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 큰 나라 한국
Ⅱ. 본론
1. 한글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2. 한글의 우수성
가. 한글의 언어학적 우수성
나. 한글에 담긴 정신
3. 한글 명칭의 유래
4. 세종대왕과 유네스코
5. 한글을 바라보는 세계의 눈
Ⅲ. 결론 : 국어사랑 나라사랑
※ 참고문헌
Ⅱ. 본론
1. 한글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2. 한글의 우수성
가. 한글의 언어학적 우수성
나. 한글에 담긴 정신
3. 한글 명칭의 유래
4. 세종대왕과 유네스코
5. 한글을 바라보는 세계의 눈
Ⅲ. 결론 : 국어사랑 나라사랑
※ 참고문헌
본문내용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생성 원리의 차이로 설명되면, 그 모양도 모음자는 수평과 수직의 선분을 이용하여 만들었다는 점에서 자음과 쉽게 구별된다. 그러나 로마자나 일본의 가나에서는 모음자와 자음자를 구별할 아무런 형태상의 특징을 찾을 수 없다.
나. 한글에 담긴 정신
(1) 확고한 언어 문자관
첫째는 세종대왕을 비롯하여 한글 창제에 참여한 학자들의 확고한 언어 문자관을 확인할 수 있는 국가주의적 정신이다. 사실 언어의 유형론적 차이에서 볼 때 한국어는 교착어에 속하고, 중국어는 고립어에 속한다. 그 뿐만 아니라 두 언어는 음운 조직이 다른 것도 물론이다. 따라서 한자는 중국어에는 적합할지언정 한국어를 표기하는 데는 맞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정인지는 언어가 서로 다른 이유를 “사방의 풍토가 다르면 소리의 기운도 역시 이에 따라 다르다.”고 하였다. 이것은 중국 고대의 언어 사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풍토설에 입각한 언어관이다. 이러한 확고한 언어관이 한글 창제의 동기를 촉발하였다고 본다.
세종 당시의 지식인 학자들은 거의 중국측 한학에 빠져 있었다. 그러한 시대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한 중 양국어의 근본적 차이를 인식하고 확고한 언어 문자관을 확립하여 한국어에 적합한 새 문자를 창제한 정신은 높이 평가되어 마땅할 것이다.
(2) 민주적 기회 균등의 정신
둘째는 일반 언중들로 하여금 정상적인 문자 생활을 가능하게하려는 동기로서 민주적 기회 균등의 정신이다. 한자는 단기간에는 배우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우리말을 제대로 표현하기도 어렵다. 다구나 일반 언중들은 한자를 배울 기회마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자기의 뜻을 전달하고자 하여도 글로써 나타낼 수 없는 입장을 세종은 매우 딱하게 여기어 결국 배우고 쓰기 쉬운 새 문자(한글)를 창제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동기는 정인지의 서문에 소상하게 나타나 있다.
우리 나라는 도덕, 예술, 문화가 중국과 견줄 만하다. 다만 우리말이 중국과 달라서 글을 배우는 사람이 그 뜻을 깨우치기 어려움을 근심하고, 옥사를 다스리는 사람은 그 곡절을 통하기 어려움을 애태웠다. 옛날(신라) 설총이 이두를 만들어 관청이나 민간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쓰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한자를 차용한 것이므로 혹은 걸리고 혹은 막히어서 비천하고 허황하여 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일상의 말을 적는 데 있어서는 곧 만에 하나도 능히 통달하지 못하였다.
위의 인용문에서는 사법의 공평까지도 도모하려 한 동기를 엿볼 수 있다.
(3) 실용적 문화주의의 정신
셋째는 한글을 간단하고 편리하게 만들어서 대중들이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하려는 동기였다. 이는 곧 실용적 문화주의의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문자의 대중화 또는 실용화를 기도한 것이다. 다시 정인지의 서문을 통해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28자로써는 전환이 무궁하고 간단하면서도 요긴하고 정묘하면서도 잘 통한다. 그러므로 재주가 있는 사람은 하루 아침을 마치기도 전에 깨우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이 못되어 배울 수 있다. 이로써 한문을 풀이하면 그 뜻을 알 수 있고 송사를 들으면 그 정상(情狀)을 얻을 수 있다.\"
위의 내용은 과장된 표현이 아님이 오늘날 입증되고 있다. 우리의 경험으로 보아도 그렇거니와 한글을 처음으로 익히는 외국인들의 경험담에서도 확인이 되고 있다.
외국인들 중에는 한글에 관하여 한 두어 시간 정도의 설명을 듣고 나면 시내의 한글 간판들을 웬만큼 읽는 사례가 많다. 그밖에도 한글을 쉽게 깨우치는 사례는 많이 보고되어 있다. 그중에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본다. 독일에서 한국학을 강의하는 W. Sasse 교수(함브르그 대학)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맨 처음 보기에는 한글이 어렵다고 느꼈지만 실제로 배워 보니까 하루 만에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특히 한글 글자 모양이 입 모양이나 발음 모양을 본따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까 아주 인상적이고 쉽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집의 10살도 안 된 애들도 취미로 한글을 금방 깨우치고 나서는 자기들끼리 비밀 편지를 쓸 때 한글을 씁니다. 독일말을 한글로 적는 것이지요. 그만큼 한글은 쉽게 익혀서 쓸 수 있는 글자입니다.”
위의 내용들을 종합하여 볼 때 결국 한글 창제의 기본 동기와 정신은 종래 어려운 한자 한문이 일부 상층 계급의 독점물이었음에 비추어 일반 대중까지도 배우기 쉬운 고유의 문자를 만듦으로써 국민을 널리 교화하려는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다. 즉, 한글의 이름을 ‘훈민정음 ;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이라한 이유도 여기 있다고 하겠다.
3. 한글 명칭의 유래
세종이 새 글자를 만들고 붙인 이름은 ‘훈민정음’이다. 이것이 공식적인 명칭이었는데, 동 시대에 언문이라 칭한 기록도 보인다. 현재의 우리는 우리 문자를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칭하는데, 그 사이에 언문 외에도 반절, 암클, 중글, 국문, 가갸글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훈민정음의 명칭이 언제 어떤 연유로 지금의 한글로 정착되었을까?
학계에서 널리 인정받는 설로는 ‘한글’이라는 명칭을 만든 이는 주시경 주시경 [周時經, 1876.12.22~1914.7.27] 본관 상주(尙州). 호 한힌샘·한흰메. 초명 상호(相鎬).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출생하였다. 한국말과 글을 과학적으로 체계를 세워 국어학 중흥의 선구자가 되었다.
선생으로 1910년에 주시경 선생이 쓴 글의 ‘한나라말’에서 ‘나라’를 떼어 내고 만든 ‘한말’과 같이 ‘한나라글’로부터 만들어진 이름으로 본다. 그리고 ‘한글’의 ‘한’의 의미는 ‘하나(一), 크다(大), 바르다(正)’는 의미가 결부되어 있지만 이는 뒤에 연결된 의미이고 그 본래 기원은 ‘삼한’의 ‘한’이나 ‘대한’의 ‘한’과 관련될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결국 ‘한글’은 한국의 문자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한글이란 명칭이 실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13년 9월이라고 한다. 이 날짜로 신문관에서 창간한 《아이들보이》라는 아동 잡지에 ‘한글란’이 만들어지면서부터라 한다. 그 후 1914년 조선어 강습원이 ‘하글배곧’으로 바뀌고, 1915년 이 이름에 의한 졸업 증서 등이 발부되자 많이 알려
나. 한글에 담긴 정신
(1) 확고한 언어 문자관
첫째는 세종대왕을 비롯하여 한글 창제에 참여한 학자들의 확고한 언어 문자관을 확인할 수 있는 국가주의적 정신이다. 사실 언어의 유형론적 차이에서 볼 때 한국어는 교착어에 속하고, 중국어는 고립어에 속한다. 그 뿐만 아니라 두 언어는 음운 조직이 다른 것도 물론이다. 따라서 한자는 중국어에는 적합할지언정 한국어를 표기하는 데는 맞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정인지는 언어가 서로 다른 이유를 “사방의 풍토가 다르면 소리의 기운도 역시 이에 따라 다르다.”고 하였다. 이것은 중국 고대의 언어 사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풍토설에 입각한 언어관이다. 이러한 확고한 언어관이 한글 창제의 동기를 촉발하였다고 본다.
세종 당시의 지식인 학자들은 거의 중국측 한학에 빠져 있었다. 그러한 시대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한 중 양국어의 근본적 차이를 인식하고 확고한 언어 문자관을 확립하여 한국어에 적합한 새 문자를 창제한 정신은 높이 평가되어 마땅할 것이다.
(2) 민주적 기회 균등의 정신
둘째는 일반 언중들로 하여금 정상적인 문자 생활을 가능하게하려는 동기로서 민주적 기회 균등의 정신이다. 한자는 단기간에는 배우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우리말을 제대로 표현하기도 어렵다. 다구나 일반 언중들은 한자를 배울 기회마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자기의 뜻을 전달하고자 하여도 글로써 나타낼 수 없는 입장을 세종은 매우 딱하게 여기어 결국 배우고 쓰기 쉬운 새 문자(한글)를 창제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동기는 정인지의 서문에 소상하게 나타나 있다.
우리 나라는 도덕, 예술, 문화가 중국과 견줄 만하다. 다만 우리말이 중국과 달라서 글을 배우는 사람이 그 뜻을 깨우치기 어려움을 근심하고, 옥사를 다스리는 사람은 그 곡절을 통하기 어려움을 애태웠다. 옛날(신라) 설총이 이두를 만들어 관청이나 민간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쓰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한자를 차용한 것이므로 혹은 걸리고 혹은 막히어서 비천하고 허황하여 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일상의 말을 적는 데 있어서는 곧 만에 하나도 능히 통달하지 못하였다.
위의 인용문에서는 사법의 공평까지도 도모하려 한 동기를 엿볼 수 있다.
(3) 실용적 문화주의의 정신
셋째는 한글을 간단하고 편리하게 만들어서 대중들이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하려는 동기였다. 이는 곧 실용적 문화주의의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문자의 대중화 또는 실용화를 기도한 것이다. 다시 정인지의 서문을 통해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28자로써는 전환이 무궁하고 간단하면서도 요긴하고 정묘하면서도 잘 통한다. 그러므로 재주가 있는 사람은 하루 아침을 마치기도 전에 깨우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이 못되어 배울 수 있다. 이로써 한문을 풀이하면 그 뜻을 알 수 있고 송사를 들으면 그 정상(情狀)을 얻을 수 있다.\"
위의 내용은 과장된 표현이 아님이 오늘날 입증되고 있다. 우리의 경험으로 보아도 그렇거니와 한글을 처음으로 익히는 외국인들의 경험담에서도 확인이 되고 있다.
외국인들 중에는 한글에 관하여 한 두어 시간 정도의 설명을 듣고 나면 시내의 한글 간판들을 웬만큼 읽는 사례가 많다. 그밖에도 한글을 쉽게 깨우치는 사례는 많이 보고되어 있다. 그중에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본다. 독일에서 한국학을 강의하는 W. Sasse 교수(함브르그 대학)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맨 처음 보기에는 한글이 어렵다고 느꼈지만 실제로 배워 보니까 하루 만에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특히 한글 글자 모양이 입 모양이나 발음 모양을 본따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까 아주 인상적이고 쉽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집의 10살도 안 된 애들도 취미로 한글을 금방 깨우치고 나서는 자기들끼리 비밀 편지를 쓸 때 한글을 씁니다. 독일말을 한글로 적는 것이지요. 그만큼 한글은 쉽게 익혀서 쓸 수 있는 글자입니다.”
위의 내용들을 종합하여 볼 때 결국 한글 창제의 기본 동기와 정신은 종래 어려운 한자 한문이 일부 상층 계급의 독점물이었음에 비추어 일반 대중까지도 배우기 쉬운 고유의 문자를 만듦으로써 국민을 널리 교화하려는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다. 즉, 한글의 이름을 ‘훈민정음 ;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이라한 이유도 여기 있다고 하겠다.
3. 한글 명칭의 유래
세종이 새 글자를 만들고 붙인 이름은 ‘훈민정음’이다. 이것이 공식적인 명칭이었는데, 동 시대에 언문이라 칭한 기록도 보인다. 현재의 우리는 우리 문자를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칭하는데, 그 사이에 언문 외에도 반절, 암클, 중글, 국문, 가갸글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훈민정음의 명칭이 언제 어떤 연유로 지금의 한글로 정착되었을까?
학계에서 널리 인정받는 설로는 ‘한글’이라는 명칭을 만든 이는 주시경 주시경 [周時經, 1876.12.22~1914.7.27] 본관 상주(尙州). 호 한힌샘·한흰메. 초명 상호(相鎬).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출생하였다. 한국말과 글을 과학적으로 체계를 세워 국어학 중흥의 선구자가 되었다.
선생으로 1910년에 주시경 선생이 쓴 글의 ‘한나라말’에서 ‘나라’를 떼어 내고 만든 ‘한말’과 같이 ‘한나라글’로부터 만들어진 이름으로 본다. 그리고 ‘한글’의 ‘한’의 의미는 ‘하나(一), 크다(大), 바르다(正)’는 의미가 결부되어 있지만 이는 뒤에 연결된 의미이고 그 본래 기원은 ‘삼한’의 ‘한’이나 ‘대한’의 ‘한’과 관련될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결국 ‘한글’은 한국의 문자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한글이란 명칭이 실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13년 9월이라고 한다. 이 날짜로 신문관에서 창간한 《아이들보이》라는 아동 잡지에 ‘한글란’이 만들어지면서부터라 한다. 그 후 1914년 조선어 강습원이 ‘하글배곧’으로 바뀌고, 1915년 이 이름에 의한 졸업 증서 등이 발부되자 많이 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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