 원래 중국 명나라의 역법으로, 중국의 원나라 때 천문학자 곽수경이 1281년에 만든 우수한 역법 수시력을 이름만 바꾼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대통력은 이미 수시력을 만든지 200여 년이 지났기 때문에 오차도 커졌을 뿐만 아니라, 천문관측과 계산의 기준이 중국의 수도 북경이었다 따라서 독립된 국가를 세운 조선으로서는 독자적인 역법의 정비가 절실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20년 간 독자적인 역법체계를 이루려는 노력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먼저 역법의 연구와 그 계산에 필요한 수학의 연구를 들 수 있다. 그 결과 얻은 성과가 1442년(세종 24년)에 편찬이 완성된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이라는 역법이었다. 철정산내편은 당시로서는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우수했던 수시력에 바탕해 보완한 것이며, 칠정산외편은 서양의 역사에서 당시까지 가장 우수하다고 이해되던 아랍의 역법인 회회력에 바탕해서 보완한 역법이었다. 따라서 동서양에서 가장 우수한 역법의 문제점들을 보완해 얻어낸 칠정산내외편은 15세기 중엽 당시로서는 가장 우수한 역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보다 가치 있는 의의는 우리의 서울 한양을 기준으로 하는 역법을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이 또한 15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아랍을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과학사상의 의미있는 성과였던 것이다. 어쨌든 칠정산내외편을 얻어냄으로써 중국의 변두리 국가에 불과한 조선은 정치외교적으로는 황제국인 중국과 비교해서 제후국에 불과했지만, 독자적인 역법을 얻어냄으로써 하늘의 명을 받아 인간세상을 다스린다는 제왕으로서의 권위를 자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왕권은 탄탄해졌고, 국가체제는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역법의 정비를 위해서 노력한 20년의 기간동안에는 역산 연구뿐 아니라 국가표준의 시보 체계를 정비하고, 천문관측 기구를 만들어 종합적인 천문 관측대를 설치하는 정책도 병행해서 추진되었다.
(2) 천문 관측 기구의 발달
고대의 천문기구 : 첨성대
과연 첨성대는 무엇을 하던 구조물이었을까? 왜 신라인들은 첨성대의 이름을 ‘별을 보는 건축물’이라는 뜻으로 지었을까? 이러한 의문에 답하기 위해선 현대인과는 다른 고대의 천문관을 이해해야 한다. 전통사회에서 천문학은 “제왕(帝王)의 학문”이었다. 제왕은 하늘의 명(命)을 받아 인간 사회를 다스리는 존재였고, 하늘은 천문현상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알리니, 하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은 제왕된 자의 마땅한 의무이자 제왕만이 할 수 있는 권리였다. 따라서 천문학은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고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고, 훌륭한 제왕은 하늘을 공경하는 마음을 만천하에 공표하면서, 천체의 움직임과 천변 현상들을 주의 깊게 관측하고 자세하게 기록했다. 이것이 전통 사회에서 천문학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노력을 기울였던 연유이다.
첨성대는 분명히 천문을 관측하는 기구였을 것이다. 그러나 별만을 관측하는 기능만을 지니지는 않았다. 고대의 천문대는 천문을 관측하는 것 외에도 하늘의 세계와 인간 사회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그것은 천문학과 수학의 원리를 구현한 상징적 건축물로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으로서, 그리고 하늘과 인간사회를 연결해주는 중개물로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첨성대에 대한 다른 여러 해석들]---------------------------
첨성대의 외형적 구조가 천문관측을 하기에 최적의 구조가 아니라는 인식은 첨성대가 천문대 이외에 어떠한 다른 기능을 하던 건축물이었을 것이라는 많은 의문을 낳았다. 현재 다음과 같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천문학의 상수가 반영된 상징물: 첨성대를 쌓은 단의 수가 둥근 부분만은 27단이고, 그 위와 아래를 고려하면 28,29,30단이 모두 가능하다. 27단은 선덕여왕이 신라 27대 왕인 것, 28단은 전통 별자리 28수(宿), 29와 30은 한달의 길이를 각각 의미한다. 전체 돌의 수가 365인 것은 일년의 날 수를, 가운데 창의 위 아래 단이 12단인 것은 1년의 달 수를 각각 의미할 수 있다.
주비산경설: 고대의 대표적 수학책인 주비산경에 나타난 수학적 비례를 재현한 건축이라는 의견이다.
규표설: 규표는 해 그림자로 시각을 재던 원시적인 해시계를 말한다. 즉 첨성대 자체가 해시계의 막대기(시계바늘)와 같은 역할을 했다는 의견이다.
제단설: 신라에서 매년 가을에 농업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인 영성단이었다는 의견이다.
수미산설: 불교에서 말하는 우주의 중심에 있었던 수미산이라는 산을 상징한다는 견해이다.
33천설: 수미산 자체가 아니라 수미산 꼭대기의 제석천이 지배하는 33천인 도리천을 우물의 모양으로 형상화한 구조물로서, 인간세계와 하늘의 세계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다는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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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천문 기구
가. 국가표준의 물시계였던 자격루
물시계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 이미 781년에 누각(漏刻)이라는 물시계를 만들어 시보를 했다는 기록이 있듯이 오래 전부터 국가표준의 시계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그리 정확하지는 않았던 듯하며, 그 관리도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에 세종은 장영실로 하여금 1434년(세종 16년)에 물시계의 제작을 명하였는데, 장영실은 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기계장치인 자동시보장치를 갖춘 자격루를 제작해 바쳤다. 이 자격루는 징과 종, 그리고 북을 이용해 시간을 소리로 알렸고, 아울러 매 시마다 12지신의 인형을 이용해 시간을 알렸다.
--[자격루]----------------------------------------------------
자격루는 현재 만원짜리 지폐에 유물 사진이 삽입되어 있는데, 덕수궁에 가면 실물을 볼 수 있다. 남아있는 유물은 물 보내는 물통 세 개와 물 받는 물통 2개, 그리고 잣대 두 개가 전부로, 자
  • 가격2,000
  • 페이지수20페이지
  • 등록일2005.11.07
  • 저작시기2005.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18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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