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송강의 문학과 사상
1. 송강의 삶
2. 작품집 『송강가사』
(1) 간행과정
(2) 판본간의 차이점
3. 사상적인 측면에서의 송강 문학
Ⅲ. 관동별곡
1. <관동별곡> 구성의 특징
(1) <관동별곡> 분단 문제
(2) 단락별 공간 중심 구성
(3) 대비(對比)적 구성
2. <관동별곡>의 본질
(1) 내용층위의 이중적 양상
(2) 가면 혹은 진실
(3) <關東別曲>: 어조의 불균형과 이상적 미화의 방식
Ⅳ. 속미인곡
1. 속미인곡의 구성
2. 속미인곡의 형식-대화체
(1) 대화체 형식의 효과
(2) 갑녀와 을녀의 역할
(3) 갑녀와 을녀의 실체
3. ‘달’과 ‘궂은비’의 의미
4. 사미인곡과의 비교
Ⅴ. 나가는 말
Ⅱ. 송강의 문학과 사상
1. 송강의 삶
2. 작품집 『송강가사』
(1) 간행과정
(2) 판본간의 차이점
3. 사상적인 측면에서의 송강 문학
Ⅲ. 관동별곡
1. <관동별곡> 구성의 특징
(1) <관동별곡> 분단 문제
(2) 단락별 공간 중심 구성
(3) 대비(對比)적 구성
2. <관동별곡>의 본질
(1) 내용층위의 이중적 양상
(2) 가면 혹은 진실
(3) <關東別曲>: 어조의 불균형과 이상적 미화의 방식
Ⅳ. 속미인곡
1. 속미인곡의 구성
2. 속미인곡의 형식-대화체
(1) 대화체 형식의 효과
(2) 갑녀와 을녀의 역할
(3) 갑녀와 을녀의 실체
3. ‘달’과 ‘궂은비’의 의미
4. 사미인곡과의 비교
Ⅴ. 나가는 말
본문내용
천 임억령을 추모하여 찬미하는 내용이 직접 나타나 있다고 주장하였다.
, 50대설 이병기백철, 국문학전사, 신구문화사,1980, p.131
이병기는 “송강이 47세후 高揚에 退去하였다가 평창으로 가 5년여 동안 평창에서 김성원의 山亭을 얻어 있으니 水石과 鷗鶴으로 더불어 벗도 삼고, 국사를 걱정하며 君恩을 생각하였다. 성산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도 이때 지은 것이다.”라고 주장 하였다.
등 다양하게 논의되고 있다.
54세 때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철저히 동인들을 추방하였으며, 다음해에 좌의정에 올랐다. 56세 때 동인파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와 함께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나섰는데 그 일로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던 인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명천에 유배되었다가,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나 관직에 복귀하고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58세 때 강화에서 죽었다.
2. 작품집 『송강가사』
송강의 가사와 시조는 松江歌辭, 協律大成, 古今歌曲, 靑丘永言, 女唱歌謠錄, 精選朝鮮歌曲, 海東歌謠 ,歌曲源流, 古今歌謠, 大東風雅, 警民編, 松江別集追錄遺詞 및 기타 시조집과 같은 문헌에 전해지는데 이병기, “松江歌辭의 硏究”, 震檀學報, 제 4집 震檀學會,1936. 참조
송강의 가사와 시조를 전집형태로 모아 가집 형태로 전하는 것은 목판본으로 된 松江歌辭와 筆寫本으로 된 松江別集追錄遺詞이다. 본 발제에서는 松江歌辭 板本의 간행과정과 그 차이점을 歌辭作品 중심으로 알아보도록 하겠다.
(1) 간행과정
시기
판본명
간행자
간행시기
간행지
분량및 표기방식
現專 여부
17세기
구북관본
미상
1623~1636
함경도 북관
미상
×
황주본
이계상
1690~1698
황해도 황주현
미상
×
의성본
정호
1696~1698
경상도 의성현
단권26장순국문표기
서울대 도서관
(?) 김문기의 논문(김문기, 松江蘆溪孤山의 歌潗 板本 및 冊版 硏究, 국어 교육연구 21집, 1989)에 의하면 방종현 소장본이었던 의성본(이선본)은 서울대 규장각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확인해 본 결과 규장각 도서관에 소장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김문기는 이 本을 방종현 소장본이라 하였다.
18세기
관북본
정호
1704
함경도 함흥
미상
×
성주본
정관하
1747
경상도 성주목
2권 1책 44장
국한자표기
5~6종
전함
관서본
정실
1768
평안도 평양
단권24장순국문표기
국립
중앙 도서관
19세기
송강집별집
추록유사
정운오
1846~1867
2권 1책
국한자표기
○
위의 표 김문기, 앞의 논문, p.13 참조
최규수, 송강 정철 시가의 수용사적 탐색, 도서출판 월인, 2002, p.26 참조
를 보면, 작품집 “松江歌辭”는 비교적 지속적인 간행 과정을 보여 왔음을 알 수 있다. 송강 사후의 시기에서부터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송강의 작품을 수록하는 “松江歌辭”는 여러 번 간행되었는데 판본 간행을 거듭하되 매번 간행자를 바꾸면서 약간의 변이를 동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때의 변이는 순 국문 표기양상에서 국문과 한자를 아울러 사용하여 표기하는 양상으로, 단권에서 2권으로 분량을 늘여가는 쪽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松江歌辭”성격은 단순한 작품 수록에만 그치지 않고 관련 자료를 부수하는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인데, 더구나 후대에 나온 “松江集別集追錄遺事”인 경우에는 관련 자료를 보다 넓게 수집하여 이를 수록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단순한 작품 수록의 양상에서 벗어나 작품의 이해를 도모하는 쪽으로 배려한 듯한 인상이 크다.
현존하는 판본 위주로 정리하여 보면, 종래 소위 이선본이라 불러 왔던 의성본은 방종현 소장본이 유일본이다. 의성본은 단권 26장의 분량으로 “松江歌辭”라는 권제가 없이 곧바로 관동별곡으로 시작되어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장진주사의 순서로 이어지고, “短歌”라는 표시가 없이 시조 51수가 실려있다. 이 판본은 정종명의 증손자인 정호가 의성군수로 가서 간행한 것으로 그가 의성 현령이 된 1696년에서 정천이 발문을 쓴 1698년 사이에 간행하였으리라 추정한다.
관서본은 단권 24장의 분량인데, 가사의 배열 순서나 51수의 단가 내용 등이 의성본과 동일하다. 관동별곡에 이어 김상헌의 한시를 수록한 뒤, 그 말미에 이선의 발문을 수록하였다. 이러한 체재는 아마도 앞서 나온 의성분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답습한 데서 비롯된 때문일 것이다.
성주본은 2권1책44장의 분량으로, 상권은 “松江歌辭上”이라는 권제로 시작하여 <關東別曲>,<思美人曲>,<續美人曲>,<星山別曲>,<將進酒辭> 순으로 실어 놓았고, 하권은 “松江歌辭下”라는 권제로 시작하여 “短歌”를 실어 놓았다
“송강집별집추록유사”는 송강의 시문집인 “송강선생문집”에 추록되어 있는 것으로, 일종의 부록에 가까운 작품집이다. 별집유사의 특징은 가장 후대에 나온 만큼 앞서 살핀 기존의 판본에 누락된 추모 한시평가자료 등 송강 작품에 관한 자료들을 가능한 한 모두 섭렵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표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기존의 판본에 실린 서발문을 그대로 옮겨왔을 뿐, 이 판본의 간행과정과 의도에 관해 밝힌 독자적인 서발문 등은 없는 상태여서 아쉬움이 남는다. 아마도 19세기에 이르러 송강 가문에서 행한 선조의 작품 제일 작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듯하다. 김문기, 앞의 논문, p.13~14 참조
최규수, 송강 정철 시가의 수용사적 탐색, 도서출판 월인, 2002, p.24~26 참조
(2) 판본간의 차이점 김문기, 앞의 논문, p.18~19
현전하지 않는 구북관본, 황주본, 관북본은 논외로 할 수 밖에 없으므로 여기서는 현전하는 의성본, 성주본, 관서본 등 3판본에 대해서 그 차이점을 살펴보았다.
① 어구 첨삭의 차이
성주본의 어떤 어구가 의성관서 양본에는 생략된 경우도 있고 반대로 성주본에는 없 는 어구가 의성관서본에는 삽입된 경우가 있다.
작품명
성주본
의성본
관서본
관동별곡
×
어와뎌디위를
어와뎌디의
×
어이면
이이면
×
알거이고
알거이고
속미인곡
×
니
니
×
하리
, 50대설 이병기백철, 국문학전사, 신구문화사,1980, p.131
이병기는 “송강이 47세후 高揚에 退去하였다가 평창으로 가 5년여 동안 평창에서 김성원의 山亭을 얻어 있으니 水石과 鷗鶴으로 더불어 벗도 삼고, 국사를 걱정하며 君恩을 생각하였다. 성산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도 이때 지은 것이다.”라고 주장 하였다.
등 다양하게 논의되고 있다.
54세 때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철저히 동인들을 추방하였으며, 다음해에 좌의정에 올랐다. 56세 때 동인파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와 함께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나섰는데 그 일로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던 인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명천에 유배되었다가,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나 관직에 복귀하고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58세 때 강화에서 죽었다.
2. 작품집 『송강가사』
송강의 가사와 시조는 松江歌辭, 協律大成, 古今歌曲, 靑丘永言, 女唱歌謠錄, 精選朝鮮歌曲, 海東歌謠 ,歌曲源流, 古今歌謠, 大東風雅, 警民編, 松江別集追錄遺詞 및 기타 시조집과 같은 문헌에 전해지는데 이병기, “松江歌辭의 硏究”, 震檀學報, 제 4집 震檀學會,1936. 참조
송강의 가사와 시조를 전집형태로 모아 가집 형태로 전하는 것은 목판본으로 된 松江歌辭와 筆寫本으로 된 松江別集追錄遺詞이다. 본 발제에서는 松江歌辭 板本의 간행과정과 그 차이점을 歌辭作品 중심으로 알아보도록 하겠다.
(1) 간행과정
시기
판본명
간행자
간행시기
간행지
분량및 표기방식
現專 여부
17세기
구북관본
미상
1623~1636
함경도 북관
미상
×
황주본
이계상
1690~1698
황해도 황주현
미상
×
의성본
정호
1696~1698
경상도 의성현
단권26장순국문표기
서울대 도서관
(?) 김문기의 논문(김문기, 松江蘆溪孤山의 歌潗 板本 및 冊版 硏究, 국어 교육연구 21집, 1989)에 의하면 방종현 소장본이었던 의성본(이선본)은 서울대 규장각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확인해 본 결과 규장각 도서관에 소장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김문기는 이 本을 방종현 소장본이라 하였다.
18세기
관북본
정호
1704
함경도 함흥
미상
×
성주본
정관하
1747
경상도 성주목
2권 1책 44장
국한자표기
5~6종
전함
관서본
정실
1768
평안도 평양
단권24장순국문표기
국립
중앙 도서관
19세기
송강집별집
추록유사
정운오
1846~1867
2권 1책
국한자표기
○
위의 표 김문기, 앞의 논문, p.13 참조
최규수, 송강 정철 시가의 수용사적 탐색, 도서출판 월인, 2002, p.26 참조
를 보면, 작품집 “松江歌辭”는 비교적 지속적인 간행 과정을 보여 왔음을 알 수 있다. 송강 사후의 시기에서부터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송강의 작품을 수록하는 “松江歌辭”는 여러 번 간행되었는데 판본 간행을 거듭하되 매번 간행자를 바꾸면서 약간의 변이를 동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때의 변이는 순 국문 표기양상에서 국문과 한자를 아울러 사용하여 표기하는 양상으로, 단권에서 2권으로 분량을 늘여가는 쪽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松江歌辭”성격은 단순한 작품 수록에만 그치지 않고 관련 자료를 부수하는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인데, 더구나 후대에 나온 “松江集別集追錄遺事”인 경우에는 관련 자료를 보다 넓게 수집하여 이를 수록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단순한 작품 수록의 양상에서 벗어나 작품의 이해를 도모하는 쪽으로 배려한 듯한 인상이 크다.
현존하는 판본 위주로 정리하여 보면, 종래 소위 이선본이라 불러 왔던 의성본은 방종현 소장본이 유일본이다. 의성본은 단권 26장의 분량으로 “松江歌辭”라는 권제가 없이 곧바로 관동별곡으로 시작되어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장진주사의 순서로 이어지고, “短歌”라는 표시가 없이 시조 51수가 실려있다. 이 판본은 정종명의 증손자인 정호가 의성군수로 가서 간행한 것으로 그가 의성 현령이 된 1696년에서 정천이 발문을 쓴 1698년 사이에 간행하였으리라 추정한다.
관서본은 단권 24장의 분량인데, 가사의 배열 순서나 51수의 단가 내용 등이 의성본과 동일하다. 관동별곡에 이어 김상헌의 한시를 수록한 뒤, 그 말미에 이선의 발문을 수록하였다. 이러한 체재는 아마도 앞서 나온 의성분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답습한 데서 비롯된 때문일 것이다.
성주본은 2권1책44장의 분량으로, 상권은 “松江歌辭上”이라는 권제로 시작하여 <關東別曲>,<思美人曲>,<續美人曲>,<星山別曲>,<將進酒辭> 순으로 실어 놓았고, 하권은 “松江歌辭下”라는 권제로 시작하여 “短歌”를 실어 놓았다
“송강집별집추록유사”는 송강의 시문집인 “송강선생문집”에 추록되어 있는 것으로, 일종의 부록에 가까운 작품집이다. 별집유사의 특징은 가장 후대에 나온 만큼 앞서 살핀 기존의 판본에 누락된 추모 한시평가자료 등 송강 작품에 관한 자료들을 가능한 한 모두 섭렵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표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기존의 판본에 실린 서발문을 그대로 옮겨왔을 뿐, 이 판본의 간행과정과 의도에 관해 밝힌 독자적인 서발문 등은 없는 상태여서 아쉬움이 남는다. 아마도 19세기에 이르러 송강 가문에서 행한 선조의 작품 제일 작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듯하다. 김문기, 앞의 논문, p.13~14 참조
최규수, 송강 정철 시가의 수용사적 탐색, 도서출판 월인, 2002, p.24~26 참조
(2) 판본간의 차이점 김문기, 앞의 논문, p.18~19
현전하지 않는 구북관본, 황주본, 관북본은 논외로 할 수 밖에 없으므로 여기서는 현전하는 의성본, 성주본, 관서본 등 3판본에 대해서 그 차이점을 살펴보았다.
① 어구 첨삭의 차이
성주본의 어떤 어구가 의성관서 양본에는 생략된 경우도 있고 반대로 성주본에는 없 는 어구가 의성관서본에는 삽입된 경우가 있다.
작품명
성주본
의성본
관서본
관동별곡
×
어와뎌디위를
어와뎌디의
×
어이면
이이면
×
알거이고
알거이고
속미인곡
×
니
니
×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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