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개화사상의 수용과 별기군 참여
3. 왕후 시해 주도
4. 고영근의 우범선 처단
5. 우장춘의 발자취
6. 결론
(1) 친일파 후손의 땅찾기
(2) 우범선과 우장춘
☞ 참고 문헌
2. 개화사상의 수용과 별기군 참여
3. 왕후 시해 주도
4. 고영근의 우범선 처단
5. 우장춘의 발자취
6. 결론
(1) 친일파 후손의 땅찾기
(2) 우범선과 우장춘
☞ 참고 문헌
본문내용
그만큼 따져보면 그때의 상황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 나올 수 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나는 우범선은 확실한 친일파이며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하지만 그에겐 우리나라에서 소중한 업적을 남기 우장춘박사가 있었다. 그가 일본에서 겪었던 한국인이라는 설움과 고난은 있었겠지만 일본에서도 어느 정도 자신의 진가를 인정받으며 자신을 지극히 아껴 주셨던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자식들까지 일본에 버려두고 홀로 한번도 밟아 보지 못한 한국 땅에 자신의 뼈를 묻겠다고 한 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아버지가 저지른 일에 대한 반성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자신이 원하던 연구를 마음껏 펼칠 수 있고, 그만큼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지만 친일파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반대파를 만들기도 했으나, 그의 부단한 노력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업적을 인정했고, 한국의 육종학계에 큰 업적을 남긴 한 사람이 된 것이다. 만약 그가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는 단지 일본에서 활동한 한국인농학자 정도로만 취급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결단은 자신의 어머니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뿌리치고 어려운 시기의 한국사회에 발을 드려 놓았다는 것 자체부터 칭찬 받아 마땅할 일이었고, 그 후 한국에 대한 애정은 그의 아버지가 저지른 일을 속죄하는 뜻이 담겼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요즘에 붉어져 나오는 친일파 후손들의 땅찾기와는 너무도 상반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자신의 아버지가 저지른 일에 대한 깊은 반성과 자신의 애국심을 동시에 보여준 것으로 우범선의 죄를 모두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 아들에 대한 업적은 크게 인정해줘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을미사변의 주동자로 지목된 일본인들의 후손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직접 사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의 친일파 후손들에 대한 자신들의 권리 찾기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 자신들의 조상에 대한 반성 없이 이득만을 챙기려 한다면 자신들의 조상이 그랬듯 또 다른 국민에 대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일인 것이다.
※이 자료에서는 ‘명성황후’대신 고종을 ‘왕’이라고 하여‘왕후’라 칭하였다.
☞참고 문헌
최문형,“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 지식산업사, 2001
쓰노다 후사코, “우장춘박사 일대기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 교문사, 1992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99인-1”돌베개, 1993
www.naver.com
하지만 그에겐 우리나라에서 소중한 업적을 남기 우장춘박사가 있었다. 그가 일본에서 겪었던 한국인이라는 설움과 고난은 있었겠지만 일본에서도 어느 정도 자신의 진가를 인정받으며 자신을 지극히 아껴 주셨던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자식들까지 일본에 버려두고 홀로 한번도 밟아 보지 못한 한국 땅에 자신의 뼈를 묻겠다고 한 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아버지가 저지른 일에 대한 반성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자신이 원하던 연구를 마음껏 펼칠 수 있고, 그만큼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지만 친일파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반대파를 만들기도 했으나, 그의 부단한 노력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업적을 인정했고, 한국의 육종학계에 큰 업적을 남긴 한 사람이 된 것이다. 만약 그가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는 단지 일본에서 활동한 한국인농학자 정도로만 취급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결단은 자신의 어머니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뿌리치고 어려운 시기의 한국사회에 발을 드려 놓았다는 것 자체부터 칭찬 받아 마땅할 일이었고, 그 후 한국에 대한 애정은 그의 아버지가 저지른 일을 속죄하는 뜻이 담겼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요즘에 붉어져 나오는 친일파 후손들의 땅찾기와는 너무도 상반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자신의 아버지가 저지른 일에 대한 깊은 반성과 자신의 애국심을 동시에 보여준 것으로 우범선의 죄를 모두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 아들에 대한 업적은 크게 인정해줘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을미사변의 주동자로 지목된 일본인들의 후손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직접 사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의 친일파 후손들에 대한 자신들의 권리 찾기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 자신들의 조상에 대한 반성 없이 이득만을 챙기려 한다면 자신들의 조상이 그랬듯 또 다른 국민에 대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일인 것이다.
※이 자료에서는 ‘명성황후’대신 고종을 ‘왕’이라고 하여‘왕후’라 칭하였다.
☞참고 문헌
최문형,“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 지식산업사, 2001
쓰노다 후사코, “우장춘박사 일대기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 교문사, 1992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99인-1”돌베개,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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