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의 역사와 종류와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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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도자기 개념

2. 도자기의 유래 및 역사

3. 도자기 분류

4.-도자기의 특징과 만드는 법-

5. 세계의 도자기

본문내용

. 북제시대에 화베이 여러 지역에서는 백자도 생산되었는데 허난성〔河南省〕 범수묘(范粹墓)와 허난성 이운묘(李雲墓)에서는 백자녹채병(白磁緣彩甁)과 황유녹채육이호(黃釉綠彩六耳壺) 등이 발견되었으며, 당(唐)의 삼채도(三彩陶)의 초기적인 것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수(隋)·당(唐)>
수·당 시대에는 청자·백자·흑유자 등의 자기류와 함께, 이른바 당삼채(唐三彩)라고 불리는 연유도 등 송대(宋代) 이후에도 계속되는 각종 중국 도자기가 모두 나타나게된다. 당시의 도요지로는 웨저우요〔越州窯〕·웨양〔岳陽〕·싱저우〔刑州〕 등지가 유명하다. 도요지에서는 은과 눈〔雪〕에 비유될 만큼 완벽한 백자의 그릇과 항아리가 출토되어 당대(唐代)에 백자가 완성된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당삼채는 인물과 동물, 가옥과 각종 그릇이 모두 명기(明器)라고 일컬어지는 부장품(副葬品)이고, 남유(藍釉)나 녹유·갈유·백유(白釉)를 단독으로 또는 2가지 이상의 유약을 섞어 완성된 연유도로, 허난성 궁현〔鞏縣〕 도요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당삼채는 8세기 초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당나라 중기에는 자취를 감추었지만 당나라 말기·송대에 삼채로서 계승되었다.
<송(宋)·원(元)>
당대 말기와 오대(五代)에 웨저우요에서 <비색청자>라는 양질의 청자를 만들어 내어 오대십국(五代十國)의 하나인 오월(吳越)의 전씨왕실(錢氏王室)에 <공자(貢瓷)>로서 전씨의 보호 아래 관요적(官窯的) 성격을 띤 가마로 되었다. 또 이 때 웨저우요의 청자는 중요한 수출품으로서 한국·일본·동남아시아·서아시아 등지에 널리 수출되었다. 중국에서 도자기가 수출품으로 널리 이용된 것은 이 때부터이며, 저장성의 닝보에 시박사(市舶司)가 설치되었다. 북송(北宋) 후기에는 저장성 남부의 룽취안요〔龍泉窯〕가 청자생산의 중심지가 되어, 송·원·명대(明代)의 약 500년간 활발하게 생산하였다. 오대에는 장시성의 징더전요〔景德鎭窯〕에서 백자를 생산하기 시작하였고, 11·12세기경에는 청백자(靑白磁)로 불리는 푸른색을 띤 백자가 후텐요〔湖田窯〕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룽취안요의 청자와 함께 중요한 무역품이 되었다. 화난의 여러 지역에서도 이 때 여러 가지 도자기가 완성되어, 무역품으로 동아시아·서아시아·한국 등지에 수출되었다. 주요 품목으로서, 푸젠성에는 젠요〔建窯〕의 천목(天目), 안시요〔安溪窯〕의 청자, 취안저우요〔泉州窯〕의 황유철화(黃釉鐵畵) 등이 있다. 장시성에는 징더전요 이외에도 지저우요〔吉州窯〕의 천목·백유철화·녹유 등이 있다. 화베이의 여러 도요지에서도 송대에는 활발한 도자기 생산이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허베이성의 딩요〔定窯〕·츠저우요〔磁州窯〕, 산시성〔陝西省〕의 야오저우요〔耀州窯〕, 허난성의 쥔요〔鈞窯〕가 유명하다. 송대 화베이의 주요한 도요지에서의 도자기 생산은 당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본격적인 도자기 생산은 북송 이후부터였다. 송대에는 위에서 기술한 화베이·화난의 도요지 이외에도 루요〔汝窯〕·게요〔哥窯〕·둥요〔東窯〕 등의 관요청자요(官窯靑磁窯)가 존재한 것도 중요하다. 송대 관요에서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청자가 유럽·중국·미국 등지에 전세(傳世)되었으며, 도요지의 위치는 아직 밝혀지고 있지 않다. 원대(元代) 징더전요에서 백자에 유약을 입히기 전에 코발트(靑料)로 그림을 그리고 투명유를 입힌 청화(靑華)가 발명되어 징더전요는 중국 도자기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청화의 기원에 대해서는 ① 츠저우요·지저우요 등지의 철화채도(鐵畵彩陶)의 영향 ② 서아시아의 이슬람 도기의 영향 ③ 징더전요의 독자적인 발전 등 여러 가지 설(說)이 있다. 코발트를 정색재(呈色材)로 사용한 청화와 함께, 원대에는 구리를 정색재로 사용한 유이홍(釉裏紅)도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는데, 붉은색의 홍유(紅釉)로 그림을 그린 독특한 도자기이다. 중국 국내에서는 이러한 청화·유이홍은 일상적인 기명(器皿)과 함께 도교사원(道敎寺院)의 제사구로도 사용되었으며, 인도·이란·터키 등의 이슬람세계에 무역품으로 대량 수출되어, 이란 사파비왕조의 고지(故地)인 아르데발과 오스만투르크의 토프카프궁전에 원대 청화의 우수한 제품이 많이 전해져 오고 있다.
<명(明)·청(淸)>
명대의 도자기는 징더전요를 중심으로, 게다가 선덕제(宣德帝) 때 어기창(御器廠)이 설치되어, 징더전요는 정부가 관리하게 되고 제품의 생산량이 엄격히 규제되었다. 그 결과 청화·적화·색화(色畵) 등에서 흘륭한 자기를 완성하여, 중국 도자기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영락제(永樂帝)∼선덕제(1403∼35) 시기에는 뛰어난 청화도자기가 많은데, 원대의 힘찬 청화와는 다르게 잘 다듬어지고 세련된 작품이 많다. 명대 후기인 가정(嘉靖)·만력기(萬曆期;1522∼1619)에 징더전요의 생산이 절정에 이르러 어기창에 대한 생산주문이 격증, 어기창에서는 일부를 민요(民窯)에 위탁하는 <관탑민소제(官塔民燒制)>가 일반화되었다. 이 결과 어기창은 한 때, 문양이나 그림만을 그리는 금요(錦窯)가 된 적도 있어, 어기창의 쇠퇴를 초래하게 되었다. 반면 징더전에서는 민요가 활발하게 자기를 제작하게 되어, 고청화(古靑華)·상서(祥瑞)·오수적화(吳須赤畵)·남경적화(南京赤畵) 등의 다도(茶陶)를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청나라 초기 징더전요에서는 민요가 활발하게 도자기를 생산하여 동남아시아·유럽 여러 나라에까지도 자기를 수출하였으며, 유럽의 제후들의 궁전 장식과 일상용품으로서 널리 이용되었다. 제4대 강희제(康熙帝;1662∼1722) 때 어기창이 부활되었고, 징더전요에서는 모든 복잡한 기법을 구사한 정교한 도자기를 생산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청화, 색화를 덧붙여 유럽의 무선칠보(無線七寶) 기법을 응용한 법랑채(琺瑯彩)·양채(洋彩)·분채(粉彩) 등의 색화자기(色畵磁器)가 생산되었으며, 특히 분채는 청조(淸朝) 징더전요의 주류가 되어 (고월헌(古月軒)>이라는 매우 치밀하고 정교한 색화자기를 만들게 되었다. 옹정(擁正)·건륭(乾隆)시대(1723∼95)는 징더전요의 전성기로 어기창의 활동은 눈부셨다. 건륭 말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징더전요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 등도 발생하여 어기창의 활동은 점차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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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2.25
  • 저작시기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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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29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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