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들어가며
Ⅱ.-1본론
1. 홍대용(洪大容)
(1) 생애 (1731~1783)
(2) 사상
(3) 문학과 작품
2. 박지원(朴趾源)
(1) 생애 (1737~1805)
(2) 문학
(3) 사상
(4) 작품
Ⅱ.-2 후사가(後四家) 4인 (이덕무 ․ 유득공 ․ 박제가 ․ 이서구)
1. 이덕무(李德懋)
2. 유득공(柳得恭)
3. 朴齊家
4. 이서구(李書九)
Ⅲ. 결론
Ⅱ.-1본론
1. 홍대용(洪大容)
(1) 생애 (1731~1783)
(2) 사상
(3) 문학과 작품
2. 박지원(朴趾源)
(1) 생애 (1737~1805)
(2) 문학
(3) 사상
(4) 작품
Ⅱ.-2 후사가(後四家) 4인 (이덕무 ․ 유득공 ․ 박제가 ․ 이서구)
1. 이덕무(李德懋)
2. 유득공(柳得恭)
3. 朴齊家
4. 이서구(李書九)
Ⅲ. 결론
본문내용
되었고, 전후 4차에 걸쳐 연경을 다녀오는 행운을 얻었다. 1차 연행 후 내외편의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하여 내편에서는 실생활 개선을, 외편에서는 정치 사회제도의 전반적 모순을 지적하며 서정의 혁신적 개혁을 제고했는가 하면, 상공업의 발달만이 백성의 구제와 부국강병의 첩경임을 강조했다.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기는 고루한 관습을 버리자 하고, 상공업의 발달이 백성을 살리며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 가장 긴요한 방안임을 역설하는 것으로 특히 중요한 내용을 삼았다. 바로 그 점에서는 홍대용이나 박지원보다 한걸음 더 나아갔다고도 할 수 있다.
(2) 문학과 사상
후사가 네 사람 가운데 사회사상 각성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제도의 모순 중 특히 과거제도의 폐단을 강렬하게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문학에 대해서도 전고(典故)답습(踏襲) 용사(用事) 한시(漢詩) 작법의 하나로 전고(典故)나 사실을 인용한 것이다. 경서(經書)나 사서(史書) 또는 제가(諸家)의 시문이 가지는 특징적인 관념이나 사적(事迹)을 2, 3개의 어휘에 집약시켜서 시의(詩意)를 보조, 배가시키는 수사법의 일종이다. 중국에서는 송대(宋代)에 크게 성행하였고 송대시학(宋代詩學)의 영향을 받았던 고려와 조선시대에 시작법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는 물론, 법고(法古)까지를 부정하며 “자기 소리가 아닌 것은 모두 참된 시가 아니니” 그런 “거짓된 저작은 붓을 도끼삼아 찍어버리리라”고 사가 중 그 누구보다도 강한 의식을 표출했다. 문학을 하되 사회의식과 밀착시켜 세상에 이롭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문학이나 예술 그 자체의 가치를 부인하려고 들지는 않았으며, 아름다움이 맛이라는 관점에서 예술과 실용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고자 하고, 문인으로서의 재능과 실학자로서의 각성을 아울러 구현하려고 했다. 사상적인 비판을 직접 시로 나타내서, 좁은 나라의 고루한 기풍을 다각도로 공격하기도 했다. 헛된 명분을 세우느라고 동서로 나누어져 사단칠정(四端七情)이나 논하고, 호락(湖洛) 양론으로 갈라져서 인물성을 따지니 현란하기만 하다고 개탄하는 시도 지었으며, 사회의 병폐를 그대로 두고 경제를 발전시키지 않은 폐단을 시로 다루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청나라에 갔을 때에는 그곳의 문명을 좀 지나치다 할 정도로 예찬했다. 넓은 천지에서 기술이 혁신되고 물자가 풍성하게 생산되는 것을 보고서 자기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구속으로부터의 해방까지 아울러 느꼈던 탓을 잘 나타낸다. 고국에 돌아와서는 사회개혁을 위한 주장을 펴고, 당장 시행해야 할 방안을 계속 내놓았지만, 어느 것 하나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지식과 문학의 전문 기술자 정도로 취급되며 주어진 범위 안에서 쓰임새가 인정될 따름이었다. 정조가 서얼들을 등용해서 규장각 검서관 노릇을 하게 한 의도는 실학을 전개하려는 데 있지 않았다. 다소 융통성을 보이기는 했지만 중세 지배체제를 재확립하자는 것이 공식적으로 채택된 기본 방침이었으니 말단의 직위에서 분에 넘치는 언동을 할 수 없었다.
4. 이서구(李書九)
(1) 생애(1754~1825)
이서구의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齋) 강산(薑山)이다. 이서구는 다른 세 사람과 처지가 달랐다. 당당한 가문에서 영의정의 아들로 태어나 20세에 문과에 급제했으니 누구나 부러워할 일이고, 한때 천주교를 옹호한다는 죄목으로 귀양살이를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순조롭게 진출해서, 이조판서형조판서호조판서를 역임하고 정승의 지위에 올랐다. 정조 때에서 순조 때로 넘어가면서 정권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어도 타격을 입지 않고 도리어 승진을 했다. 이런 인물이 어떻게 박지원을 따르고 후사가의 다른 세 사람과 어울렸던가는 의문이 아닐 수 없기에, 사적인 취향과 공적인 위치를 갈라서 볼 필요가 있다.
(2) 문학과 사상
박지원이 이서구의 문집 서문으로 써준 <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에 의하면, 이서구는 16세 때 박지원을 만나서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문장 수련을 위한 스승을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문장만이 아닌 사람을 알고 깊은 공감을 나누게 되었다. 박지원은 그 글에서 이서구의 시문이 옛사람을 본뜨지 않은 점을 기리고, 그 때문에 비난받으면 미처 익히지 못한 탓이라고 둘러대라고 했다. 이서구는 시정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라일을 맡은 기회에 박지원 학파로서의 포부를 펴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러자니 이서구의 문학은 투철한 의식을 갖기 어려웠다.
신성(新聲), 신체(新體), 신조(新調), 별재시풍(別裁詩風)으로 평가되는 검서체(檢書體)의 활용, 시의 예술적 기교와 수사의 표현적 측면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 등은 백탑시파, 또는 ‘사가(四家)’ 등으로 일컬어지는 이들 집단이 공유하는 특징이다. 저마다 자신만의 인격, 성향, 취미가 있듯이 이들 각각의 문학은 저마다 독특한 측면이 있다. 이덕무가 내성적인 성격과 박학을 바탕으로 시의 진정(眞情)을 강조하였고 유득공이 애국애족을 바탕으로 민족의 역사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지며, 초정 또한 진보적인 사상가이자 시서화 삼절로 지칭되는 문예가로서, 뛰어난 작가의식을 바탕으로 개성적인 시세계를 추구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이용휴(李用休)‘의 참신한 시품에 영향을 받고 그 개성을 발휘하여 18세기 후기에 가장 뚜렷하고 독자적인 시풍을 수립하였다면 그 가운데 초정의 공헌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정일남(2004),『초정 박제가 문학 연구』참조
Ⅲ. 결론
주자주의 전통 사회 속에서 일어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실학의 학풍은 한마디로 중세의 보편주의에서 근대지향적 학풍이요, 시대적 화이론에 자주적 민족주의, 이른바 권위적 성리학의 허상을 청산하자는 자유성(實正), 과학성(實證), 현실성(實用), 그리고 민본정신을 바탕으로 인간과 사회를 향상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병주 외(1998)『한문학사』참조
[참고문헌]
김지용(2003),『박지원의 문학과 사상』, 한양대학교출판원
이병주 외(1998)『한문학사』, 새문사
정일남(2004),『초정 박제가 문학 연구』, 지식산업사
조동일(2003),『한국문학통사 3』, 지식산업사
황패강 외(2000),『한국문학작가론 3』, 집문당
(2) 문학과 사상
후사가 네 사람 가운데 사회사상 각성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제도의 모순 중 특히 과거제도의 폐단을 강렬하게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문학에 대해서도 전고(典故)답습(踏襲) 용사(用事) 한시(漢詩) 작법의 하나로 전고(典故)나 사실을 인용한 것이다. 경서(經書)나 사서(史書) 또는 제가(諸家)의 시문이 가지는 특징적인 관념이나 사적(事迹)을 2, 3개의 어휘에 집약시켜서 시의(詩意)를 보조, 배가시키는 수사법의 일종이다. 중국에서는 송대(宋代)에 크게 성행하였고 송대시학(宋代詩學)의 영향을 받았던 고려와 조선시대에 시작법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는 물론, 법고(法古)까지를 부정하며 “자기 소리가 아닌 것은 모두 참된 시가 아니니” 그런 “거짓된 저작은 붓을 도끼삼아 찍어버리리라”고 사가 중 그 누구보다도 강한 의식을 표출했다. 문학을 하되 사회의식과 밀착시켜 세상에 이롭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문학이나 예술 그 자체의 가치를 부인하려고 들지는 않았으며, 아름다움이 맛이라는 관점에서 예술과 실용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고자 하고, 문인으로서의 재능과 실학자로서의 각성을 아울러 구현하려고 했다. 사상적인 비판을 직접 시로 나타내서, 좁은 나라의 고루한 기풍을 다각도로 공격하기도 했다. 헛된 명분을 세우느라고 동서로 나누어져 사단칠정(四端七情)이나 논하고, 호락(湖洛) 양론으로 갈라져서 인물성을 따지니 현란하기만 하다고 개탄하는 시도 지었으며, 사회의 병폐를 그대로 두고 경제를 발전시키지 않은 폐단을 시로 다루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청나라에 갔을 때에는 그곳의 문명을 좀 지나치다 할 정도로 예찬했다. 넓은 천지에서 기술이 혁신되고 물자가 풍성하게 생산되는 것을 보고서 자기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구속으로부터의 해방까지 아울러 느꼈던 탓을 잘 나타낸다. 고국에 돌아와서는 사회개혁을 위한 주장을 펴고, 당장 시행해야 할 방안을 계속 내놓았지만, 어느 것 하나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지식과 문학의 전문 기술자 정도로 취급되며 주어진 범위 안에서 쓰임새가 인정될 따름이었다. 정조가 서얼들을 등용해서 규장각 검서관 노릇을 하게 한 의도는 실학을 전개하려는 데 있지 않았다. 다소 융통성을 보이기는 했지만 중세 지배체제를 재확립하자는 것이 공식적으로 채택된 기본 방침이었으니 말단의 직위에서 분에 넘치는 언동을 할 수 없었다.
4. 이서구(李書九)
(1) 생애(1754~1825)
이서구의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齋) 강산(薑山)이다. 이서구는 다른 세 사람과 처지가 달랐다. 당당한 가문에서 영의정의 아들로 태어나 20세에 문과에 급제했으니 누구나 부러워할 일이고, 한때 천주교를 옹호한다는 죄목으로 귀양살이를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순조롭게 진출해서, 이조판서형조판서호조판서를 역임하고 정승의 지위에 올랐다. 정조 때에서 순조 때로 넘어가면서 정권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어도 타격을 입지 않고 도리어 승진을 했다. 이런 인물이 어떻게 박지원을 따르고 후사가의 다른 세 사람과 어울렸던가는 의문이 아닐 수 없기에, 사적인 취향과 공적인 위치를 갈라서 볼 필요가 있다.
(2) 문학과 사상
박지원이 이서구의 문집 서문으로 써준 <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에 의하면, 이서구는 16세 때 박지원을 만나서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문장 수련을 위한 스승을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문장만이 아닌 사람을 알고 깊은 공감을 나누게 되었다. 박지원은 그 글에서 이서구의 시문이 옛사람을 본뜨지 않은 점을 기리고, 그 때문에 비난받으면 미처 익히지 못한 탓이라고 둘러대라고 했다. 이서구는 시정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라일을 맡은 기회에 박지원 학파로서의 포부를 펴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러자니 이서구의 문학은 투철한 의식을 갖기 어려웠다.
신성(新聲), 신체(新體), 신조(新調), 별재시풍(別裁詩風)으로 평가되는 검서체(檢書體)의 활용, 시의 예술적 기교와 수사의 표현적 측면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 등은 백탑시파, 또는 ‘사가(四家)’ 등으로 일컬어지는 이들 집단이 공유하는 특징이다. 저마다 자신만의 인격, 성향, 취미가 있듯이 이들 각각의 문학은 저마다 독특한 측면이 있다. 이덕무가 내성적인 성격과 박학을 바탕으로 시의 진정(眞情)을 강조하였고 유득공이 애국애족을 바탕으로 민족의 역사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지며, 초정 또한 진보적인 사상가이자 시서화 삼절로 지칭되는 문예가로서, 뛰어난 작가의식을 바탕으로 개성적인 시세계를 추구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이용휴(李用休)‘의 참신한 시품에 영향을 받고 그 개성을 발휘하여 18세기 후기에 가장 뚜렷하고 독자적인 시풍을 수립하였다면 그 가운데 초정의 공헌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정일남(2004),『초정 박제가 문학 연구』참조
Ⅲ. 결론
주자주의 전통 사회 속에서 일어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실학의 학풍은 한마디로 중세의 보편주의에서 근대지향적 학풍이요, 시대적 화이론에 자주적 민족주의, 이른바 권위적 성리학의 허상을 청산하자는 자유성(實正), 과학성(實證), 현실성(實用), 그리고 민본정신을 바탕으로 인간과 사회를 향상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병주 외(1998)『한문학사』참조
[참고문헌]
김지용(2003),『박지원의 문학과 사상』, 한양대학교출판원
이병주 외(1998)『한문학사』, 새문사
정일남(2004),『초정 박제가 문학 연구』, 지식산업사
조동일(2003),『한국문학통사 3』, 지식산업사
황패강 외(2000),『한국문학작가론 3』, 집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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