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 남북조에서 송대까지의 사상사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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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위진 남북조에서 송대까지의 사상사 정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위진남북조 시대의 사상
1)위진 남북조 시대 사상의 현실적 배경
2)위진남북조 시대의 유학
3)노장사상(은둔사상)의 대두
4)불교사상의 대두
5)도가사상의 출현

2.수당 시대의 사상
1)수당시대의 불교
2)수당시대의 유학
3)수당시대의 도교

3.송대의 사상
1)대략적인 송대의 유학
2)불교가 신유학에 미친 영향
3)신유학의 완성자 주희
4)주희 이후의 유학

4.위진 남북조에서 송까지의 사상 변천사


5.참고문헌

본문내용

했고, 이후 그의 영향을 받은 담란, 선도 등이 정토 신앙의 맥을 이었고, 이에 따라 혜원은 중국 정토교의 선구로 평가받기도 한다.
5) 도가사상의 출현
위진남북조 시대의 사상을 거론하면서 도교를 빼놓을 수는 없다. 잘 알려져 있듯이 철학사상으로서의 도가 사상과 종교로서의 도교는 다르다. 도가 사상은 선진 시대 노자와 장자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철학사상이며, 도교는 고대 동아시아 사회 전반에 퍼져 있었던 샤머니즘이나 다양한 민간 신앙의 요소, 신선설, 참위설, 철학사상으로서의 도가 사상의 요소까지 모두 포함한 복잡다양한 종교이다. 종교로서의 도교가 초보적이나마 교리 체계와 교단을 갖춘 것은 후한의 신흥 종교라고 할 수 있는 태평도와 오두미도가 처음이다.
도가 사상의 출현은 태평도에서부터 살펴 볼 수 있다. 태평도는 오늘날의 산동성 동남부에 위치한 낭야 출신의 간길이라는 인물이 신인으로부터 내려 받았다는 <태평청령서>의 {태평경}에 의거한 것으로, 후한 시대에 오늘날의 하북성 남부에 위치한 거록 출신의 장각이 주창하여 수많은 신도를 얻었다. <태평청령서>는 길흉화복이 개인의 행위에서 비롯된다고 보아 선행을 권장하고 악행을 멀리하라고 가르치며, 선행을 많이 쌓으면 목숨이 연장된다고 주장하였고, 방중술이나 조용한 방에서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도 강조한다. 184년에 장각은 조직화된 신도들을 이끌고 후한 왕조에 반기를 들어 이른바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다.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수많은 농민들이 가담했고, 이것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농민 반란이었다. 황건적의 난은 후한의 몰락을 재촉한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태평도 이외에도, 오두미도를 살펴 볼 수 있다. 오두미도는 오늘날의 안휘성 패현 출신 장릉이 창시한 것으로, 장릉은 사천지방의 학명산에서 수도하면서 직접 도서를 만들어 신자를 끌어 모았다. 교단에 들어오는 사람으로부터 다섯 말의 쌀을 받았기 때문에 오두미도라 불렸다. 장릉은 주문과 귀신을 부리는 술법을 시행하여 병든 사람을 고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그는 장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치병을 내세우며 신자들을 끌어 모았다. 장릉의 손자 장로는 한중지방에서 종교 공동체의 성격을 지닌 반독립적인 왕국을 이루어 30년 동안 통치했다. 후한의 중앙 정부가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나, 장로는 215년에 조조에게 항복한다. 오두미도는 장로 대에 와서 본격적인 조직과 체계가 완성되었으며, 장로는 할아버지 장릉을 천사, 아버지 장형을 사사, 그리고 장로 자신을 스스로 계사라 일컬었으며, 창시자인 장릉을 천사라 일컬었기 때문에 훗날 오두미도 계통의 도교는 천사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태평도와 오두미도는 모두 나름의 교리 체계에 입각하여 교단 조직을 갖추었으나 신선 사상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다는 특징을 지니는데, 이는 태평도와 오두미도 모두 치병과 주술이 중심 요소였던 것에서 살펴 볼 수 있다. 그밖에 신자로 하여금 스스로 죄과를 뉘우치게 한다든가 선한 행동을 권장한다든가 하는 윤리적인 요소도 지니고 있었다. 이들 양 집단은 훗날 도교의 전개 과정에서 다양한 종교 집단이 생겨나는 기반이 되었다. 이후 위진남북조 시대 도교의 전개에서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은 동진의 갈홍(283-343)과 북위의 구겸지(365?-448)를 들 수 있다. 그는 십대부터 이미 도교 수련을 쌓기 시작했고, 만년에는 광동 지방의 나부산에 올라 선약을 만들고 저술에 힘쓰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갈홍은 당시까지 전해 내려오는 도교 문헌들을 참고하여 나이 35세 때인 317년에 <포박자>를 저술했다. <포박자>는 20권의 내편과 50권의 외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외편은 유교에 관한 기술이고 내편은 노장 사상에 바탕을 두어 신선의 실재를 논하고 선도 수행의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포박자>는 태평도나 오두미도 등 이전 시대의 도교와 보다 후대에 확립된 도교 사이를 연결하는 일종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으로도 평가받는다. 이후 갈홍은 태평도와 오두미도에서는 그다지 찾아볼 수 없는 신선 사상을 도교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신선은 불로불사의 신령스런 존재로서, 도교도들은 보통 사람도 적절하게 수련을 쌓으면 신선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갈홍은 불사의 추구를 중심 주제로 삼아 신선의 실재를 주장했으며 심지어 노자를 노군이라 하여 신적인 존재로 간주한다. 그가 이렇게 노자를 신이라 부른것은 신선설의 영향 때문이라 할 수 있으며, 유교에는 공자가 있고 불교에는 부처가 있는데 도교에는 그런 존재가 없다는 현실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도 있다. 요컨대 공자나 부처와 맞먹을 만 한 교조를 가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구겸지는 강남으로 이주하지 않은 한족 명문가 출신으로, 젊어서부터 선도에 심취하여 장로의 천사도를 따랐으며, 오늘날의 하남성 낙양 동남쪽에 위치한 숭산에서 수행하다가 신격화된 노자인 태상노군을 만나 도교를 개혁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따라 구겸지는 자신의 가르침을 신천사도라 일컫는데, 구겸지는 이후에도 노군의 후손이라는 이보문과 만나 신령스런 내용의 책을 전해 받았다고 한다. 그는 특별한 기술을 통해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방중술을 폐하려 했고, 신자들로부터 쌀이나 돈을 거두어들이는 관습도 없애고자 했다. 또한 종교적인 의례 절차, 여러 신들의 계열, 복장이나 부적, 교단 조직 등을 체계화, 제도화했으며, 갈홍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노자를 신격화하여 도교의 교조로 삼고, 구겸지 자신이 그 정통을 이었음을 자부했다. 구겸지는 당시 권력자 최호의 추천을 통해 424년에 북위의 황제 태무제를 만나 도교의 교리를 설명하고 책을 바쳤는데, 이에 태무제는 구겸지가 북위에 도장을 설치할 것을 허락했고, 구겸지의 활동을 적극 후원했다. 440년에는 구겸지의 제안을 따라 스스로를 태평진군이라 일컫고 연호까지 바꾸었으며, 442년에는 황제가 몸소 도단에서 법록, 즉 수행 단계에 따라 도사에게 수여하는 일종의 자격 증명서를 받기도 했다. 태무제 이후 북위 황제들은 즉위할 때 도단에서 법록을 받았고, 결국 도교는 북위의 사실상의 국가 공식 종교가 되었다. 이렇게 도교가 북위의 공식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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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4.27
  • 저작시기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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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46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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