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삼한’ 인식의 이해
(2) 삼한의 위치
(3) ‘한’이란
(4) 삼한의 정치구조 및 사회생활.
1) 삼한의 성립과정
2) 삼한의 정치구조
3) 삼한의 경제와 사회
4) 계층 문화
5) 생활문화와 묘제(墓制)
(5) 삼한의 문화성격
(6) 신앙의례
(7) 삼한에 대한 논란
1) 삼한 사회의 성격
2) '진국'· '중국'의 문제
3) 북한과의 비교
Ⅲ. 결론
Ⅱ. 본론
(1) ‘삼한’ 인식의 이해
(2) 삼한의 위치
(3) ‘한’이란
(4) 삼한의 정치구조 및 사회생활.
1) 삼한의 성립과정
2) 삼한의 정치구조
3) 삼한의 경제와 사회
4) 계층 문화
5) 생활문화와 묘제(墓制)
(5) 삼한의 문화성격
(6) 신앙의례
(7) 삼한에 대한 논란
1) 삼한 사회의 성격
2) '진국'· '중국'의 문제
3) 북한과의 비교
Ⅲ. 결론
본문내용
민들의 종교의식 장소인 소도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의미는 지방거수 외 종교 통치자를 두어 천군이 거수와 대등 혹은 뛰어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게 하여 지방의 권력을 중앙의 것보다 약화시키기 위한 조처로 생각되어 진다. 이러한 통치조직으로 보아 한에는 엄격한 법이 있어서 이것이 통치와 사회질서 유지의 수단으로 활용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지방 거수국의 실직적 지배는 거수와 호민층으로 구성이 돼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일부 학자들은 한의 사회수준을 고조선의 사회보다 현저히 낮게 잡아 한은 국가단계의 사회가 아니라 그 이전의 사회 단계일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여러 개의 거수국들을 하나하나의 독립된 청치 집단으로 보고 작은 읍락사회나 군장사회로 본 것이다. 그러나 한이 발전된 사회란 것을 증명해 주는 자료가 많이 보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여겨진다. 예컨대 한에는 준엄한 법이 있었다고 말한 것이라던지, 진한 지역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중국, 왜 등 여러 지역으로 수출했다고 하는 『後漢書』와 『三國志』의 기록 등이 존재한다. 법의 존재는 그 사회가 국가단계였음을 말해주는 것이고, 법이 준엄했다는 사실은 그 사회가 국가단계로 들어선 지 오래 됐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또한 한은 철을 생산해서 수출했다는 것으로 보아 고조선보다 발달된 철기 사회인 것을 시사하는 바이고, 또 종교적으로 보아 각 거수국마다 하늘님(하느님)을 믿는 천군이란 종교 지도자가 있었다는 성격 또한 고조선의 사회성격을 계승하였다고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한의 삼한들은 후 삼국시대의 전신으로도 보여 진다. 특히 진한은 신라의 진신이라 거의 받아들여질 만큼 많은 공통점 및 유사점과 위치성을 보여 주고 있다. 또 다른 설로 마한에 진왕이 모든 곳의 통치자는 아니며 고조선이 위만조선으로 넘어가면서 가장 북방에 위치한 마한 지역으로 기준이 와 마한의 왕에게 허가를 받고 땅을 윤허 받았다고도 전해진다. 진왕에 대해서 한 전체의 통치자라는 설 또한 정설이 아닌 것을 유념하고 정확한 사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5) 삼한의 문화성격
우리는 삼한사회를 문화단계로 규정할 때 줄곧 금석병용기(金石竝用期) 사회라고 불러왔다. 김해패총을 발굴한 일본학자들이 이 유적을 금석병용기의 유적이라고 규정지은 데서 그 후에 널리 쓰여지게 되었는데 이는 김해패총에서 근소한 석기의 사용과 금속기의 사용이 보이는 시기(Calcholithic Period)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후 금석병용이란 용어는 삼한 사회를 규정하거나 또한 원시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어휘로 쓰여지게 되었다. 이병도 박사는 삼한시대에는 아직도 금석병용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규정했고, 임창순 교수도 남방은 금석병용기라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Chalco는 동(銅) 또는 청동(靑銅)을 의미하는 말인데 김해패총에서는 청동류가 발견되지 않고 철기가 발견되었다. 따라서 김해패총은 금석병용시대가 아닌 철기시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동시대의 웅천패총도 다수의 철기를 반출하고 있으며 석기의 출토는 극소수였다. 이처럼 기원후 1세기경, 철기는 남방사회에서 실용화되었던 것 같다. 『三國志』 동이전 변진조를 보면 남방사회가 철생산으로 말미암아 마한예왜 등의 내왕과 낙랑대방과의 관계가 빈번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교통의 빈번함 때문에 왕망의 화천이 김해패총에서 그리고 제주도 산지항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청동기를 기원전 5세기 전후 청동기 시대의 상한에 관하여 김원룡 박사는 기원전 5~6세기로, 김정학 교수는 기원전 5세기경으로, 김양선 교수는 기원전 5세기 시반(時半)으로, 북한에서는 기원전 7~5세기로 보고 있다. (참고문헌은 생략했습니다.)
로 볼 때 금석 병용은 그러한 연대에 상당하거니와 삼한 사회가 기원후라는 점에서 볼 때 삼한 사회는 철기시대에 들어온 것이다.
이제 삼한 사회의 특징을 한가지 더 든다면 그것은 도작(稻作)의 시행이다. 이미 김해패총에서 미(米)의 흔적을 발견했거니와 이에 관한 기록이 『三國志』한전에 보인다. 김해패총이나 웅천패총에서 출토된 증(甑)의 존재는 바로 미(米)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삼한사회가 철을 사용하고 벼를 출산했다면 이는 원시적이라 할 수 없다.
(6) 신앙의례
삼한에는 소도(蘇塗)신앙이 있었다. 각 국에는 별읍이 있어 소도라 이름하였는데 큰 나무를 세워 북과 방울을 달아 놓고 귀신을 섬겼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곳으로 도망가면 잡아올 수 없었다고 하였다. 소도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삼한의 신앙의례와 관련한 연구는 역시 천군(天君)의 존재 및 소도(蘇塗)와 결부한 별읍사회로 귀결된다.
손진태(孫晉泰)는 마한사회를 씨족사회 단계에서 이탈하기 시작한 것으로 인식하면서, 소도는 입목(立木)간목(竿木)을 나타내는 ‘소대’‘솟대’‘솔대’에서 연유되는 일종의 경게표지로 오직 단목(單木)을 세운 것이 그 기원적 사상이 된다는 경제적 경계사상(境界思想)에서 찾았다. 그래서 부족적 읍락의 원시경계표인 소도는 읍락 경계신(境界神의 처소(處所) 및 신체(神體(神主))로 신앙되며 제단(祭壇)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점차 읍락의 수호신, 부족의 재산과 생명의 수호신으로 생장(生長)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葛城末治는 소도에서 대목을 건립하여 영고(鈴鼓)를 달았다는 기록과 사찰에서 법당(法幢)을 다는 행위가 서로 통한다고 하였다. 곧 불교의 幢과 幢竿의 기원을 소도의 立木에서 찾아 소도의 습속이 불교에 계승되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소도는 삼한의 천군이 있는 곳인 동시에 봄과 가을에 걸쳐 천군이 농경의례를 거행하는 곳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와 달리 소도신앙은 읍락단위의 부락제에서 발전한 것으로 소국 성립 이후 여러 읍락에서 거행되던 개별적인 제사행위를 하나로 묶은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은 소도가 있는 곳은 주민들의 일반 거주지역과는 구별되는 장소로 소도에서는 북과 방울이 그들이 믿는 귀신과 더불어 에배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 지역 자체가 신성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소도를 세운 뜻이 불교와 같다는 것은 소도가 종교적인 기능을 가진 예배장소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개
지방 거수국의 실직적 지배는 거수와 호민층으로 구성이 돼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일부 학자들은 한의 사회수준을 고조선의 사회보다 현저히 낮게 잡아 한은 국가단계의 사회가 아니라 그 이전의 사회 단계일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여러 개의 거수국들을 하나하나의 독립된 청치 집단으로 보고 작은 읍락사회나 군장사회로 본 것이다. 그러나 한이 발전된 사회란 것을 증명해 주는 자료가 많이 보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여겨진다. 예컨대 한에는 준엄한 법이 있었다고 말한 것이라던지, 진한 지역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중국, 왜 등 여러 지역으로 수출했다고 하는 『後漢書』와 『三國志』의 기록 등이 존재한다. 법의 존재는 그 사회가 국가단계였음을 말해주는 것이고, 법이 준엄했다는 사실은 그 사회가 국가단계로 들어선 지 오래 됐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또한 한은 철을 생산해서 수출했다는 것으로 보아 고조선보다 발달된 철기 사회인 것을 시사하는 바이고, 또 종교적으로 보아 각 거수국마다 하늘님(하느님)을 믿는 천군이란 종교 지도자가 있었다는 성격 또한 고조선의 사회성격을 계승하였다고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한의 삼한들은 후 삼국시대의 전신으로도 보여 진다. 특히 진한은 신라의 진신이라 거의 받아들여질 만큼 많은 공통점 및 유사점과 위치성을 보여 주고 있다. 또 다른 설로 마한에 진왕이 모든 곳의 통치자는 아니며 고조선이 위만조선으로 넘어가면서 가장 북방에 위치한 마한 지역으로 기준이 와 마한의 왕에게 허가를 받고 땅을 윤허 받았다고도 전해진다. 진왕에 대해서 한 전체의 통치자라는 설 또한 정설이 아닌 것을 유념하고 정확한 사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5) 삼한의 문화성격
우리는 삼한사회를 문화단계로 규정할 때 줄곧 금석병용기(金石竝用期) 사회라고 불러왔다. 김해패총을 발굴한 일본학자들이 이 유적을 금석병용기의 유적이라고 규정지은 데서 그 후에 널리 쓰여지게 되었는데 이는 김해패총에서 근소한 석기의 사용과 금속기의 사용이 보이는 시기(Calcholithic Period)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후 금석병용이란 용어는 삼한 사회를 규정하거나 또한 원시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어휘로 쓰여지게 되었다. 이병도 박사는 삼한시대에는 아직도 금석병용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규정했고, 임창순 교수도 남방은 금석병용기라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Chalco는 동(銅) 또는 청동(靑銅)을 의미하는 말인데 김해패총에서는 청동류가 발견되지 않고 철기가 발견되었다. 따라서 김해패총은 금석병용시대가 아닌 철기시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동시대의 웅천패총도 다수의 철기를 반출하고 있으며 석기의 출토는 극소수였다. 이처럼 기원후 1세기경, 철기는 남방사회에서 실용화되었던 것 같다. 『三國志』 동이전 변진조를 보면 남방사회가 철생산으로 말미암아 마한예왜 등의 내왕과 낙랑대방과의 관계가 빈번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교통의 빈번함 때문에 왕망의 화천이 김해패총에서 그리고 제주도 산지항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청동기를 기원전 5세기 전후 청동기 시대의 상한에 관하여 김원룡 박사는 기원전 5~6세기로, 김정학 교수는 기원전 5세기경으로, 김양선 교수는 기원전 5세기 시반(時半)으로, 북한에서는 기원전 7~5세기로 보고 있다. (참고문헌은 생략했습니다.)
로 볼 때 금석 병용은 그러한 연대에 상당하거니와 삼한 사회가 기원후라는 점에서 볼 때 삼한 사회는 철기시대에 들어온 것이다.
이제 삼한 사회의 특징을 한가지 더 든다면 그것은 도작(稻作)의 시행이다. 이미 김해패총에서 미(米)의 흔적을 발견했거니와 이에 관한 기록이 『三國志』한전에 보인다. 김해패총이나 웅천패총에서 출토된 증(甑)의 존재는 바로 미(米)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삼한사회가 철을 사용하고 벼를 출산했다면 이는 원시적이라 할 수 없다.
(6) 신앙의례
삼한에는 소도(蘇塗)신앙이 있었다. 각 국에는 별읍이 있어 소도라 이름하였는데 큰 나무를 세워 북과 방울을 달아 놓고 귀신을 섬겼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곳으로 도망가면 잡아올 수 없었다고 하였다. 소도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삼한의 신앙의례와 관련한 연구는 역시 천군(天君)의 존재 및 소도(蘇塗)와 결부한 별읍사회로 귀결된다.
손진태(孫晉泰)는 마한사회를 씨족사회 단계에서 이탈하기 시작한 것으로 인식하면서, 소도는 입목(立木)간목(竿木)을 나타내는 ‘소대’‘솟대’‘솔대’에서 연유되는 일종의 경게표지로 오직 단목(單木)을 세운 것이 그 기원적 사상이 된다는 경제적 경계사상(境界思想)에서 찾았다. 그래서 부족적 읍락의 원시경계표인 소도는 읍락 경계신(境界神의 처소(處所) 및 신체(神體(神主))로 신앙되며 제단(祭壇)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점차 읍락의 수호신, 부족의 재산과 생명의 수호신으로 생장(生長)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葛城末治는 소도에서 대목을 건립하여 영고(鈴鼓)를 달았다는 기록과 사찰에서 법당(法幢)을 다는 행위가 서로 통한다고 하였다. 곧 불교의 幢과 幢竿의 기원을 소도의 立木에서 찾아 소도의 습속이 불교에 계승되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소도는 삼한의 천군이 있는 곳인 동시에 봄과 가을에 걸쳐 천군이 농경의례를 거행하는 곳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와 달리 소도신앙은 읍락단위의 부락제에서 발전한 것으로 소국 성립 이후 여러 읍락에서 거행되던 개별적인 제사행위를 하나로 묶은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은 소도가 있는 곳은 주민들의 일반 거주지역과는 구별되는 장소로 소도에서는 북과 방울이 그들이 믿는 귀신과 더불어 에배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 지역 자체가 신성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소도를 세운 뜻이 불교와 같다는 것은 소도가 종교적인 기능을 가진 예배장소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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